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를 막론하고 어떤 사업 비용이나 규모가 천문학적인 수준에 이르면 ‘단군 이래 최대의’라는 표현을 쓴다. 올해 초 일반분양을 마친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 사업(올림픽파크포레온)에 ‘단군 이래 최대의 재건축’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이 대표적 사례다.
재개발 사업 중에서는 서울 용산구의 ‘한남뉴타운’에 ‘단군 이래 최대의 재개발’이라는 표현이 흔히 쓰인다. 2000년대 초반 뉴타운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한남뉴타운은 20년가량 지난 지금 느린 사업속도와 무관하게 여전히 최대 규모 재개발 사업으로 꼽힌다.
한남뉴타운은 서울 용산구 한남·보광·이태원·동빙고동 일대 약 111만㎡를 재개발하는 사업이다. 2003년 뉴타운으로 지정됐고, 5개 구역 가운데 해제된 1구역을 제외한 4개 구역에서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고있다.
한남뉴타운이 새롭게 주목을 받는 것은 한남3구역과 관련된 최근 법원 판결 때문이다. 한남3구역은 용산구 한남동 686 일원에 아파트 5816가구를 공급하는 사업이다. 이 가운데 임대주택은 876가구에 달한다. 총 사업비만 8조3000억원에 달해 뉴타운 지정 초기부터 지금까지 가장 큰 관심을 받았다.
오랜 기간 속도를 내지 못한 재개발 사업은 2021년 조합 신규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탄력이 붙었다. 인근의 한 공인중개사는 “재개발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60대였던 주민들이 이제는 80대 어르신이 됐다”고 말했다. 신규 조합은 지난해 7월 임시총회를 열고 관리처분계획안을 의결했다. 정비업계에서는 한남3구역에 노후 주택이 즐비한 만큼 용산구의 관리처분인가도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 과정에서 상가 신청 조합원 11명의 반발이 사업 진행 변수로 떠올랐다. 이들은 지난해 9월 근린생활시설과 판매시설 분양가 차이에 문제가 있다며 총회 의결 효력을 중단하도록 하는 가처분과 총회 관리처분 계획안이 잘못됐다는 본안 소송을 제기했다.
분양 신청 당시 한남3구역은 ‘상가’를 근린생활시설과 판매시설로 나눠서 안내했다. 동일한 1층의 경우 1㎡당 근린시설 추정 분양가와 판매시설 추정 분양가는 각각 1754만5180원, 963만3289원 수준으로 책정됐다. 이들 상가 조합원들은 ‘근린생활시설이 분양가는 더 비싸지만 입지는 판매시설이 더 낫다’는 판단과 함께 자신들이 근린생활시설을 배정받아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분양 신청 당시 안내는 근린생활시설과 판매시설로 나뉘어 진행됐지만, 신청 가능한 옵션은 별도로 제공되지 않아 선택권이 사라졌다는 판단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는 심리 끝에 지난 2월 상가 조합원 주장 가운데 판매시설·근린생활시설 관련 부분을 받아들였다. 당시 재판부는 “관리처분계획 중 근린생활시설과 판매시설 부분 결의엔 추정 분양가 산정의 형평성을 결여한 중대하고도 명백한 하자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가처분 신청이 인용되면서 한남3구역 재개발 사업은 사실상 멈춰 섰다. 가처분이 인용되면 본안 소송 결과 전까지 사업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비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빠른 사업속도다. 이 같은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한남3구역 조합은 법무법인을 추가로 선임해 가처분 이의를 제기했다.
이의 사건에서 조합 측은 근린생활시설과 판매시설의 추정 분양가 차이 발생 이유에 대해 적극 해명했다. 전용면적을 고려하면 근린생활시설의 분양가가 더욱 높을 수밖에 없고, 두 곳 이상의 기관이 감정 평가에 참여한 만큼 공정성에도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법정 증인으로 출석한 감정평가법인 관계자는 “가치형성요인인 전용률을 고려해 평가했고, 입지가 좋은 판매시설의 전용면적당 단가가 높게 산출됐다”고 밝혔다.
법원은 “채권자(상가 조합)의 주장과 제출된 자료만으로는 현 단계에서 근린생활시설·판매시설 부분의 결의 효력을 정지할 정도로 그 필요성이 충분히 소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하며 조합 측의 이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감정평가 과정에 대해서도 법원은 “감정평가기관의 평가 결과와 근린생활·판매시설의 가치 평가 과정에서 고려되는 여러 요인들을 종합하면, 상가 조합원들의 주장은 총회 결의를 정지할 정도로 소명되지 않았다”며 위법한 요소가 없다고 판단했다.
가처분 이의 심리 과정에서 조합 측 주장이 대부분 받아들여지면서 조합 측은 이주를 앞두고 큰 고비를 넘었다는 평가다. 관리처분인가를 앞두고 멈춰 선 사업이 다시 진행될 수 있게 됐고, 용산구가 관리처분인가를 마무리하면 올해 가을부터 이주가 시작될 전망이다.
남은 변수로는 가처분과 별개로 진행 중인 본안 소송이 꼽힌다. 다만 이에 대해서도 조합 측이 우세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가처분 기각은 사업을 멈출 만큼 명확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라며 “이 같은 결과가 본안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합이 2차 변론을 준비하는 가운데 이르면 10월 선고 기일이 잡힐 것으로 예상된다.
