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우려 탓에 우리 공연계도 치명타를 입어 잠정연기되거나 취소되는 공연이 속출한다. 그 가운데 관객의 가슴을 울리는 뮤지컬 <드라큘라>는 아랑곳없이 열감지기, 마스크, 손소독제 등 만반의 준비로 무장한 만원 관객 속에 보란 듯이 펼쳐지고 있다. 치열한 예매 경쟁을 뚫고 힘겹게 4년을 손꼽아 기다린 공연을 예매한 관객들은 공연 내내 시간과 죽음을 초월하는 운명적 사랑에 숨죽이며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드라큘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스토리이지만 뮤지컬은 색다른 감각, 다채로운 감동을 선사한다. 불멸의 생을 부여받은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이 몇 백 년이 흘러 다른 남자의 약혼녀로 환생한 아내를 우연히 만나며 겪게 되는 아련하고 애달픈 사랑에 포커스를 둔다.
▶사랑으로 풀어 낸 흡혈귀 이야기
<드라큘라>는 아일랜드 작가 브람 스토커(Bram Stoker, 1847~1912)가 쓴 괴기소설로 학부에서 수학을 전공한 그는 10대에 연극에 매료된 뒤에 변변찮은 대우를 받아도 평론가로 활동했다. 밥값도 못 버는 가난한 예술가였지만 그는 더블린의 가장 영향력 있는 평론가로 손꼽혔다. 서서히 그의 가시밭 인생이 꽃길로 펼쳐졌다. 그 시작은 당대 최고의 영국 출신 세계적 배우인 헨리 어빙이 자신의 <햄릿> 공연 평을 쓴 스토커를 무한 신뢰하면서부터였다.
어빙의 비서가 된 스토커는 아일랜드계 출신 ‘개천의 용’으로 어빙 소유의 극장까지 경영하며 ‘영국 공연계의 큰손’으로 등극한다. 또한 문단의 촉망을 한 몸에 받던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구애도 매몰차게 거절했던 당대 최고의 미인과 결혼해 일과 사랑을 모두 쟁취한 스토커는 남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43세의 늦은 나이에 소설가로 등단해 겸업한다.
첫 소설의 실패에도 낙담하지 않고 꾸준히 20세기를 코앞에 둔 당시 유럽인들의 시대적인 선호도를 읽어내 7년 후인 50세에는 두 번째 소설 <드라큘라>를 세상에 내놓는다. 기쁨, 증오, 슬픔, 절망, 광란, 염원이 뒤범벅되어 추락한 영웅이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는 기존의 공포소설에 세기를 넘나드는 사랑을 가미했다. 서간체 편지형식에 인물관계도도 지극히 단순해 얼핏 보면, 그의 소설이 하품이 끊이지 않은 지루한 내러티브 같지만 고딕풍 호러 소설의 최고봉 수작이다. 시공간에 따라 흐르는 음습한 기운 때문에 등골이 오싹해지며 소름 돋는 전율이 독자들의 온몸을 휘감는다. 스토커의 수려하고 고급스러운 문체는 동유럽 민간신앙인 흡혈귀를 수준 높은 고혹적 판타지 문학으로 승화시켜 <드라큘라>는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흡혈귀 예술의 총결판으로 영화보다 차원 높은 원작으로 아직까지도 절찬리에 판매된다.
▶영국 왕실도 드라큘라의 후손
당시 영국인들은 인도, 중국과의 활발한 교역으로 오히려 아시아는 가깝게 느끼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동유럽은 미지의 세계로 여겼다. 스토커는 동유럽 루마니아를 문학적 상상무대로 삼았고, 숨겨진 역사기록에서 잔인한 실존인물을 소환해 독자의 흥미를 자극시켰다. 그 주인공은 신체의 일부를 예리한 칼로 도려내거나 뾰족한 장대에 사람을 매달아 죽이는 엽기적인 극형으로 적을 응징했던 15세기 왈라키아의 공작 블라드 3세다.
