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시장은 일명 ‘전기 먹는 하마’로 알려진 AI 데이터센터발 수요 폭증과 노후 전력망 교체 주기가 맞물려 역대 최대 규모의 사이클을 이어가고 있다. IEA(국제에너지기구)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데이터센터 전력소비량은 2022년 대비 2배 이상 증가한 1000TWh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수요가 급증했지만 공급 및 전력망은 이를 못 따라가 ‘병목현상’이 글로벌 전력 시장에서 재현되고 있다. 전력망의 핵심인 변압기는 북미 기준 대형 변압기의 약 70%가 기대수명(25년)을 초과한 노후시설이어서 교체가 필요하다. 그러나 전력기기 제조사들의 생산 능력은 제한되어 있어 공급부족이 장기화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변압기를 받기까지의 리드타임은 과거 1년 전후 수준에서 작년 하반기 기준 최대 3~4년(150~200주)까지 늘어났다. 수급 문제로 가격은 치솟고 있다. 북미 기준 변압기 생산자물가지수(PPI)는 5년 만에 약 80% 상승했다.
북미 시장에서 기존 강자 이튼(Eton)과 같은 업체 외에 한국 기업의 점유율도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다. 글로벌 경쟁사 대비 납기 준수 능력과 품질 경쟁력이 우수하다는 장점을 바탕으로 수주가 이어지고 있다. 작년 하반기부터 국내 기업들의 북미향 고전압(765kV) 변압기 수주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북미 전력 시장의 투자 트렌드가 바뀌었다는 신호라고 볼 수 있다. 주요 기업들 수주 잔고는 이미 2028~2029년 물량까지 확보된 상태다. 국내 변압기 주요 기업들의 전력사업 영업이익률은 작년엔 20% 대까지 올라갔다.
매출과 수익성 모두 상승 구간이나 공급부족 현상이 장기간 진행된 만큼 공급 증가로 인한 피크아웃 우려도 지속되고 있다. 변압기 PPI 변동이나 글로벌 경쟁사 증설 등에 따라 단기간 밸류에이션 조정 가능성은 있다. 다만 전력기기 산업 특성상 생산 설비 투자와 인력을 갖추는 데 시일이 소요되어 최소 올해 말까지는 공급부족 현상이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더해 북미 시장에서 고전압 변압기 수요가 늘어나고 있고 국내 AI발 전력 인프라 병목, AI 데이터센터 건설로 인한 전력 수요 증가분이 공급 증가분을 압도하며 전력 공급 쇼티지는 갈수록 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AI 데이터센터 건설은 18~24개월 소요되는 반면, 전력 인프라 확충은 최소 몇 년간 시일이 걸리는 사업이기에 구조적 병목 발생이 불가피한 것이다.
전력 공급 병목을 뚫는 AI전력 밸류체인는 크게 세 축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AI 데이터센터·핵심 인프라, 두 번째는 파워그리드와 전력 인프라, 세 번째는 전력 변환과 ESS다. AI 데이터센터·핵심 인프라는 전력 공급 병목을 뚫는 ‘CPO’로 광통신 기업 ‘루멘텀’과 전력효율 개선의 핵심인 냉각 시스템 기업 ‘버티브 홀딩스’가 대표적이다.
파워그리드와 전력 인프라는 안정적인 기저 발전원의 역할을 하는 ‘천연가스’로 원자력 기업 ‘GE버노바’와, 노후 전력망 교체 및 신규 송배전망구축 기업 ‘콴타 서비시스’ 등을 들 수 있다.
전력 변환·ESS는 온사이트 발전으로 ESS 기업 ‘블룸에너지’가 대표적이다.
