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는 1997년 반환 이후 최장기 반중시위가 8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관련된 많은 보도 가운데 작년 10월, 홍콩 톱스타 주윤발이 침묵을 깨고 용감하게 시위대에 참여했다는 기사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행정장관이 복면금지법을 발표한 후, 주윤발이 검은색 모자와 옷, 검은색 마스크로 복면한 채 시위대에 참가했다는 기사는 ‘영웅본색의 귀환’이라는 타이틀로 많은 이들을 아련한 향수에 빠트렸다.
앞서 주윤발은 2014년 홍콩우산혁명 당시에도 시위대를 옹호하는 소신발언을 한 전적이 있다. 그 여파로 그는 중국 당국으로부터 TV 출연 금지를 비롯해 차기 모든 작품 검열이라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주윤발은 이번 홍콩 시위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입장을 낸 바 없다. 소셜미디어네트워크(SNS)를 통해 퍼진 시위참여 사진도 추적해보면 여름에 이미 촬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되어 복면금지법이나 시위와 무관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의 지지를 염원하는 홍콩시민들의 열망이 만든 오보 해프닝이었다.
주윤발은 1980년대 후반 ‘홍콩·느와르 돌풍’의 주역으로 아시아를 홍콩영화전성시대로 평정하고 대륙 대표배우로 성장했다. 그를 떠올리면 함께 떠오르는 그의 대표작 <영웅본색(오우삼 감독)>은 홍콩 암흑가를 주름잡는 피투성이 범죄조직 폭력물로 비하할 수도 있다. 허나 오히려 이 영화에는 사랑과 배신, 의리와 우정, 정의와 불의, 법치와 범죄 등의 한국인들을 움직이는 정서가 강력하게 녹아있다. 현대무용처럼 흐르던 유려한 영화 속 슬로 모션은 우리의 심장을 뜨겁게 강타했다. 물론 날아오는 총알은 언제나 주인공을 피해가고 적에게는 5발만 쏘아도 10명이 쓰러지는 무협지 설정은 지금 보면 실소를 터트리기도 하지만 당시 우리는 비장했다.
▶가슴으로 기억하는 영원한 히어로 주윤발
주윤발의 트레이드마크였던 깃 휘날리는 롱코트와 검은 선글라스는 당시 최고의 트렌드로 날개 돋친 듯 완판되었다. 1980년대 초등학생부터 30대 청년까지 누구나 한 번쯤은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그의 중국어를 흉내 내곤 했을 정도로 그는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우상이었다. 도의와 신의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양손으로 퍼부어대던 쌍권총 쓰나미와 친구를 구하기 위해 보트를 되돌리며 혈혈단신 적진에 돌진하던 그의 눈빛은 강력한 인상을 남긴 추억의 아이콘이다. 영화에는 암흑세계 범죄자와 무법자 폭력을 미화한 부분도 분명 있다. 죄의식 없이 간만 큰, 유치한 폼생폼사 세계를 근사하게 포장한 흡연 장려 영화라는 비난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영화 속 주윤발이 위조지폐로 담뱃불을 붙이는 장면은 여전히 많은 이들을 설레게 하는 사나이의 표상이다.
홍콩 느와르 영화들은 홍콩반환을 앞둔 홍콩인들의 초조한 절망적 사회흐름을 타고 탄생했다. 원작은 1967년 흑백영화였지만 원작보다 20여 년 후에 개봉된 <영웅본색>은 당시 홍콩의 분위기와 잘 매치되어 큰 반향을 맞이했다.
겉으로만 고도경제성장과 88올림픽유치에 한층 고취되어 있었던 우리나라의 어두운 정치·사회적 환경도 그에 못지않게 암담했다. 당시 우리는 군부정권의 황금만능주의를 조장하는 획일적이고 치열한 경쟁으로 자유는커녕 오로지 순응하고 순종해야만 했던 슬픈 자화상들이었다. 상상할 수 없었던 금기를 깨부수던 그들과 울고 웃으며 우리는 억눌리던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했다. 순수하게 젊었던 우리는 ‘절대 배신하지 말자’를 되뇌며 한 시절 이렇게 위안 받았다.
1987년 한국에 개봉된 홍콩영화 <영웅본색>은 4편(2016)까지 제작되었고 2016년까지 종종 재개봉되며 추억의 명화 반열에 올랐다. 그 여세를 몰아 영화 1·2편을 엮은 긴 서사를 압축적으로 재구성한 뮤지컬 <영웅본색>이 잠자던 우리의 7080 향수를 뒤흔들고 있다.
▶홍콩의 화려한 빛과 음습한 그림자를 담은 감각적 무대
위조화폐를 만드는 범죄 조직의 중간 보스 적룡(유준상, 임태경, 민우혁 분)과 주윤발(최대철, 박민성 분)은 의형제를 맺은 끈끈한 사이다.
조직에서 배신당한 적룡의 복수를 하던 주윤발은 장애인이 된다. 한편 징역형을 받은 형 적룡의 실체를 뒤늦게 알게 된 경찰인 동생 장국영(한지상, 박영수, 이장우 분)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분노와 원망이 극에 달한다. 3년 뒤, 출소한 적룡은 동생을 위해 범죄소굴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지만 과거의 그림자가 매번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위험천만한 마약잠입수사를 하던 장국영이 행방불명되자 형 적룡은 결국 동생을 찾기 위해 흑사회에 들어간다.
지금이야 금수저·흙수저로 나뉘어 신분이동이 녹록지 않지만 1980년대만 해도 집안을 일으켜야 하는 ‘개천에서 태어난 용’이 많았다. 자연적으로 형제들 간에도 법치·범죄 등 상반된 직업군에 종사하는 설정이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충분히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다. 뮤지컬은 영화의 추억이 없는 젊은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작영화가 가진 비현실적 결투장면을 걷어내고 스토리 중간중간 담긴 다채로운 의미를 보다 친절한 무대언어로 표현했다. 왕용범 연출은 영화의 히어로 주윤발보다 적룡-장국영 형제에 더욱 집중하며 진정한 우정, 가족애와 같은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담아낸다. 화려한 빛과 어두운 그림자로 대비되는 홍콩 뒷골목의 명암을 그대로 살린 뮤지컬은 30년 전 영화에 현대적 감각을 절묘하게 살렸다.
▶무대 위에서 피어나는 한국산 느와르 뮤지컬의 신화
영화 1,2편의 주제곡이자 공전의 히트곡으로 많은 이들을 설레게 했던 장국영의 ‘당년정(當年情)’과 ‘분향미래일자(奔向未來日子)’를 비롯한 다수의 장국영 곡을 뮤지컬에서 만날 수 있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 스크린 속 모습으로만 기억되는 장국영의 애달픈 음성은 뮤지컬의 음악적 감성을 더욱 강렬하게 입체화시킨다. 왕 연출은 <영웅본색>을 전작 뮤지컬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과 해상 전투 장면처럼 스펙터클하면서도 역동으로 풀어내지는 않는다. 대신 원작의 깊이에 더욱 충실하게 집중해, 의리와 배신이 충돌하는 홍콩 뒷골목의 고독한 우수와 인생의 메시지를 선사한다.
특히 1000장이 넘는 LED 패널을 설치한 인터랙티브 방식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배우의 동선과 표정은 유기적으로 고스란히 무대를 가득 메운다. 원작을 지나치게 각색하거나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무대 위로 오롯이 옮겨온 뮤지컬의 명장면은 객석에 앉은 관객의 가슴에서 영화와 서로 교차한다. 더불어 관객은 마치 자신만을 위해 촬영하는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는 새로운 경험을 맛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