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트르의 마르트르(martre)는 ‘순교자(martyrs)’에서 유래했으며 언덕을 뜻하는 ‘몽(Mont)’과 합쳐져 ‘순교자의 언덕’을 의미한다.
몽마르트르가 19세기 초부터 자유분방함을 즐기는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된 것은 싼 집세 때문이었다. 대부분이 평지인 파리에서 몽마르트르는 유일한 산동네였다. 도심과의 거리가 멀고, 환경도 열악해서 상대적으로 집세가 저렴했다. 청운의 꿈을 품고 유럽 각지에서 온 가난한 예술가들은 앞다투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파리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꼬불꼬불한 골목과 가파른 계단이 이어진 몽마르트르에는 예술가들의 꿈과 애환이 묻어있다. 가난한 예술가들은 몽마르트르의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때로는 서로 의지하면서, 때로는 반목하면서 작업실과 음식을 나누며 뒤엉켜 살았다.
그들이 그곳에서 만난 모든 것은 예술이 됐다. 친구와 애인은 물론 창녀까지, 가난과 설움까지 영감을 주는 모든 것들이 몽마르트르에서는 예술로 다시 태어났다.
파블로 피카소
▶몽마르트르가 만든 천재, 파블로 피카소
몽마르트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예술가는 파블로 피카소(1881~1973)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한 명의 키 작은 스페인 출신 화가가 파리에 온다. ‘파블로 디에고 도세 프란시스코 데 파울로 후안…’으로 시작하는 무려 열아홉 번이나 띄어쓰기를 해야 하는 긴 이름을 가진 열아홉 살 청년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에서 맨 첫 단어와 마지막 단어를 추려내 ‘파블로 피카소’라고 불렀다. 파리에 온 피카소는 다른 스페인 출신 화가들의 몽마르트르 작업실에 얹혀 살았다. 훗날 20세기 최고의 화가가 되어 엄청난 부를 쌓아 올렸던 피카소도 이 시절엔 비참한 가난에 허덕였다.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한 화상이 피카소를 찾아왔다. 그는 피카소에게 그림을 700프랑에 사고 싶다고 말했다. 터무니없이 싼 값을 부르자 피카소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저녁 피카소는 자기가 한 행동에 땅을 치면서 후회한다. 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 피카소는 다음날 자기 발로 화상을 찾아간다. 화상은 또 다시 그림값을 깎는다. 이번에는 500프랑을 불렀다. 화가 난 피카소는 상점을 나왔다. 하지만 배고픔을 벗어날 다른 방도는 없었다.
아무리 자존심 센 피카소라고 해도 배고픔을 이길 수는 없었다. 다음날 배고픔에 지친 피카소가 다시 상점을 찾았을 때는 그림값이 300프랑으로 내려가 있었다. 결국 피카소는 눈물을 머금고 300프랑에 그림을 팔았다.
하지만 300프랑에 팔았던 그 그림은 피카소라는 이름을 파리 화랑가에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몽마르트르를 기반으로 생활했던 수많은 화상들과 애호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야박한 장사꾼이었을 수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하면 가난한 예술가들을 발굴해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했던 전달자이기도 했다. 피카소는 훗날 “몽마르트르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하곤 했다. 비록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몽마르트르는 가능성의 거리였다. 예술가들에게 미래를 만들어주는 ‘꿈의 공장’같은 곳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에릭 사티
▶에릭 사티의 비애 가득한 음악이 탄생한 몽마르트르
몽마르트르를 상징하는 또 한 명의 예술가는 작곡가 에릭 사티(1866~1925)다.
1866년 서북부 노르망디에서 태어난 에릭 사티는 동생과 함께 그 지역 무명연주자로부터 오르간 수업을 받으며 처음으로 음악의 세계에 들어섰다.
음악에 매력을 느낀 사티는 13살의 나이에 파리 음악원에 들어갔지만 교사들에게 엄청난 혹평을 받는다. 주류 음악만 고집하던 교사들에게 그가 받은 비판은 너무나 극단적인 것이었다. 음악원 피아노 교수였던 조르주 마티아스는 사티의 피아노 기법을 ‘무가치’라고 비난했고, 또 다른 교수 에밀 디콤스는 사티를 ‘가장 게으른 학생’이라고 업신여겼다.
크게 실망한 사티는 학업을 그만두고 직업군인이 되기 위해 군에 입대했지만 기관지염에 걸려 몇 달 후 제대하면서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가 아무 희망도 없이 살던 사티를 구원한 곳도 몽마르트르였다.
1887년부터 고향을 떠나 몽마르트르에서 세를 얻어 살면서 사티는 자신의 예술이 음악원 선생들이 말했던 것처럼 ‘무가치’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몽마르트르에 있는 르 샤트 누아르라는 카페에서 드뷔시 등과 어울리면서 더 큰 세계를 만났고, 자신의 음악도 커다란 세계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사티의 대표작품 ‘짐노페디’, ‘오지브’, ‘노시엥’ 등은 모두 이 무렵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의 독창적인 음악은 바그너 풍의 낭만주의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던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사티의 유일한 사랑도 몽마르트르에서 이루어졌다. 1893년 사티는 화가이자 모델이었던 수잔 발라동과 사랑에 빠졌고 청혼하지만 거절당한다. 결국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몽마르트르의 사랑은 비탄에 잠긴 음악으로 남았다.
빈센트 반 고흐
▶예술의 각축장이었던 도시, 예술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빈센트 반 고흐도 몽마르트르 신세를 진 예술가다.
고흐가 전도사로서의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에 들어선 곳도 몽마르트르였다. 1881년 28살의 나이에 파리에 처음 온 고흐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고흐는 몽마르트르에서 눈부신 인상주의를 만났고 그것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예술을 완성한다. 로트렉 쇠라 베르나르와 교류하면서 자유분방한 색채를 만난 그는 ‘색채의 마술사’로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 이처럼 파리의 몽마르트르는 수많은 예술가들을 품었고 그들을 스타로 만들었다. 더 나아가 세상을 바꿨다.
중세 전 서양 예술의 중심 이탈리아 역시 예술과 문명의 발원지는 도시였다. 피렌체라는 도시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탄생시켰고, 베네치아는 티치아노와 비발디를 만들어냈다. 전 세계 인구 중 33억 명은 도시에 산다고 한다. 이렇게 인류 절반이 거주하는 도시가 지구 표면에서 차지하는 면적은 단지 0.2%에 불과하다.
이 작은 면적에서 사람들은 울고 웃으며 사랑하고 죽어간다. 도시는 인간의 모든 욕망과 소멸이 존재하는 곳이다.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성장한 도시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도시는 그곳에 사는 인간을 외롭게 하고, 동시에 그 인간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