서울 강남 역삼동의 랜드마크 건물인 강남파이낸스센터. 한국 최상위 프라이빗뱅킹(PB) 고객 유치를 놓고 세 증권사가 총성 없는 전쟁을 펼치는 곳이다.
이 건물 25층에 위치한 삼성증권 SNI 강남파이낸스센터점이 문을 연 것은 지난해 6월이다. 뒤이어 11월 우리투자증권이 기존 PB센터를 통합해 ‘프리미어 블루’를 출범시키면서 14층에 둥지를 틀었다. 여기에 최근 한국투자증권이 가세했다. 한국증권은 3월31일 이 건물 15층에 5억원 이상 고객만 상대하는 ‘V Privilege’ 1호점을 오픈했다.
이들 3개사뿐 아니다. 미래에셋은 최근 미래에셋자산운용과 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 등 계열사 본사를 을지로 ‘센터원’ 빌딩으로 이전하면서 이 건물 최상층인 32층에 VVIP를 대상으로 하는 WM(Wealth Management)센터를 오픈했다. 이곳은 2009년 개설된 인터콘티넨탈호텔 WM센터, 상반기 중 오픈 예정인 예술의 전당 WM센터와 더불어 미래에셋 VIP영업의 총본산 역할을 하게 된다.
SK증권도 4월1일 서울 서초동 GT타워 4층에 강남PIB센터를 오픈하면서 ‘PB대전’에 뛰어들었다. PIB(Private Investment Banking)는 VVIP의 개념을 개인에서 법인, 전문가그룹으로 넓힌 자산관리 서비스다. 기존 거액자산가 외에 법인 및 의사, 변호사, CEO 등 전문가그룹을 대상으로 재무컨설팅, 회계지원, 절세 등의 종합적인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
주식중개(브로커리지) 분야의 최강자로 군림해온 대우증권은 최근 회사 영업 주력을 브로커리지에서 종합자산관리로 옮겨가는 중이다. 지난해 14개 지점을 통폐합한 데 이어 올해도 13개 지점에 대해 같은 슬림화 조치를 단행했다. 대신 7 대 3비율로 나눠져 있던 ‘인베스트매니저’(브로커리지 담당)와 ‘웰스매니저’(자산관리 담당)를 ‘PB’로 통합하는 등 자산관리 역량을 대폭 강화했다.
고유브랜드 내세워 PB영업 확장
VVIP 자산관리가 증권사의 새로운 금맥(金脈)으로 부상하고 있다. 주요 증권사들은 그동안 ‘PB’로 통칭돼 온 이 시장에 자사 고유 브랜드를 내세워 고액자산가 유치 경쟁에 나섰다.
이 같은 증권사들의 움직임은 자산관리 시장 환경 변화에 따른 자구책으로 볼 수 있다. 삼성증권에 따르면 국내 상위 7개 증권사의 영업수익에서 브로커리지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75.6%에서 지난해 45.2%까지 떨어졌다. 온라인 주식거래 등의 활성화 추세에 비춰볼 때 브로커리지 수입은 앞으로도 계속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국내 고액자산 시장은 급속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1분기 현재 은행에 5억원 이상을 예치한 고객은 6만6000명에 이른다. 이들의 은행예탁 자산은 약 284조원으로 1인당 43억원 꼴이다. 은행 저축성예금에서 5억원 이상 예탁고객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2년 41.2%에서 지난해 1분기에는 59.6%까지 확대됐다.
PB영업은 상대적으로 높은 수수료와 거액자산의 장기거래라는 특성에 힘입어 안정적인 수익원 확보가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손미지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국내 고액자산 시장이 급팽창하는 가운데 국내 증권사들의 영업 전략이 수수료 및 상품 중심에서 보수 중심, 자문 중심으로 옮겨가는 양상”이라고 분석했다.
최근 우리투자증권이 한국메릴린치증권의 PB 사업부문 인수에 나선 것은 이 시장에 대한 업계의 관심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메릴린치증권은 전 세계 PB시장에서 UBS, CSFB에 이어 3위를 차지하는 회사로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PB시장에 진출했다. 국내 증권사들의 PB센터 설립 초기에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이곳이다.
