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계획도시 정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지난 4월 27일부터 본격 시행되기 시작했다. 특별법이 시행되며 분당·일산 등 1기 신도시를 비롯한 노후계획도시 거주민들의 정비사업 추진 열기도 뜨거워지는 모양새다.
이런 가운데 국토교통부가 발주해 진행한 연구용역에서 1기 신도시를 재건축할 때 특별법상 완화된 건축 규제를 따르면 현재 15~20층인 아파트를 평균 35층 안팎까지 올릴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와 주목된다.
국토교통부가 발주해 한아도시연구소가 진행한 ‘주거단지 고밀개발 영향 분석 및 개선방안 연구’에 따르면 평균 20층 내외(용적률 190~200%)인 단지들이 특별법상 건축규제 완화를 적용받으면 평균 35층 안팎(용적률 360%)까지 높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기 신도시에서 통합재건축을 추진 중인 4개 아파트를 시뮬레이션한 결과다.
특히 이번 분석에서는 단일재건축보다 2개 이상 단지가 함께하는 통합재건축이 사업성 측면에서 낫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에 1기 신도시 재건축 추진 아파트들의 셈법이 복잡해질 것으로 보인다. 연구진은 용적률과 최고 층수, 통경축(조망을 확보할 수 있게 개방된 공간), 동 간격까지 4개 변수를 조합해 모두 24가지 경우의 수에 따른 단지 배치를 분석했다.
연구 결과를 보면 통합재건축을 추진 중인 4곳 가운데 하나인 A단지가 나 홀로 재건축을 진행할 경우 주거 환경 기준을 준수할 때 평균 29층까지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반면 용적률이 비슷한 B·C단지와 통합재건축을 추진하면 평균 33~35층으로 높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통합재건축을 진행하면 학교를 비롯한 기존 시설을 다시 배치할 수 있어 주거 환경 기준을 맞출 여러 방법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용역 연구결과는 1기 신도시를 재정비할 때 여러 단지를 묶어 실시하는 통합재건축이 ‘선택’이 아니라 사실상 ‘필수’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경기도 분당과 일산은 도시가 탄생할 때부터 일조와 통경축 같은 생활 여건과 도로·학교를 비롯한 기반시설까지 거주인구 용량에 철저히 맞춰 설계됐다. 현재 상태에서 건물 높이만 단순히 올릴 경우 모든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1기 신도시 재정비는 주거 여건을 유지하면서 사업성은 높여야 하는 ‘고차원 방정식’을 정부와 주민 모두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1기 신도시 5곳(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의 용적률은 184~226%로 평균 20층 안팎이다. 현재의 재건축 기준을 적용하면 재정비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유로 정부는 노후계획도시 특별법을 만들 때 법적 상한 용적률을 450%(평균 40~45층)까지 높여 사업성을 보완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경우 1기 신도시 장점으로 꼽히는 주거 쾌적성을 훼손할 위험이 있어 현장에서는 개발 기준이 법보다는 낮게 적용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실제로 연구결과에 따르면 건물 위치가 고정된 상태에서 용적률이 100% 늘어날 경우 평균 일조 시간은 56분 줄어드는 경향이 나타났다. 재건축으로 건물 평균 높이를 1개층 올릴 때마다 평균 일조량은 5분가량 줄어드는 셈이다. 층수를 10층 높일 때 일조 시간이 연속 2시간도 안 되는 가구 비율도 18.6%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의 다른 부분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국내에서 평균 80층(용적률 805%)으로 지어진 A아파트 단지의 경우 평균 일조 시간은 1시간 13분에 그치고, 연속 일조 시간이 2시간 미만인 가구 비율은 전체의 47.97%에 달했다. 평균 60층(용적률 599%)짜리 B단지의 평균 일조 시간은 1시간 52분이고, 연속 일조 시간이 2시간 미만인 가구 비율은 전체의 44.38%인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아파트 고밀화는 필연적으로 주거 환경의 질과 상충하기 때문에 둘 사이 균형적 접근이 요구된다”고 밝혔다. 이러한 이유로 노후계획도시 특별법을 통해 건축 규제를 완화해도 현재 15~20층 안팎인 1기 신도시 아파트들은 평균 35층 안팎으로만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때 사업성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고밀 개발 문제를 해결하려면 개별 단지 재건축보다는 통합재건축이 유리하다는 게 연구진 분석이다. 학교나 도로 재배치를 통해 주거 쾌적성을 일정 부분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보고서에 예시된 통합재건축 추진 4개 아파트 단지(1개 동 20층) 중 1곳이 단독 재건축할 경우 약 29층(용적률 298%)까지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반면 2개 단지가 통합재건축을 진행할 경우 평균 33~35층(용적률 330~360%)까지 올릴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파트 일조량을 최대한 높이는 방향으로 학교 위치를 옮기고, 주동과 단지 사이 도로 배치를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효성 한아도시연구소 소장은 “재건축을 통해 층수가 급격히 올라갈 때 주거 환경이 얼마나 악화하는지 구체적 수치가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주민들이 재건축을 선택할 때 이런 상충 관계를 구체적으로 고민한 후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일조량을 비롯한 주거 환경 외에 교통·환경영향평가 같은 1기 신도시기반시설과 관련된 문제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국토부 관계자는 “단독보다 통합재건축을 진행할 경우 도로 폭을 넓히고 구간 변경도 가능해, 늘어나는 가구 수에 따른 교통 체증을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1기 신도시를 재정비할 때 단지별 재건축 계획을 정밀하게 사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통합재건축 적정 규모와 도로를 비롯한 기반시설 조정 여부를 완벽한 ‘새판’ 위에 두고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통합재건축은 사업성 측면에서 장점이 있지만 규모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유의미한 효과 차이를 내지 못한다. 주민 의견 불일치를 포함한 위험 요소도 많다. 이번 연구 보고서에서도 단독재건축과 통합재건축 사이에 뚜렷한 사업성 차이가 있지만 통합 규모와 사업성 사이 연관성은 나오지 않았다. 국토부 관계자는 “용역 결과를 기본 방침 수립에 적극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특별법이 시행되며 1기 신도시에서도 재건축이 우선 추진될 ‘선도지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선도지구는 노후계획도시 내에서 정비사업의 모범이 되는 단지로 선정될 경우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가장 먼저 재건축이 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가격 상승을 주도할 수 있어 선도지구 지정과 관련한 주민들의 관심이 높다. 국토부는 선도지구 선정의 구체적 규모와 기준을 5월 중 공개할 방침이다. 각 신도시별로 총 정비대상 물량의 약 5~10% 수준에서 선도지구를 지정할 계획이다. 1기 신도시 전체 정비 물량이 27만 가구인 점을 고려할 때 2만~3만 가구가 선도지구로 지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분당은 최대 1만 가구, 일산은 최대 6000가구, 중동·산본·평촌은 최대 4000가구 안팎이다.