이안나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단순한 전력 총량 부족이 아니라, 전력의 전달 방식, 랙 밀도, 냉각 구조, 메모리 이동, 네트워크 전력, 전력 품질, 운영 소프트웨어가 동시에 병목화되는 시스템 문제”라며 “AI 데이터센터는 더 이상 ‘서버가 많이 들어간 건물’이 아니라, ‘전기·열·통신·메모리·소프트웨어가 하나의 폐루프를 이루는 거대한 공학 시스템’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AI DC 건설에 ‘전력 용량 확보(인프라 포함)’가 최우선 과제였다면, 이제부터는 들어온 전기가 GPU와 토큰까지 가는 과정에서 얼마나 손실이 적고, 얼마나 높은 수익성을 가져오느냐 즉, ‘그리드투토큰(grid-to-token) 효율 전쟁’이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이퍼스케일러들이 직접 자본을 투입해 전력을 공급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유틸리티 기업 엔터지(Entergy)가 메타의 ‘하이페리온’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추진 중인 5.2GW 규모의 발전소 건설 프로젝트 비용을 메타가 직접 부담하는 계약이 최근 발표됐다. 정부 차원의 규제 완화 기조 속 전력 공급 속도를 높이기 위해 전력 수요자가 직접 자본을 투입하는 ‘BYOG’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전력 인프라주들은 변동성이 높은 측면이 있다. 특히 지정학 불확실성과 시장 변동성이 높은 국면에서는 장기 성장 스토리만으로는 부족하며, 실제 수주·매출화 확인과 장기 구조 성장을 갖춘 종목들이 프리미엄을 받게 된다.
AI 데이터센터 투자는 구조적으로 장기 성장 산업이고 전력·열·저장·소프트웨어 전반에서 기술 방향성은 비교적 명확해졌고, 주가 역시 대부분 실적이 재무제표에 찍히기 전에 기대를 반영해서 오른 측면이 있다.
실제로 원전주는 작년 정책 변화와 체코 두코바니 수주, 미국 원전 확대 기대를 선반영하며 강하게 상승했다. 올해도 그 기대가 일부 프로젝트와 공급망에서 실제 숫자로 전환되기 시작하고 있다.
문제는 인플레이션 우려로 금리 인하 사이클이 주춤한 현재 경제 환경이다. 지정학 리스크와 변동성 확대 국면에서는 막연히 산업의 방향성만으론 주가를 지속하는 동력이 약하다. 따라서 지금은 단순히 장기 성장 산업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1) 이미 기대를 반영했더라도 향후 1~4개분기 내 수주·발주·매출로 확인될 수 있는 섹터, 2) 단기 숫자는 아직 제한적이어도 구조적 채택률 상승과 플랫폼 락인이 남아 있는 섹터를 동시에 보는 접근이 더 적절한 것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실적 가시성을 기대할 수 있는 섹터는 원전/전력기기/냉각/전기전자/2차전지 섹터라고 할 수 있고, ‘장기 구조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섹터는 추론 소프트웨어·플랫폼 섹터다.
이미 올해 1분기 전력기기 업종들은 ‘어닝 서프라이즈’를 내면서 견조한 수주와 성장 가능성을 알렸다.
LS일렉트릭이 올 1분기 실적을 발표한 뒤 전력기기 관련주가 또다시 가파른 주가 상승세를 타고 있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확산에 따른 송배전 인프라스트럭처 구축 수요가 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2023년 미국 시장의 송전 사이클에 이어 작년 하반기에 배전 사이클이 시작되면서 구조적 성장세가 이익으로 확인됐다. 기존에는 발전소에서 변전소까지 전기를 수송하는 송전에서 초고압 변압기를 생산하는 한국 전력기기 업체들이 각광받았다면 지난해부터는 변전소에서 데이터센터까지 전기를 공급하는 ‘배전’이 전력기기와 전력주들의 새로운 주가 상승 모멘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국내 배전 시장점유율 1위 기업인 LS일렉트릭은 올 1분기에 전력 인프라 매출이 전년 대비 72% 늘어난 6432억원을 기록했다. 배전반과 초고압 변압기가 성장을 견인한 것이다. 손현정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배전반을 통해 확보된 고객이 변압기 및 전력기기로 확장되거나 기존 전력기기 고객이 배전반으로 확대되는 흐름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며 “일부 고객은 장기 계약 형태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아 반복 수주 구조가 나온다”고 말했다.
