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평론가 윤덕노의 음食經제] 가장 평범한 재료로 에너지도 얻고 숙취도 해소, 18세기 시장 발달과 함께 퍼진 조선의 패스트푸드 ‘해장국’
입력 : 2020.11.03 14:33:14
수정 : 2020.11.06 17:57:14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해장국이 발달한 우리나라다. 이런 우리 해장음식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먹으면 속이 풀리면서 숙취가 해소된다는 것이다. 외국인은 이해하기 힘든 속이 풀린다는 그 느낌, 실체가 무엇일까?
해장비법에 대한 설명은 넘쳐나도록 많지만 과학적으로 숙취의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만큼 해장의 원리 역시 설(說)만 무성할 뿐 확실하게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 전통 해장음식을 보면 나름 원칙이 있다. 먼저 콩나물국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숙취에 시달릴 때 콩나물국을 먹으며 속을 달래 본 경험이 있다. 왜 하필 콩나물국일까?
해장국으로서 콩나물국은 역사가 깊다. 처음 기록은 6세기 중국 의학서인 <신농본초경집주>에 보인다. 황권(黃券)이라는 약재가 있는데 콩에서 나온 새싹을 말린 것이라고 했으니 바로 콩나물이다. <향약구급방>을 비롯한 고려와 조선 의학서에도 똑같이 소개돼 있다. 복용법은 끓여 먹는다고 했으니 콩나물국이나 다름 없다. 이렇게 먹으면 위의 열을 내려준다고 했다. 숙취 해소를 위해 먹는 콩나물국이야말로 전통 처방에 따른 비법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콩나물국은 전국 어디서나 먹는 해장국이지만 예전에는 특히 전주 콩나물 국밥이 유명했다. 개화기 때 잡지인 ‘별건곤’ 1929년 12월호에는 서울의 설렁탕과 평양의 어복쟁반, 그리고 전주 콩나물 국밥을 서민의 3대 명물음식으로 꼽았으니 ‘명물’ 소리를 들은 역사가 만만치 않게 길다.
우거지 선짓국도 전통 해장국으로 유명했다. 그중에서도 서울의 청진동 해장국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7년부터 유명세를 탔다. 지금의 종로구청 옆에 문을 연 국밥집이 시초라는데 나무를 땔감으로 쓰던 당시 이곳에는 새벽마다 나무시장이 열렸다. 나뭇짐을 팔고 난 후 얼큰한 술국으로 출출한 속을 달랬는데, 처음에는 나무꾼들이 이용하다 경성의 한량들이 해장을 위해 찾으면서 유명해졌다.
이 무렵에는 많은 사람들이 선짓국을 별미나 또 해장음식으로 즐겨 먹었다. 1931년 10월 1일자 신문에 ‘오늘의 요리’로 선짓국 만드는 법이 보인다. 한자로 우혈탕(牛血湯)이라고 소개하며 “선지는 흔히 토장국에 먹지만 젓국에 끓이는 것이 좋다. 처음에 고기와 곱창을 넣고 후춧 가루를 쳐서 끓인 후에 두부를 번듯번듯하게 썰어 넣고 선지를 채반에 건져 피 빠진 것을 한 덩이씩 착착 처서 넣는다”고 적었다.
선지는 먼 옛날부터 인류가 먹어 온 훌륭한 영양공급원이었다. 나라와 민족마다 각각 다른 종류의 선지를 먹었는데 우리는 소 선지와 순대에 넣는 돼지 선지를 먹지만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은 말 선지, 중국은 오리 선지를 먹는다. 민족에 따라 선호하는 종류가 달랐지만 옛날 의학서에서는 선지가 혈을 보하고 해독효과가 있다고 풀이했다. 그렇기에 술의 해독을 푸는 해장국으로 인기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해장국 종류도 다양하고 아무 때나 쉽게 골라 먹을 수 있지만 옛날에는 집에서 끓일 수 있는 해장국은 몇 가지가 되지 않았는데 북엇국도 그 중 하나였다. 우리가 옛날부터 북엇국을 먹었을 것 같지만 음식의 역사로 보면 북엇국의 뿌리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한때 국민생선으로 불렸던 명태가 어느 날 갑자기 동해에서 사라진 것처럼 우리 밥상에도 어느 날, 갑자기 올랐기 때문이다. 명태 이름의 유래에서 그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함경도 명천에 사는 어부가 어느 날 낚시로 낯선 물고기를 낚아 고을 수령에게 바쳤다. 사또가 맛있게 먹은 후 생선 이름을 물었더니 아무도 이름을 알지 못하고 다만 태(太)씨 성 가진 어부가 잡았다고만 대답했다. 그러자 수령이 “명천(明川)의 태 씨가 잡았으니 명태(明太)라고 하자”고 해서 명태가 됐다는 것이다. 고종 때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예전에는 이름을 몰랐을 정도로 드물었던 생선이었고 실제로도 명태는 갑자기 한반도에 몰려왔다고 한다. 시기는 고려 말 혹은 조선 중기 이전으로 추정한다. 이후 우리 바다에서는 명태가 엄청 잡혔다.
