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 상황 속 개미들의 채권 사랑이 지속되고 있다. 이자 수익을 노리는 ‘이자 개미’와 채권의 자본(매매) 차익을 노리는 ‘차익 개미’로 나뉘어 시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내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에서도 채권형 상품들의 약진이 돋보인다. 채권 개미들의 투자 수요를 포착한 자산운용사들은 채권형 상품 비중을 급격히 늘리며 ‘몸집 키우기’에 나서고 있다.
채권을 통한 투자 방법은 크게 ▲이자 수익 ▲자본(매매) 차익 두 가지로 구분된다. 이자 수익의 경우 채권의 표면금리에 따른 이자 수익을 정기적으로 받는 것을 의미한다. ETF의 경우 편입한 채권 자산에서 수취한 이자 수익을 투자자들에게 분배금으로 지급한다. 그 밖에 자본 차익의 경우엔 매수 시점보다 금리가 내려 채권 가격이 오르게 되면 장외 유통 시장에서 주식처럼 처분해 수익을 실현할 수 있다.
채권의 가격은 금리와 반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고금리 상황 속 채권 가격은 크게 떨어진 상황이다. 특히 듀레이션(잔존만기)이 긴 장기채일수록 금리에 따른 가격 변동 폭이 크다. 대표적으로 미국 만기 20년 이상 장기채들의 가격은 고점 대비 40%가량 떨어진 상황이다. 때문에 고금리 이자 수익을 노리는 투자자들은 단기·중기채를, 자본 차익을 노리는 경우엔 장기채를 집중 매집하는 모습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4월 12일 기준 올해 들어 개인투자자들은 채권을 장외 시장에서 9조7862억원 순매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정보업체인 ETF체커에 따르면 국내 상장지수상품(ETP) 시장에서도 자금 유입 상위 종목 대부분이 채권형 상품인 것으로 나타났다. 파킹통장형, 만기매칭형, 종합채권형 등 다양한 유형의 채권형 상품이 고금리 환경에서 준수한 투자 수익을 기대한 투자자들로부터 선택을 받았다는 분석이다.
4월 12일 기준 최근 3개월 동안 가장 많은 돈이 몰린 곳은 TIGER CD금리투자KIS(합성) ETF로 6936억원이 몰렸다. 그 밖에 KODEX 23-12 은행채(AA+이상)액티브 및 KBSTAR 종합채권(A-이상)액티브 ETF에도 각각 6446억원, 3791억원이 유입됐다.
국내 투자자들이 올해 들어 가장 주목한 채권형 상품은 TIGER CD금리KIS(합성) ETF, KODEX KOFR금리액티브(합성) ETF로 대표되는 파킹통장형 상품이다. 파킹통장형 ETF는 매일 이자가 복리로 쌓이는 장점이 있다. 또 은행 예·적금과 달리 쉽게 현금화가 가능하다는 점이 개인투자자들에게 매력으로 작용했다. 김남호 미래에셋자산운용 글로벌ETF운용본부 팀장은 “고금리의 수혜를 받으면서도 손실이 발생하지 않는 상품”이라고 밝혔다.
ETP 시가총액 상위 종목에서도 파킹통장형 ETF는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부동의 1위인 코스피200지수의 일일수익률을 단순 추종하는 KODEX 200 ETF(4월 12일 기준 5조8031억원) 뒤로 삼성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의 파킹통장형 상품이 나란히 시가총액 2~3위를 차지하고 있다. TIGER CD금리KIS(합성) ETF, KODEX KOFR금리액티브(합성) ETF의 시가총액은 각각 4조7700억원, 3조4591억원에 달했다.
확정 수익을 제공해주는 만기매칭형 채권 ETF도 인기다. 만기매칭형 채권 ETF의 경우 만기까지 보유하면 예상한 기대 수익률 수준의 수익을 취할 수 있다. 삼성자산운용에 따르면 만기매칭형 은행채 ETF의 현재 만기 기대수익률은 연 3.7% 수준이다. 3% 초반 수준을 보이는 예금 이자 대비 기대 수익률이 높다. 은행채, 회사채, 국채 등 다양한 상품을 수요에 맞게 골라 투자할 수 있다.
최근엔 만기가 긴 장기채 상품에 대한 관심도 높다. 장기채 가격이 과거 고점 대비 30% 이상 하락한 상황이라 저가 매수세가 유입되는 것이다. 지난해 말에는 자산규모 30억원 이상 고액 자산가들을 중심으로 장기채 매수세가 붙었지만 현재는 일반 채권 개미들이 장기채 열풍을 이끌고 있다. 특히 지난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인해 미국 기준금리가 5% 수준까지 올라가면서 가격이 급락한 미국 장기채 투자 수요가 높은 상황이다. 한국 금리 대비 절대적 수준이 높고 아직 장기 금리 또한 한국보다 높기 때문이다.
특히 월 배당, 최저 수수료를 앞세운 한국투자신탁운용의 채권 현물 상품이 증시에 상장하면서 자금이 몰리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개인투자자들은 지난 3월 14일 상장한 ‘ACE 미국30년국채액티브(H)’ ETF를 수백억원 순매수했다. 개인투자자들이 주목한 건 ACE 미국30년국채액티브(H) ETF의 배당(분배금) 매력이다.