우리투자증권 프리미어블루 강남파이낸스센터점.
서울파이낸스센터에 위치한 한국메릴린치증권 PB센터는 10여 명의 전문PB가 고객을 관리하고 있으며 자산규모는 우리투자증권의 강남 PB센터인 ‘프리미어 블루’와 비슷한 1조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토대로 다양한 해외상품 포트폴리오 제공이 이곳의 장점으로 꼽힌다.
우리투자증권이 이번 인수에 성공한다면 자산이 약 2조원으로 늘어나 삼성증권이 독주하고 있는 증권사 PB시장에서 확실한 2위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PB산업 주도권 은행에서 증권으로
국내에 PB의 개념이 도입된 것은 불과 10년 남짓한 일이다. 그동안 국내 PB산업의 주도권을 쥔 것은 개인 고객 점유 비중이 높은 은행권이었다. 그러나 자산관리 서비스라는 PB 본연의 역할보다 거액예금 고객에 대한 부대서비스 정도로 인식돼온 것이 저간의 사정이다.
PB산업 개념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지나면서다. 한국의 경우 대부분의 부유층이 부동산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금융위기 이후 자산버블이 붕괴되면서 더 이상 부동산만으로는 자산을 불리기 어려워졌다. 부유층의 재테크 주제가 부동산 일변도에서 주식, 원자재, 각종 파생상품 등으로 확장된 것이다.
개인 발품이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서도 핵심 정보 접근이 가능했던 부동산과 달리 금융상품은 전문가의 조언이 필수적이다. 박경희 삼성증권 SNI 강남파이낸스센터 지점장은 “과거 부자들은 정기예금 금리 정도만 알아도 됐지만 지금은 금융상품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부의 확대재생산이 어렵다”며 “PB사업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금융자산관리 컨설팅”이라고 말했다.
PB의 역할은 크게 핵심 서비스와 부가 서비스로 구분된다. 핵심은 금융자산관리 컨설팅이고 부가로 세금, 부동산, 상속, 증여 등 개인 재무상황 전반에 대한 포괄적 서비스를 포함한다. 한때 PB서비스의 간판처럼 여겨졌던 여행이나 자녀교육, 취미생활 등 라이프 케어와 관련한 서비스는 실은 ‘양념’ 정도에 불과하다.
송인찬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최근 PB에 대한 고액자산가들의 요구는 부가 서비스에서 핵심인 금융자산관리 서비스로 이동하고 있다”며 “PB의 주무대가 은행에서 증권사 쪽으로 이동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자체적으로 다양한 금융상품과 리서치센터 등 지원조직을 갖춘 증권사가 핵심 금융서비스 역량에서 은행보다 비교우위에 있다고 보고 있다.
과거에는 고액자산 고객이 선택할 수 있는 간접투자상품이 일부 사모펀드를 제외하면 공모펀드나 채권 등으로 한정돼 있었다. 최근엔 다양한 상품 라인업이 갖춰지면서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해졌다. 더욱 직접적인 조언과 빠른 포트폴리오 대응이 가능하다면 더 많은 수수료를 지불하겠다는 고객층이 두터워진 것이다. 이것이 현상적으로 나타난 것이 자문형랩 돌풍이다.
펀드의 경우 증권사는 높은 수익률을 보이는 운용사 펀드를 단순 판매하는 역할에 그친다. 많은 리테일 고객을 확보한 은행에 증권사가 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러나 개인단위 자문을 특징으로 하는 자문형랩은 PB의 조언이 절대적이다. 단순 채널 역할을 넘어 증권사가 주도적으로 자산을 시장에 할당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삼성증권 강남파이낸스센터점의 경우 전체 고객자산을 100으로 봤을 때 주식 투자금액이 약 45%로 가장 많다. 이 중 랩어카운트 비중이 20%로 가장 많고 펀드 15%, 직접종목투자 10% 순이다. 나머지는 채권 25%, ELS 등 대안투자 20%, 예금 등 현금성 자산이 10% 정도다. 펀드에는 헤지펀드를 비롯한 사모펀드가 상당금액 포함돼 있다.
