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가 모든 사람의 손에 스마트폰을 쥐어줬듯이 모든 사람에게 ‘AI 에이전트(비서)’를 전달하고 싶다.”
이는 손정의(일본명 손 마사요시)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꿈꾸는 인공지능(AI) 사회의 미래 모습이다. 오픈AI와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여기에 중국의 딥시크 까지 전 세계 수많은 기업이 AI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손정의 회장은 이를 활용한 사업 모델을 제시하며 차별화를 추구하고 나섰다. 핵심 기술을 잘 활용해 여기서 수익을 내겠다는 전략이다.
일본 재계에서는 1990년대 인터넷 시대의 도래를 예언한 뒤 미국 야후와 중국 알리바바에 투자한 것, 2000년대 통신 시대를 선언하고 일본에 처음으로 스마트폰인 애플 아이폰을 도입하는 등 그가 가진 승부사 기질이 이제는 AI에서 다시 뿜어나오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손 회장이 구상하는 AI 사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Arm과 오픈AI를 중심으로 한 AI 에이전트 사업이다. 지난 2월 일본 기업을 대상으로 공개한 ‘크리스털 에이전트’가 대표적인 예다. 이는 기업에 맞춤형 ‘AI 비서’를 두는 것으로 요약된다. 기업이 가진 시스템과 회의자료, 메일 등 모든 데이터를 활용해 업무 효율화를 높이고 빠른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것이 핵심이다. 아날로그 방식이 아직도 지배하고 있는 일본 기업에 AI를 통해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다. 손 회장은 “크리스털이 있는 회사와 없는 회사는 전기가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 정도의 큰 차이가 생길 것”이라며 “AI가 기업의 모든 것을 이해한 뒤 맞춤형 의사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기업에는 큰 무기가 된다”고 설명했다.
크리스털 에이전트는 현재 오픈AI 기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서비스가 덧붙여지는 형태라 큰 규모의 투자는 필요가 없다. 소프트뱅크그룹은 자회사에 크리스털 에이전트를 도입하고 사용료로 오픈AI에 연간 4500억엔(약 4조 2000억원)을 지급할 계획이다. 이는 오픈AI가 안정적인 연구·개발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밑바탕이 될 전망이다.
AI 에이전트 보급 확산에 대비해 일본 소프트뱅크그룹은 주력 계열사에 AI 사용을 의무화하고 나섰다. 사내 AI 활용 모델과 노하우를 축적하기 위한 목적이다. 라인야후는 조만간 전 사원을 대상으로 시장 분석, 회의록 작성 등 업무에서 AI의 이용 의무화 규정을 마련할 예정이다. 통신회사인 소프트뱅크는 전 사원에게 AI 앱 개발에 의무적으로 참가하도록 할 방침이다. 또 다른 자회사인 간편결제 회사 페이페이는 AI 도입에 대비해 인사 노무 업무의 재검토에 착수했다. 다만 손 회장의 AI 도전을 불안하게 보는 분위기도 있다. 우선 상명하복식의 의사결정 구조에 익숙한 일본의 보수적인 기업문화에서 AI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다. 또 맞춤형 AI라고는 하지만 소프트뱅크의 시스템에 회사 모든 정보가 집결된다는 것에 대한 일본 기업의 불안감도 크다.
현재 일본 직장의 생성형 AI 이용률은 지난해 기준으로 32%로 추산된다. 이는 세계 평균인 75%를 밑도는 수준이다. 중국의 경우 91%, 미국도 71%에 육박한다. 손 회장은 AI를 통해 디지털에 늦은 일본 기업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AI로 모든 산업의 규칙이 ‘리셋(초기화)’되는 시대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면 기업이 AI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1945년 패전 이후 공업화에 주력해 온 일본은 기계공학과 전자공학 기술을 통해 첨단 제조업 실력을 갖췄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소프트웨어의 존재를 간과하고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에 집착하다 경쟁력을 조금씩 잃어가는 상황이다.
‘모노즈쿠리(장인정신)’로 요약되는 일본 기업의 경쟁력에 AI의 날개를 달면 다시 한번 세계 산업을 호령할 기회가 올 수 있다는 것이 손 회장의 판단이다. 손정의 회장은 지난 2016년 “인공지능(AI)이 인류역사상 최대 수준의 혁명을 불러올 것”이라며 2017년으로 예정된 은퇴를 번복하고 현역으로 남았다. 그는 2035년에는 인간 지능의 1만 배에 달하는 초인공지능(ASI)이 현실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도 10년 이내에 인간의 지성에 육박하는 고성능 만능AI인 AGI(범용 인공지능)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소프트뱅크와 오픈AI가 손을 잡은 것도 AI에 대한 두 사람의 비전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손정의 회장은 “ASI의 실현을 위해서는 9조달러 규모의 투자가 필요하다”며 “이는 세계 GDP의 5% 수준으로 ASI가 실현되면 1년 만에 회수할 수 있는 금액”이라고 말했다.
AI 에이전트와 함께 손정의 회장이 구상하는 AI 관련 사업은 AI 인프라 구축이다. 우선 시작한 것이 올해 초 미국 백악관에서 밝힌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다. 이는 5000억달러(약 678조원)를 투자해 텍사스나 애리조나 등 미국 주요 거점에 10개 이상의 데이터센터와 이를 잇는 전력망 등 기반 시설을 갖추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손 회장의 구상이 현실화하면 미국이 AI에서 남들을 크게 앞서는 경쟁력을 갖추게 될 것으로 보인다. 도로와 같은 기본 인프라가 없으면 자동차 산업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등은 AI 산업에 필수 요소로 꼽히기 때문이다. 미국 일부 언론에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핵무기 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빗대어 ‘AI 맨해튼 프로젝트’로 부르기도 한다.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는 소프트뱅크그룹과 오픈AI가 각각 40%의 지분을 갖는 주요 주주로 참여한다. 미국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 기업인 오라클과 아부다비 정부 산하 투자회사인 MGX도 각각 7%가량의 지분을 가질 것으로 알려졌다. 손정의 회장의 구상은 프로젝트 전체 필요 자금 중 10%인 500억달러만 주주들이 출자하고 나머지는 대출과 프로젝트 파이낸싱 등을 통해 충당하는 것이다. 당장 소프트뱅크그룹은 주거래은행인 일본 미즈호은행에서 100억달러를 대출받기로 해 주주 출자분 일부를 마련할 수 있게 됐다. 문제는 4500억달러에 달하는 나머지 자금의 대출 가능 여부다. 손 회장은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쪽 자금을 기대하고 있는데 최근의 중동 정세와 손 회장의 투자 실패 사례 등이 맞물리면서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분석이다.
이런 가운데 불안한 소프트뱅크그룹의 후계 구도도 스타게이트와 같은 대형 프로젝트에서는 부정적이라는 평가로 거론된다. 일단 손 회장이 지난 6월 열린 주주총회에서 “내 머릿속에 몇 명의 후보가 있고 이들이 그룹 내에서 경쟁 중”이라고 언급해 안도한 주주들이 많아진 상황이다. 시장에서는 그룹 내 이사회 구성원이나 핵심 자회사인 Arm 경영진 등을 후보군에 넣는 분위기이지만 뚜렷이 꼽히는 인물은 없다. 여기에 손정의 회장이 “더 하려는 생각도 있다”고도 언급해 후계 구도 정리가 오랜 기간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승훈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