스토커가 수많은 역사인물들 중에서 굳이 블라드 3세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영국왕실의 혈통을 따져 올라가다보면 영국민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던 우아한 빅토리아 여왕도 블라드 3세의 후손이 된다. <드라큘라>가 결국 드라큘라를 제거하는 합리적인 선진국민 영국인을 미화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숨은 이면에는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기품 있고 고상한 영국신사 드라큘라는 실상 남의 피를 빨아 먹는 불한당이라는 결론이내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토커는 7년 동안 자그마치 100만 명이 아사(餓死)한 감자대기근 기간에 태어나 조국 아일랜드가 영국에 얼마나 수탈당하고 어떻게 멸시 받았는지 똑똑히 목격했다. 그가 반제국주의 관점의 억하심정으로 집필하진 않았지만 그의 조국 아일랜드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뼛속까지 사무치는 민족적 억압에 대한 함의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드라큘라 흡혈귀로 변질된 용의 기사단
블라드 3세의 아버지 블라드 2세는 동로마제국을 위협하던 오스만투르크 최강부대를 맹렬하게 격퇴한 공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용의 기사단 기사 작위를 하사받았다. 이후 그는 자신의 이름을 용의 의미를 가진 루마니아어 ‘드라큘’을 넣어 ‘블라드 드라큘’로 사용했다. 블라드 3세도 ‘용 블라드의 아들’의 의미인 ‘블라드 드라큘라’를 사용하며 드높은 가문의 영광을 누렸다. 아예 스토커는 ‘블라드’보다 귀에 더 잘 들어오고 발음하기 쉬운 ‘드라큘라’를 소설 제목으로 붙였다. 소설 한 권으로 인해, 신성로마제국을 살린 맹장들에게만 수여하던 드라큘라는 ‘용의 기사단(드라큘)’ 의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남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로만 기억된다. 아카데미상 4관왕의 쾌거를 이룬 영화 덕분에 제목 ‘기생충(parasite)’의 의미도 조만간 ‘부조리한 사회현상을 나타내는 고유명사’로 어학사전에 기록될지 모르겠다.
블라드 3세는 루마니아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이 자자해 흡혈귀로 전락한 그의 이미지에 자국에서는 불만이 많다고 한다. 흡혈귀 괴기소설 드라큘라는 브란성 인근 지역경제뿐 아니라 루마니아의 효자관광 상품이다. 소설 속의 배경으로 묘사된 브란성은 사실은 블라드 3세와는 전혀 관련 없는 공간이지만 브란성 일대는 드라큘라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산한 핏빛 어둠에 울려 퍼지는 매혹적 멜로디
원작소설을 감성적으로 각색한 뮤지컬은 원작의 드라큘라 백작을 더욱 신비스럽게 조명한다. 뮤지컬에서 드라큘라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상처와 슬픔으로 탄식하고, 피에 대한 욕망으로 갈등하지만 불멸의 삶을 살아야 하는 비운의 주인공이다.
뮤지컬은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의 작품으로 2004년 미국에서 초연된 후 스웨덴, 영국, 캐나다, 일본을 거쳤다. 우리나라에서는 객석점유율 92%를 기록하며 2014년에 첫선을 보였다.
당시 김준수 배우의 회차는 예매가 시작됨과 동시에 예매처 서버가 다운되며 매진되었고 2개월 만에 10만 관객을 돌파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4중 회전 턴테이블과 플라잉(Flying) 기술이 어우러진 입체적인 무대 연출이 압권인 뮤지컬은 드라큘라의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이 와일드혼의 서정적이고 극적인 선율과 어우러져 한층 고조된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줄 뮤지컬<드라큘라>는 3월의 봄날, 메마른 우리 정서를 촉촉하게 적셔줄 것이다.
<드라큘라> - 170분(인터미션 20분)
·공연일시 : 2020년 6월 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