선도지구 선정엔 ‘주민 동의율’이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최병길 국토부 도시정비기획준비단장은 “동의율이 높을수록 배점을 더 많이 받도록 기준을 설계하고, 이외에도 세대당 주차장 대수, 소방시설 등을 감안해 최대한 정량적으로 평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주민 참여도가 선도지구 지정에 중요 평가 기준으로 지목되며 주민들은 사전 동의와 재건축 설명회를 열고 있다. 주민 사전 동의율 75%를 확보한 분당 양지마을은 4월 6일 신탁사를 초청해 재건축 설명회를 진행했다. 양지마을에선 금호 1, 청구 2, 금호 3, 한양 1·2단지 등 4392가구가 모여 통합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다.
분당 최초로 주민 사전 동의율 75%를 달성한 성남시 분당 정자일로 아파트(정자동 임광보성, 금곡동 서광 영남·계룡·유천화인·한라) 통합재건축 추진준비위원회도 설명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고양시는 재건축을 위해 지방자치단체가 나서 강촌마을 1·2단지와 백마마을 1·2단지 등을 사전 컨설팅 단지로 선정했다.
선도지구는 연말에 최종 지정될 전망인데 단지들 간 경쟁이 치열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최 단장은 “매년 정비 대상 단지 2만~3만 가구를 지정할 계획”이라며 “15년 내에 1기 신도시 정비 대상 단지들이 모두 착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노후계획도시정비특별위원회도 출범한다. 특별위원회는 기본방침 수립·변경, 국토부 장관이 승인하는 기본 계획과 국가 지원사항 및 위원장 상정 안건 등을 심의하는 법정 기구다. 국토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정부위원 13명과 민간위원 16명 등 총 30명으로 구성돼 오는 27일부터 2년 임기를 시작한다.
특별법 시행에 맞춰 노후계획도시정비지원기구도 지정한다. 지원기구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주택도시보증공사(HUG), 한국국토정보공사(LX) 등 7곳이다.
LH는 각 지자체가 수립하는 이주대책 등을 지원한다. HUG는 12조원 규모의 미래도시펀드, 공공기여금 유동화 등 금융지원방안과 구체적 실행방안을 마련한다. LX는 노후계획도시 정비사업 전·후를 디지털트윈 기반으로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도록 플랫폼을 구축한다.
노후계획도시의 원활한 정비를 위해 맞춤형 보증상품과 리츠(REITs)가 도입될 전망이다.
4월 18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HUG는 최근 ‘노후계획도시 정비 금융지원방안’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노후계획도시특별법이 4월 27일부터 시행되지만, 최근 부동산금융(PF·프로젝트 파이낸싱) 시장 경색으로 자금 조달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서 대규모 정비사업이 추진될 경우 PF 시장 부담이 가중될 우려가 높기 때문이다. 이에 HUG는 연구 용역을 통해 펀드·유동화·보증 등 금융기법을 활용한 노후계획도시 정비사업 금융지원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이번 용역을 진행하기로 했다.
용역에서는 정부가 약 12조원 규모로 조성하기로 한 ‘미래도시펀드’의 조성 및 운용방안이 담길 예정이다. 미래도시펀드는 연기금, 주택도시기금, 금융기관 등에서 출자 및 투자받아 조성되는 펀드로 특별정비구역 별 자펀드 출자를 통해 각 정비사업장에 지원된다. 연구용역에서는 1기 신도시 정비사업을 위한 자금 소요를 분석하고, 적정한 요구 수익률과 발생 가능한 제반 리스크까지 함께 분석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재건축 단지가 내는 공공기여금을 유동화하기 위한 방안도 모색한다. 이를 위해 지자체별 공공기여 규모를 추산하고 이를 유동화 해 판매하는 방안까지 연구한다는방침이다.
향후 노후계획도시 정비를 위한 전용 ‘보증상품’도 출시될 전망이다. 초기사업비, 본사업비, 이주비, 분담금 등 정비 단계별 보증상품 유형을 세분화하고, 보증 대상과 한도도 용역을 통해 구체화될 예정이다.
HUG는 이와 더불어 노후계획도시정비사업에 리츠를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할 방침이다. 리츠는 다수 투자자에게 자금을 모아 부동산 또는 부동산 관련 증권에 투자하고 수익을 배분하는 간접투자 방식이다. 공공지원민간임대에 활용되는 ‘매입형’ 리츠와 국공유지 등에 복합업무시설을 건설할 때 활용되는 ‘건설형’ 리츠가 노후계획도시에도 적용 가능할지를 검토한다.
[김유신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5호 (2024년 6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