실학자 이규경이 “명태는 매일 밥상의 반찬으로 먹는데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까지도 먹는다. 명태 살은 포를 떠서 제사에 쓰며 제기에 담아 제수로 놓는데 물건은 천하지만 쓰이는 것은 귀하다”고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적었을 정도다. 동해에서 잡힌 명태는 전국 팔도 방방곡곡의 시장으로 퍼지지 않았던 곳이 없었으니 정조 때 성해응은 <연경재전집>에 겨울이 되면 철령 이남으로 명태 운반하는 방울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토록 흔한 물고기였기에 너나 할 것 없이 해장국으로 북엇국을 먹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현대의 과학으로 보면 북어에는 간을 보호하는 아미노산이 풍부하기 때문에 숙취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조상님들도 과학적으로 설명은 못했지만 몸으로 체험하면서 느꼈기에 국민 해장국이 됐을 것이다.
해장국은 아니지만 옛날 양반들이 즐겨 먹던 해장음식이 있다. 지금도 민속주점이나 한식당에서 밑반찬 내지 기본 안주로 나오는 청포묵이다. 막걸리를 비롯해 전통 민속주를 파는 음식점에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청포묵을 내놓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청포묵 재료인 녹두에 열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동의보감>에 녹두는 성질이 차고 맛이 달며 독이 없어 열을 내리고 부은 것을 가라앉히며 소갈증을 멎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했다. 술을 마셔 몸에 열이 나고 입이 마를 때 술독을 해독시켜주는 데 안성맞춤이다. 그렇기에 옛날부터 현재까지 청포묵을 안주로 먹는 것인데 정조 때 시인 이옥의 시에 조선시대 술상에 오른 청포묵이 그려져 있다.
안주로는 탕평채가 한 가득 쌓였고 / 술자리에는 방문주가 흥건하다 / 하지만 가난한 선비의 아내는 / 입안에 누룽지조차도 넣지 못한다네.
탕평채는 녹두로 만든 청포묵 무침이고 방문주(方文酒)는 양조법을 제대로 지켜 빚은 술이다. 이옥은 과거에 급제했지만 자질구레한 글이나 쓰고 다닌다며 정조에게 찍혀 핍박 받던 인물로 당시 양반사회에서는 이단으로 취급 받았다. 그 때문인지 청포묵 무침이 나오는 시도 반항기 넘치고 삐딱하기 그지없다. 뿐만 아니라 <동국세시기>에는 음력 3월에 청포묵 먹는 것이 풍속이라고 했는데 봄에 먹으면 열을 내려 여름철 더위를 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술의 열을 식히는 해장의 원리와 서로 통한다.
그러고 보니 전통 해장국의 공통적 특징 중 하나는 음양철학이 바탕이 됐건 현대 과학으로 설명을 하건 대부분 술 마신 후 뱃속 열을 풀어주는 음식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 우리 해장국의 특징은 그 뿌리를 서민들의 술국인 장국밥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해장국의 바탕이 되는 장국밥은 서민들의 음식이면서 동시에 장사꾼의 음식이었다. 그렇기에 해장국 역시 시장이 발달한 18세기 무렵부터 지역별로 다양한 국밥이 나오면서 널리 먹기 시작했다.
18세기는 조선에서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시장이 발달했던 때였다. 19세기 초인 1808년에 발행된 조선시대의 재원을 기록한 <만기요람>의 ‘재용편’에는 조선 팔도의 시장이 경기도 102곳을 비롯해 전국에 1061곳의 시장이 있고 오일장 체계를 갖췄다고 했다. 수많이 사람과 상인들이 시장을 오가며 장국밥을 술국 삼아 술 한 잔 걸치며 뱃속을 든든히 채웠고 간밤 숙취를 장국밥으로 풀었다.
다만 옛날 술국은 한 끼 식사의 개념이면서 동시에 아침에 장국밥을 먹을 때도 하루 일의 시작을 위해 막걸리 한 잔을 곁들여 먹은 음식이었던 만큼 숙취 해소를 위한 해장보다는 술과 함께 먹는 술국의 비중이 더 강했을 것이다. 간밤에 잔뜩 마신 술로 괴로운 속을 달래고 풀어 준다기보다는 막걸리 한 잔 곁들여 하루 열심히 일하기 위해 먹는 고전적인 패스트푸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