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My Walking] 온갖 바이러스여 안녕~! 숲과 호수가 만나 평안한 쉼터, 충주 종댕이길
안재형 기자
입력 : 2020.03.04 15:09:00
수정 : 2020.03.04 15:09:23
충주호 제2조망대
“이런 X. 난리예요. 난리. 네 식구가 일주일 동안 집에서만 뒹굴뒹굴했는데, 휴가는커녕 휴가의 ㅎ자도 제대로 못쓰고 나왔어요.”
일주일 전, 2년 만에 겨울휴가를 써본다며 전화기 너머로 잔뜩 기대에 부풀었던 김 차장 입에서 첫 마디부터 육두문자가 툭 튀어나왔다.
“아들 두 놈이 어찌나 울고불고 난리던지, 마지막 날엔 애들 재우고 누워있는 집사람 모습이 짠하기까지 하더라고요. 전 출근하면 그만인데, 집사람은 여전히 그 뒤치다꺼리를 다 해야하니…. 그놈의 바이러스가 애들뿐만 아니라 엄마들까지 그로기 상태로 만들고 있어요.”
눈치챘겠지만 중견기업에 다니는 김 차장이 이렇게 분개한 건 ‘코로나19’ 때문이다. 지난해 11월부터 올 2월 초 겨울휴가 계획을 세웠던 김 차장에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야말로 듣보잡 장애물이었다. 처음엔 그런가보다 했지만 이 듣보잡의 여파는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다. 결국 바다가 보이는 리조트에서 보내기로 했던 휴가계획은 물거품이 됐고, 일주일 내내 올해 3살, 6살이 된 두 아들과 집에서만 보내는, 말 그대로 자가 격리의 길을 택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확진자 뉴스에 사람 모이는 곳은 일부러 피했다. 주말이면 집에서 말 뛰듯 돌아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찾았던 대형마트가 하염없이 그리웠다.
“사실 전 그 때까지도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개구진지 잘 몰랐어요. 집사람이 늘 하소연하긴 했지만 그 정도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이고, 한 놈 진정시켜놓으면 한 놈이 울고불고. 하루 종일 그 놈들과 붙어 지내는 집사람이 얼마나 고맙고 위대해 보이던지. 이런 상황을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전혀 모를 거예요. 우주여행 운운하는 시대에 집 말고 갈 수 있는 곳이 없다니 참나….”
비단 김 차장 때문만은 아니지만 답답한 마음에 마스크 단단히 쥐고 오로지 걷기 위해 길을 나섰다. 산 좋고 물 좋고 바람 좋은 곳을 찾아….
충주호에 조성한 인공수초섬
▶자연을 품은 길, 서너 시간의 호사
입춘, 우수 지나 경칩을 바라보는 시기, 하지만 개구리는 이미 잠을 깼다. 겨울이 따뜻했던 탓이다. 이젠, 그야말로 봄이다. 하지만 겨우내 사람들의 입을 가린 마스크는 여전하다. 이럴 땐 탁 트인 곳에서 맑은 바람 맞으며 걸음 옮기는 상상을 해본다. 그런데 그 상상, 서울에서 2시간 반 떨어진 곳에선 일상이다.
서울에서 출발해 경부, 영동,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번갈아 오르내리다 보면 충청북도 충주시에 이른다. 이곳에 면적 67.5㎢를 자랑하는 충주호가 있다. 1985년 종민동과 동량면 사이의 계곡을 막아 만든 충주댐이 들어서며 조성됐는데, 담수량이 27억5000t이나 되는 그야말로 육지 속의 바다다.
물이 많고 수면이 넓으니 붕어부터 잉어, 향어, 송어까지 어종도 풍부하다. 그래서 낚시꾼들에겐 꼭 들러야 하는 국내 낚시 성지 중 한 곳이 됐다. 주변에 월악산, 청풍문화재단지, 단양팔경, 고수동굴, 구인사, 수안보온천 등 관광명소도 많은데, 충주댐 나루터에서 신단양(장회) 나루까지 52㎞에 이르는 구간에 쾌속 관광선과 유람선도 운행돼 호수 위에서 단양팔경을 돌아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충주호 한편에 ‘종댕이길’이 있다.
나무데크가 놓여 이동이 편한 초입구간
충주 종댕이길은 계명산의 줄기인 심항산 기슭에 만들어진 오솔길이자 둘레길이다. 해발 385m의 산을 끼고 한 바퀴 휘돌아 나가는 길인데, 마즈막재 주차장에서 출발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1코스가 가장 인기 높은 구간이다. 여기서 잠깐, 이름도 정겨운 종댕이길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종댕이(종당·宗堂)는 인근 상종·하종 마을의 옛 이름에서 유래된 충청도 사투리다.
그래서 이곳 토박이들은 심항산을 지금도 종댕이산이라 부른다. 숲길, 호수 주변 둘레길이 이어지는 종댕이길은 뭐니뭐니해도 경치가 그만이다. 봄에는 참나무와 소나무 숲에서 퍼지는 진한 피톤치드향이, 여름에는 호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가을에는 울긋불긋 산을 물들이고 물에 반사되는 단풍, 겨울에는 호수에 내려앉은 설경이 일품인 곳이다. 마즈막재 주차장에서 충주호를 바라보고 서면 걷기 코스의 시작부터 가슴이 탁 트인다. 시야에 걸리는 게 없으니 우선 눈이 편하고 바람이 맑으니 입이 편하다.
종댕이길 오솔길 입구
주차장에서 도로 옆으로 나무데크가 깔린 길(0.9㎞)을 걷다보면 내리막인 오솔길이 나오는데, 이곳부터 본격적인 숲이 시작된다. 자연그대로의 모습을 살린 산과 숲은 그래서 길도 좁고 구불구불하다. 비교적 쉬운 길이라고 소문이 났지만 무턱대고 덤볐다간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아 다리가 후들거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천천히 서너 시간은 충분히 걷겠다는 마음가짐이 우선돼야 한다. 도로를 얼마 벗어나지 않았는데도 숲은 깊고 향기롭다. 곳곳에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같은 참나무가 무성해 야생의 자연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한 잡목이 섞인 숲은 야생의 분위기를 풍긴다. 작은 생태연못에는 거뭇거뭇한 올챙이가 그득하고, 이 연못을 지나면 거대한 충주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계양산 휴양림으로 향하는 길에 놓인 출렁다리
▶바다 같은 위용, 조용한 산과 호수
호수와 맞닿은 길은 간간이 매서운 바람이 불어 아직은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하지만 나무가 무성한 곳에 들어서면 자연의 바람막이가 포근하다. 심항산 둘레를 도는 종댕이길에는 곳곳에 조망대와 쉼터, 정자를 두었는데, 제2조망대에서 바라본 충주호의 풍경이 멋지다. 가장 넓고 멀리 보이는 구간이다. 주변 마을에 전해오는 얘기 중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지키고 선 종댕이고개를 넘으면 한 달씩 젊어진다고 하는데, 이곳을 넘으면 길의 중간을 넘어 한 바퀴 돌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건강이 좋아진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경사는 나무계단이 조성돼 있지만 그 외는 돌과 흙을 밟고 가는 오솔길이다. 걷다보면 뭉친 근육이 풀리고 막혔던 호흡이 터지며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길의 마지막엔 출렁다리가 놓여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상종마을이나 계명산자연휴양림으로 나설 수 있다. 어느 길로 들어서도 결국엔 마즈막재 주차장으로 나가는 길이다. 길 잃을 염려 없이 걷다보면 이미 출발점에 다다른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