사업속도가 다른 구역에 비해 빠르다는 점도 3구역 주목도를 높이는 요인이다. 2·4·5구역의 경우 아직 건축심의·사업시행인가 등을 준비 중이다.
이주 이후 철거 및 공사에 5년가량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동산 업계에서는 3구역 사업이 예정대로 추진돼도 빨라야 2030년 무렵부터 입주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구역은 이보다 더 늦춰질 가능성이 높다.
사업에는 탄력이 붙었지만 전문가들은 투자에 대해서는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부동산 관련 규제가 대폭 완화됐지만 한남뉴타운이 위치한 용산구는 현재 투기과열 지구로 지정돼 있다. 투기과열지구는 관리처분인가 이후 조합원 지위 양도가 입주 후 등기 완료 시까지 금지된다. 관리처분인가 이후 조합원 주택을 매수하면 입주권을 받지 못하고 현금청산자가 된다.
즉 입주를 목적으로 한남3구역을 매입하려는 투자자는 관리처분인가 전까지 잔금을 납부하고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마무리해야 한다. 용산구 관리처분인가가 가까워졌다는 분석이 나오는 만큼 투자는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관리처분인가 이전 매매를 마무리하려는 급매물이 나오면서 프리미엄도 한풀 꺾인 모양새다. 인근 공인중개사에 따르면 전용면적 59㎡ 입주권을 받을 수 있는 매물의 경우 매매가격에서 권리가액을 뺀 프리미엄이 6억~7억원 수준까지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매물 프리미엄은 과거 12억원까지 치솟은 바 있다.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관리처분인가 이후에도 10년 이상 보유·5년 이상 실거주한 소유주의 매물은 거래할 수 있지만 소수에 불과해 프리미엄이 다시 붙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가격만 놓고 보면 요즘이 투자 적기일 수 있지만 현금청산 가능성에 대해서는 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지난해 말 시공사 선정을 마친 한남2구역도 한남뉴타운 가운데 사업속도가 비교적 빠르다는 평가다.
한남2구역은 지난해 11월 대우건설과 롯데건설 간 치열한 수주전이 펼쳐지며 주목을 받았다. 당시 대우건설이 시공사로 선정되면서 공사비 7900억원 규모 정비 사업 수주전에서 승리했다.
당시 대우건설은 ‘118프로젝트’를 승부수로 내걸었다. 한남2구역은 남산 경관 보호 때문에 90m 고도제한이 적용된다. 대우건설은 착공까지 남은 기간 동안 서울시를 설득해 아파트 높이를 최고 118m까지 올리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렇게 되면 한남2구역 최고 층수는 기존 14층에서 21층으로 상향된다.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서울시가 높이 규제 완화를 검토하는 만큼 대우 건설이나 조합도 가능성이 있다고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재 한남2구역은 이 같은‘높이 규제’가 재개발 사업의 변수로 꼽히고 있다. 고도제한 완화를 위한 설계 변경이 속도를 내지 못하면서 일부 조합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부동산 경기 침체 탓에 시공사 변경을 검토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도 조합에는 부담이다. 시공사 변경에 나서면 사업속도가 그만큼 더뎌지기 때문이다. 한 정비업계 관계자는 “정비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사업속도”라며 “조합도 고민이 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부동산업계에서는 고도제한 완화 가능성에 대한 예측이 엇갈린다. 건축물 높이제한 완화에 적극적인 서울시 역시 고도제한을 요구하는 서울 여러 지역 시민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일이 쉽지 않다. 반면 고도제한을 완화하면 특정 지역에 대한 특혜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이 부담이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서울시는 조만간 고도지구 재정비 계획안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남5구역은 한남뉴타운에서도 한강조망권이 가장 넓어 대부분 가구가 ‘한강뷰’를 누릴 것으로 보인다. 건축심의를 앞둔 한남5구역은 건축심의가 통과되는 대로 시공사 선정에 돌입한다는 계획이다.
시공사 선정은 사업시행인가 이후부터 가능하다. 그러나 서울시가 올해 7월부터 사업시행인가 전에도 시공사 선정을 할 수 있도록 ‘도시 및 주거 환경정비조례’를 개정하면서 건축심의 통과 이후 시공사 선정을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되면 사업 기간과 비용이 줄어들면서 분담금 역시 낮아질 전망이다.
한남5구역 역시 2구역과 마찬가지로 고도제한 완화에 따른 최고 층수 상향 조정을 기대하고 있다. 조합은 2026년 관리처분인가를 목표로 사업을 진행 중이다.
한남뉴타운 ‘마지막 퍼즐’로 꼽히는 4구역은 지난해 11월 재정비촉진계획 변경 심의를 통과하면서 사업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4구역은 그동안 구역 내 위치한 신동아아파트 이슈가 재개발 사업의 가장 큰 변수로 꼽혔다. 1992년 준공된 이 단지는 ‘재건축은 아직 이르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서울시와 조합은 그동안 각각 리모델링, 철거를 제안했다.
이번 변경 심의에서 전면 재개발로 결정이 되면서 주민들 사이에서는 “모든 숙제가 풀렸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4구역은 조합원이 1166명으로 한남2구역(908명) 다음으로 적어 사업성이 높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반분양 물량을 많이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상가 소유주와의 협의는 여전히 변수로 꼽힌다.
매일경제 부동산부 정석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