우리투자증권 프리미어블루 관계자는 “3월 한 달간 판매 순위를 보면 랩어카운트가 가장 많고 ELS, 헤지펀드 등이 뒤를 잇는다”고 말했다.
자산관리 핵심역량에 집중
삼성증권 SNI 강남파이낸스센터점.
증권사 PB산업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곳은 삼성증권이다. 삼성증권은 지난달 SNI 서울파이낸스센터점을 오픈했다. 예탁자산 30억원 이상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SNI지점으로는 강남파이낸스센터, 호텔신라, 코엑스 인터콘티넨털 지점에 이어 4번째 개점이다. 기존 3개 SNI 지점의 자산규모만 4조6000억원으로 다른 경쟁사들을 압도하는 수준이다.
삼성증권의 PB사업을 총괄하는 이재경 상무(UHNW사업부장)는 “자산관리의 중요성이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더욱 부각됐다”며 “곁다리가 아니라 본질에 주목한 것이 현재 경쟁력의 바탕”이라고 말했다. 은행권을 비롯한 PB경쟁 업체들이 종합건강검진, 자녀교육 등 부가 서비스를 내세울 때 PB본연의 역할인 투자컨설팅 역량을 강화한 것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자문형랩의 경우 사실상 삼성증권이 주도해 개척한 시장으로 거론된다. 이 상무는 “개인단위의 차별화된 자산관리를 바라는 거액자산가들의 욕구를 반영한 것이 자문형랩”이라고 말했다. 이 상무에 따르면 은행과 증권사의 PB서비스 차이는 인프라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삼성증권의 경우 리서치, 투자정보 등 PB 관련 지원인력만 수백 명에 달한다. 이 상무는 “리서치 조직이 없다는 것은 PB영업에선 치명적이다. 자체 의견이 아니라 시장에 흘러 다니는 정보를 가공하는 수준으로는 시장 대응 속도나 색깔에서 경쟁력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핵심에 집중한다고 해서 부가 서비스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 삼성증권 SNI지점에는 가업승계 업무만 전담하는 직원이 따로 배치돼 있다. 2세에게 가업을 물려줄 시점 및 방법을 컨설팅하는 것이 주업무로 회계사 자격증에 풍부한 기업회계감사 경력을 지닌 직원들이다. 심지어 기부전담 컨설턴트도 있다. 이 상무는 “고액자산가 중에는 사회공헌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며 “관련 전문가가 재단법인 설립과 관련한 실질적인 노하우를 제공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증권사들의 공격적 행보에 지난 10년간 PB산업을 주도했던 은행권이 아연 긴장하는 분위기다. 최근 개점한 삼성증권 SNI 서울파이낸스센터 지점에는 주요 은행에서 활약하던 스타 PB 7~8명이 옮겨갔다. 증권사는 상대적으로 높은 연봉에 성과급 체제, 리서치센터 등 PB활동을 뒷받침하는 지원 조직을 내세워 은행 PB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에 따라 국민은행은 올해 PB 인력 양성에 지난해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예산을 배정했고 성과급 체제 도입을 검토 중이다. 또 올해 30억원 이상 초고액 자산가를 대상으로 하는 ‘대형 PB센터’를 오픈할 계획이다.
기업은행은 기업형 PB로 차별화하고 있다. 4월7일 중소기업이 밀집해 있는 시화공단과 경남 창원에 중소기업 최고경영자를 주요 고객으로 하는 ‘기업형 PB센터’를 오픈했다. 기업형 PB센터는 개인자산과 기업자금 관리는 물론, 전문 세무사도 배치해 가업승계, 세무 상담 등의 서비스도 제공한다.
우리은행은 지방 고액자산가를 겨냥해 올해 부산, 대구, 대전 지역에 PB센터를 각각 오픈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