과거 전력 인프라는 수주나 경기에 민감한 업종이었다. 하지만 최근 계약 기간이 장기화되며 실적 기대감이 더욱 커지고 있다. 나민식 SK증권 연구원은 “빅테크 수주 구조에서 단발성 계약이 아니라 중기 고정 계약에 패키지 수주로 변화 중”이라고 평가했다.
GE버노바 주가가 급등한 건, 신규주문이 급증하면서 장기 이익 성장세가 지속될 거라는 전망 덕분이다. 1분기에 데이터센터 고객에게 변전소와 변압기를 포함한 전기장비 수주 금액이 24억 달러를 기록하면서 작년 한 해 수주 금액을 넘어섰다. 연말까지 가스 터빈 수주 잔고와 슬롯 예약 계약을 합치면 최소 110GW를 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블룸버그NEF가 2035년까지 미국에서 데이터센터가 만들 새로운 전력 수요를 106GW로 예상하고 있는 걸 감안하면, AI 인프라 수요와 함께 천연가스 발전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전력기기에 투자하는 ETF도 많이 나와 있다. 주요 한국 기업을 담느냐, 미국 기업을 담느냐로 구분할 수 있다.
RISE 미국AI전력인프라액티브는 미국 상장기업 중 AI 데이터센터 인프라, 전력망, ESS 등 전력의 생산, 전달, 효율화 관련 기업 20종목으로 구성된 지수를 비교지수로 하는 액티브 ETF다. 액티브 방식으로 정책 모멘텀과 산업 사이클에 따라 빠르게 순환하는 주도주를 적시에 투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차세대 핵심 기업에 한발 앞서 선제적으로 투자하고 탄력적으로 비중을 조정하는 액티브 운용 역량 덕분이다. 여러 산업군이 혼재된 전력인프라 밸류체인에서 필요한 운용 방식이다.
미국 AI전력 인프라 3대 밸류체인이라고 할 수 있는 AI 데이터센터&핵심 인프라, 파워그리드&전력 인프라, 전력 변환&ESS 내 핵심 기업에 액티브 전략을 활용하여 투자한다.
한국의 전력 인프라 기업에 투자하는 ETF는 HANARO 전력설비투자와 KODEX AI전력핵심설비가 있다. HANARO 전력설비투자는 순자산이 2000억대 ETF다. 상위 3종목의 비중이 60% 정도로 높다. 효성중공업, HD현대일렉트릭 등 변압기 제조사부터 LS, 대한전선를 비롯한 전선 기업과 LS일렉트릭 등 배전 소부장 기업까지 전력사업 밸류체인 전반을 포괄한다. 밸류체인별 비중은 변압기 약 50%, 전선과 배전·솔루션 합산 약 50% 수준이다. 특히 업황의 입구이자 판가 상승폭이 가장 큰 초고압 변압기 대장주에 비중 상한을 할당하여 섹터 내 주도력을 확보하고 있다. 전력 인프라 산업은 변압기 수주 이후 송전망 연결을 거쳐 데이터센터 배전 순으로 업황이전개된다. 현재 시장은 북미 노후 전력망 교체와 AI 데이터센터 수요가 맞물려 변압기 중심의 강세가 지속되면서 배전 시장 역시 확대되고 있다.
KODEX AI전력핵심설비는 순자산 규모가 4조원이며 구성 종목은 HANARO 전력설비투자와 거의 비슷하다.
RISE AI전력인프라는 상위 3종목 비중이 30% 미만으로 분산효과가 강하다. 가온전선, LS일렉트릭, 대한전선, 산일전기, LS에코에너지 등을 편입하고 있다.
[김제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