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영의 영화로 보는 유럽사] (3) 중세 게르만족과 노르만족의 이동 | 영화 `바이킹`과 유럽 역사에 대한 인식
입력 : 2020.03.05 14:31:01
수정 : 2021.08.11 14:16:47
‘바이킹’ 하면 거대한 도끼를 들고 노략질을 일삼은 야만적인 해적 집단이 떠오르기도 하고 좁고 긴 롱십(longship)과 함께 전 세계를 누빈 해양 민족이 연상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8세기부터 11세기 초까지 서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바이킹은 누구인가.
바이킹(1958)
▶바이킹 시대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낸 영화 <바이킹>
영화 <바이킹(The Viking, 1958)>은 미국 소설가 에디슨 마샬(Edison Marshall)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리처드 플레이셔(Richard Fleischer) 감독의 작품으로, 8~9세기를 배경으로 당시 바이킹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낸다. 영화는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8세기와 9세기 유럽의 바이킹들은 전쟁의 신 오딘을 숭배했다. 그들의 북쪽 땅은 좁고 얼음에 뒤덮여 있어서 그들은 능숙한 배 만드는 기술을 이용해 공포의 세력을 펼쳐나갔다… 바이킹들이 잉글랜드를 약탈하고 노략질하러 나설 땐 절대 땅이 안 보이는 곳까지 항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밤에 신속하게 습격했다. 잉글랜드의 기도서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오, 하나님, 우리를 북방인들의 진노로부터 보호하소서.”
바이킹을 두려워한 유럽인들의 이러한 공포는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당시 바이킹은 브리튼 제도와 유럽 대륙 해안지역을 침략해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특히 가톨릭 수도사들이 거주하는 수도원은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대부분 기름진 경작지와 해안에 가까워 공격하기 수월했고, ‘전쟁의 신’ 오딘을 믿는 바이킹에게는 십일조와 기부로 막대한 재산을 갖고 있던 수도원이야말로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바이킹이 처음으로 기독교 성소를 공격한 것은 793년 잉글랜드 동쪽 해안에서 약간 떨어진 린디스판 섬의 수도원이었다. 바이킹은 교회에 침입해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보물을 약탈했다. 수도자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고 노예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납치하기도 했다. 이교도인 바이킹은 가톨릭의 성소를 약탈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이었고, 이 때문에 기독교도들에겐 악마의 화신이었다.
13번째 전사(1999)
영화 <바이킹>은 바이킹 족장 렉나의 아들 아이나와 노예 신분인 에릭이 영국 웨일스 왕국의 공주를 얻기 위해 벌이는 혈투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구성된다.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중심축은 출생의 비밀이다. 주인공 에릭은 사실 바이킹 족장 렉나가 영국 노섬브리아 왕국을 공격했을 때 왕을 죽이고 그 왕비를 겁탈해 낳은 사생아로 영국과 바이킹 양쪽의 핏줄을 이어받은 왕족인 셈이다. 바이킹 족장의 아들 아이나와는 이복형제 사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흥미로운 장면이 나오는데 바이킹 족장 렉나가 죽음을 당하기 직전 바이킹의 관습에 따라 명예롭게 죽기 위해 칼을 달라고 요구하는 장면과 칼을 들고 ‘발할라’를 외치며 당당하게 개떼 우리로 떨어져 죽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보면 바이킹이 그토록 호전적인 이유를 느낄 수 있다. 오딘을 믿는 바이킹은 명예롭게 싸우다 죽으면 오딘의 궁전인 발할라로 가게 된다고 굳게 믿었고, 이 때문에 명예로운 죽음에 대해서는 목숨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다.
13번째 전사(1999)
영화는 바이킹 족장의 아들 아이나가 자신의 신 오딘을 부르며 숨을 거두고, 아이나를 위한 바이킹 장례식이 치러지면서 끝이 난다. 이 마지막 장면은 당시의 독특한 장례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바이킹 선박에 장작더미를 높이 쌓고 그 위에 죽은 자를 올려 바다로 떠나보내면서 배를 향해 불화살을 날린다. 배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서 선박은 바닷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다. 이러한 바이킹의 장례식은 죽은 자가 새로운 미래로 멋진 항해를 하기를 바라면서 살아있는 자들과 이별을 고하는 예식으로, 일반인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지만 재산이 많거나 가문이 훌륭할 경우 이러한 바이킹 선박을 이용한 화장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바이킹 후손인 영국 노르만 왕조의 시조 윌리엄
영화 <바이킹>의 스토리는 역사적인 사실과는 차이가 있지만 바이킹 시대와 사회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중심 스토리인 출생의 비밀과 관련돼 있다. 주인공인 에릭은 바이킹 족장 렉나의 핏줄이면서 영국 노섬브리아 왕국의 왕족이다. 영화는 아이나의 장례식으로 끝을 맺지만, 노섬브리아 왕이 죽은 상황에서 아마도 왕위는 에릭으로 이어질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바이킹족과 수많은 왕국이 난립했던 영국 중세 초기 역사를 연결해주면서 영국 노르만 왕조의 시조이며 잉글랜드의 국왕이었던 윌리엄 1세가 바이킹의 후손이라는 점을 연상시킨다.
