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되는 법률이야기] 케이맨 군도, 영국령 버뮤다, 바하마, 버진 군도 등 조세피난처 주요국 세수부족에 잇따라 규제
입력 : 2019.04.11 10:31:53
수정 : 2019.04.11 10:32:12
Tax haven은 ‘조세피난처’로 번역되기도 하고 ‘조세천국’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haven이라는 단어의 문언적 의미는 폭풍우를 피하는 항구(harbor)라는 의미이므로 조세피난처라는 번역이 더 정확하고 실제 법률 영역에서는 그렇게 번역하는 관행이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학작품이나 일반 언론에서는 여전히 조세천국이라는 번역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혹시 haven과 영어 발음이 비슷한 heaven(천국)의 오역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사실 tax haven은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용어이고, 다른 국가에는 조세천국과 실제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는 단어(Steuerparadies(독일), Paradis fiscal(프랑스), Paradisfiscal(스페인))가 있기는 하다. 이러한 비영어권 국가의 용어에 비추어 보면 조세천국이라는 번역이 적절한 의역일 수 있다. 특히 부유하여 세금을 많이 내야 하는 납세자에게 천국이라는 의미에서 문학작품 등에서 조세천국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을 선호하는 것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어떤 나라가 조세피난처인가를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OECD는 다음과 같이 조세피난처의 3가지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첫째 세금을 부과하지 않거나 아주 낮은 세율의 세금만 부과하는 국가, 둘째 금융거래정보를 강력하게 보호하여 외국의 과세당국에게 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국가, 셋째 입법부·행정부·사법부의 활동에 투명성이 부족한 국가.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조세피난처를 결정함에 있어서 논란이 많고 명확하지도 않다. 흔히 조세피난처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따져 보는 요소는 그 국가의 조세제도이다. 그런데 어떤 국가가 저세율 또는 비과세 등 독특한 조세제도를 유지하더라도 이는 국가정책을 반영한 주권국가의 고유한 권한이므로 이를 조세피난처라는 이름으로 비난하거나 간섭하기 어렵다. 예컨대 우리나라나 대부분의 국가는 자국 거주자나 내국법인이 국내에서 벌어들인 소득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벌어들인 소득에 대해서도 모두 합산하여 과세한다(이를 속인주의 과세제도 또는 worldwide system이라 한다). 반면 네덜란드, 스위스, 싱가포르, 홍콩 등의 국가는 자국 거주자 또는 내국법인이 외국에서 투자활동을 하여 벌어들인 소득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세금을 매기지 않는다(이를 속지주의 과세제도 또는 territorial system이라 한다. 이 경우 외국에서 투자활동을 하는 법인이나 거주자는 거주지 국가에 세금을 거의 납부하지 않을 수 있다). 영토가 협소하고 시장이 작은 국가들은 정책적으로 자국 거주자들의 해외진출을 장려하기 위하여 위와 같은 조세제도를 취한다. 결국 OECD도 조세피난처의 3가지 기준 중 두 번째 기준만 유지하고 나머지 기준은 사실상 포기하였다.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조세피난처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있다. 변호사 출신의 법정 스릴러 소설 전문 작가인 미국의 존 그리샴은 1991년에 <the firm>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소설을 출판하였다. 1993년에 톰 크루즈가 주연으로 출연한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져서 더 유명해진 이 소설은 미국 남부의 소도시 멤피스에 있는 조세전문 로펌이 주 무대이지만 마피아 고객의 돈을 세탁하고 조세를 포탈하는 장소로 케이맨 군도가 자주 등장한다. 케이맨 군도는 카리브해 연안에 있고 우리나라의 강화도보다 조금 작은 면적을 가진 영국령의 작은 섬나라이다. 이 섬나라는 원래 아름다운 해변과 스킨스쿠버의 천국으로 유명한 휴양지이다. 그러나 소득세와 상속세를 없애고 금융거래정보를 강력하게 보호하는 법제도를 정비하면서 전 세계에서 수많은 법인과 금융기관들이 앞다투어 이 나라에 자회사나 지점을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다국적 기업들과 세계적 부유층들이 이 작은 섬나라에 천문학적인 돈을 예치하였는데, 미국 재무부의 추산에 의하면 2011년 기준으로 케이맨 군도의 금융기관들이 위와 같은 예금으로 미국에 빌려 주거나 투자한 돈은 1조4000억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조세피난처 관용하던 분위가 점차 사라져
대표적인 조세피난처라고 평가받는 국가들로는 케이맨 군도를 비롯하여 같은 영국령의 버뮤다, 바하마, 버진 군도, 저지(Jersey), 라이베리아(Liberia), 몰타(Malta), 모리셔스(Mauritius),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 등이 있다. 또한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위스 등도 조세피난처의 경계선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어 논란이 많은 국가들이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홍콩과 싱가포르가 조세피난처 리스트에 자주 오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국가들은 정책적으로 외국 투자자에게 세금을 절약할 수 있는 조세제도와 강력한 금융정보 보호법제를 제공함으로써 자국에 투자를 유치하고 금융 관련 산업을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다른 국가의 조세 수입으로 귀속될 돈을 자국으로 끌어들이는 정책인 셈이다.
선진국들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조세피난처에 대해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한 이유는 알기 어렵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동안 세계경기가 전반적으로 호황기에 있었던 점도 있고 다른 나라의 정책에 간섭하는 일이 쉽지 않은 점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하지만 선진국들도 경기침체로 조세수입이 줄어드는 반면 재정수요는 계속 늘어나면서 더 이상 조세피난처를 관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정치경제적인 상황에서 미국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자 전 세계 조세환경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급속하게 바뀌었다.
미국은 2008년경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개인자산운용 은행인 UBS가 미국 부유층의 세금포탈에 조직적으로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스위스 본사의 담당 CEO를 기소하고 UBS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벌금을 부과하였다. 그리고 그전까지 사문화되었던 해외금융계좌 신고제도를 강력하게 시행하고 관련 법제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적극적인 과세권 행사 의지는 미국 내국세법의 개정과 집행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국의 영향력을 배경으로 OECD는 2012년부터 회원국들의 책임 있는 과세당국자들을 참여시켜 납세자의 소득이전을 통한 국가의 과세기반 침식을 방지하기 위한 프로젝트(BEPS)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G20 정상회담은 2015년 BEPS 프로젝트 관련 최종보고서를 승인하였다.
BEPS 프로젝트는 매우 다양한 국제적인 조세회피 대책을 담고 있지만, 핵심은 각국의 과세당국이 금융거래정보를 포함하여 과세정보를 교환하는 협정을 체결하고 이를 위한 국내법을 제도화하는 국제적인 협의를 실행하는 것이다. BEPS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국가는 2018년 10월 기준 123개국이다. BEPS 프로젝트의 내용이 각국에 제도화된다면, BEPS 프로젝트는 인류역사상 가장 획기적으로 국제조세 제도를 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