지금까지 국내 증시에 상장한 미국 장기채 ETF는 배당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현물이 아닌 채권 선물을 포트폴리오에 편입하다 보니 분배금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ACE 미국30년국채액티브(H) ETF는 최초로 국채 현물을 편입했고 연 환산 3%의 배당수익률이 기대된다. 그동안 국내의 미국 장기채 ETF 시장에서 개인투자자들이 많이 매수한 건 ‘KODEX 미국채울트라30년선물(H)’ ETF였다. 최근 1년 동안 개인투자자들의 누적 순매수액이 1000억원을 훌쩍 넘어선다.
한국투자신탁운용 상품은 낮은 수수료를 무기로 내세우고 있다. ACE 미국30년국채액티브(H) ETF의 총보수율은 0.05%로 KODEX 미국채울트라30년선물(H) ETF의 0.3% 대비 낮다. 미국의 장기채 ETF인 ‘아이셰어스 만기 20년 이상 국채(TLT)’ ETF의 4분의 1 수준이다. 기타비용을 포함한 총보수비용 비율(TER)도 0.27 정도로 낮은 편이다.
미국 증시에 투자하는 서학개미들도 미국채 비중을 늘리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 증권정보포털(세이브로)에 따르면 서학개미들은 올해 초부터 4월 12일(T+3일)까지 ‘디렉시온 데일리 20년 이상 국채(TMF)’ ETF를 2억917만달러(약 2775억원)어치 순매수했다. 해당 기간 서학개미 순매수 2위다. TMF ETF는 만기가 20년 이상인 미국 장기채의 일일수익률을 3배로 추종하는 레버리지 상품이다. 서학개미들은 같은 기간 20년 이상 미국 장기채를 단순 추종하는 ‘아이셰어스 만기 20년 이상 국채(TLT)’ ETF도 8208만달러(약 1089억원)어치 사들였다. 해당 기간 서학개미 순매수 10위다.
다만 레버리지 배율이 높을수록 주가(채권 가격)가 횡보할 때 손실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악화할 수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예를 들어 100만원을 채권 ETF에 투자했을 경우 주가가 10% 올랐다가 재차 10% 하락하면 평가금액은 99만원이 된다. 하지만 레버리지 배율이 3배일 경우 10% 상승 시 30만원의 수익금이 발생하지만 10% 하락 시 평가금액은 91만원으로 손실 폭이 더 커진다.
조준기 SK증권 연구원은 “레버리지 ETF의 문제점은 하방에 대한 방어가 전혀 이뤄지지 못한다는 것”이라며 “방향을 맞추더라도 시점을 맞추지 못한다면 짊어지는 리스크 대비 리턴이 매우 낮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채권 전성시대가 진행되면서 자산운용사들의 경영 전략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체 시장에서 주식형 상품의 순자산액은 제자리걸음이지만 채권형 상품은 1년 전보다 66% 성장했기 때문이다. 채권형 규모가 주식형의 36% 수준까지 커졌다. 압도적 시장 점유율을 보이는 삼성자산운용, 미래에셋자산운용 외 중형 운용사들은 채권형 ETF 비중을 30~40%까지 끌어올리면서 ‘몸집 키우기’에 나서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ETF 시장 규모는 3월 말 기준 89조540억원으로 1년 전(73조1065억원) 대비 21.8% 성장했다. ETF 순자산액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식형 ETF의 순자산액은 44조5029억원으로 전년 대비 0.87% 증가에 그쳤다. 반면 채권형 ETF순자산액은 1년 전 9조7657억원에서 최근 16조2596억원으로 66.5% 급증했다.
국내 ETF 시장은 3월 말 기준 삼성자산운용(37조2205억원), 미래에셋자산운용(33조5312억원)이 전체 시장의 79%를 차지하고 있으며 주식형 상품 비중이 높다. 삼성자산운용, 미래에셋자산운용의 ETF 순자산 총액에서 채권형 상품의 비중은 각각 19.8%, 8.1%에 불과하다.
두 회사 외 몸집 키우기에 나서고 있는 중형 운용사들은 최근 채권형 ETF 비중을 급격히 늘리면서 투자자 유치에 나서고 있다. 3~4위 경쟁에 나서고 있는 KB자산운용, 한국투자신탁운용의 채권형 ETF 비중은 30% 이상으로 높아졌다. KB자산운용의 경우 채권형 ETF 비중이 1년 전 29.6%에서 올해 41.6%로, 한국투자신탁운용은 15.4%에서 올해 31.2%로 늘었다. 그 외 신한자산운용(38.5%), 키움투자자산운용(38.1%), 한화자산운용(31.2%)도 높은 비중이다.
특히 한화자산운용의 경우 채권형 상품 비중 확대에 힘입어 몸집 키우기에 성공했다. 작년 ETF 시장에서 순자산총액 순위 7위에 그쳤지만 최근엔 5위까지 올라왔다. 당시 한화자산운용의 채권형 ETF 순자산액은 950억원에 불과했지만 올해엔 9000억원을 넘겼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 A씨는 “최근 안전자산에 대한 선호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초장기 국채 ETF에 대한 투자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라며 “운용사들이 앞다투어 관련 상품을 출시 중이고 개인투자자들의 매수세도 지속해서 높아지고 있다”라고 밝혔다. 또 다른 관계자 B씨는 “증권사, 운용사 모두 채권 영업, 마케팅에 공을 들이고 있는 상황”이라며 “채권 부문 실적을 내기 위해 경영진들도 신경을 쓰고 있다”라고 말했다.
업계에선 당분간 채권 상품의 전성시대가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재석 NH투자증권 연구원은 “고금리는 지속 중이지만 금리 변동성은 완화되고 있어 인컴(배당)을 활용한 투자전략을 고려해볼 만한 시기”라고 밝혔다.
차창희 매일경제 증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