그러면 바이킹의 후손이 어떻게 영국 노르만 왕조의 시조가 되었을까. 역사를 4~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당시 서유럽은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라틴족의 로마 제국이 몰락하고 많은 게르만 왕국이 성립하였다. 이 왕국들은 대부분 단명했으나 그 중 앵글로 색슨족이 영국을 지배하고, 프랑크족이 지금의 프랑스인 갈리아 땅에 프랑크 왕국을 세우게 된다. 8세기 이후 프랑크 왕국이 자손들 간의 영토분쟁으로 혼란에 빠져있을 때 북쪽의 노르만족과 동쪽의 마자르족, 남쪽의 아랍인의 침략을 받는다. 이 중 노르만족의 침략이 가장 강력했는데, 이들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덴마크 지역에 살던 민족으로 롱십이라는 배를 타고 유럽 각지에 진출하여 무자비한 약탈을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바이킹이다.
9세기에 이르러 노르만족은 프랑스 북부와 서부 해안을 점점 더 큰 규모로 습격하고, 프랑크의 왕은 이들의 약탈을 막지 못하는 무능함으로 인해 폐위까지 당하게 된다. 900년경 파리 공격의 주역이었던 바이킹 롤로(Rollo)는 센강 유역에 항구적인 거점을 마련한다. 새로 왕위에 오른 샤를 왕은 다른 노르만족의 공격을 막아준다는 조건으로 왕국 북쪽의 영토 일부를 롤로에게 하사하고 그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임명한다. 이후 롤로의 직계는 혼인관계를 통해 영국과 프랑스의 여러 귀족 가문의 선조가 되었고, 롤로의 5대 손인 기욤은 1066년 잉글랜드를 침략하여 노르만 왕조를 세웠는데, 그가 바로 ‘정복왕 윌리엄’이다.
한편 스웨덴 지방의 노르만족은 862년 루리크의 인솔 아래 노브고로트 왕국을 세우고 이어 키예프 공국을 건설함으로써 러시아의 기원이 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노르만족은 11세기 이탈리아에 진출하여 나폴리 왕국을 건설하는 한편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시칠리아 섬을 점령했다. 노르만족의 일부는 원주지에 남아 11세기까지 노르웨이와 스웨덴, 덴마크 등을 세웠고, 덴마크 사람들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서 대서양을 횡단하여 아메리카까지 진출했다.
베오울프 (2007)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이러한 역사를 보면 ‘바이킹’은 단순히 노략질을 일삼은 해적집단이 아니라 북유럽은 물론이고 러시아와 북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네트워크를 가졌던 해양민족으로 세계사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흥미롭게도 19세기까지만 해도 바이킹은 서구권에서 잔혹하고 야만적인 약탈자로 기록돼 왔다. 그 이유로 앤더스 윈로스(Anders Winroth)는 바이킹은 재물이 많이 비축된 수도원을 주로 공격했고 가장 큰 피해자가 수도승들이었을 것이며 문자해독률이 높은 수도사들이 당시 상황을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아웃랜더(2008)
하지만 바이킹은 근대에 이르러 민족주의 및 제국주의가 고양되면서 ‘용맹하고 진취적인 해양민족’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유럽 주류에서 떨어져 있었던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자신들의 조상이었던 바이킹에 대해 재평가를 하고 있으며, 20세기 말의 고고학적 성과로 그들이 선원이라는 점 이외에 상인, 장인, 탐험가, 조선기술자라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내고 있다. 바이킹 유물의 해석과 정착지의 범위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긴 있지만, 바이킹의 긍정적 역할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될 가능성은 열려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바이킹에 대한 인식변화를 보면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가 남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제가 떠오른다. 역사 속 ‘사실’은 시대의 영향을 받은 역사가들의 해석을 위해 선택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이더라도 현재에 되살아나지 못하면 그 역사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우리의 과거도 마찬가지이다. 역사 속 사건이 현재 속에서 되살아나 새로운 의미와 방향을 제시할 때 역사의 힘은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