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명화극장] 영화 <라스트 미션>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트럼프 시대에 대한 리액션
입력 : 2019.04.11 10:12:00
수정 : 2019.04.11 10:12:26
사람은 늙는다. 영화도 늙는다. 사람이 늙으면 말이 많아진다. 자꾸 잔소리가 심해진다. 영화도 늙으면 말이 많아진다. 진부하다고 느낄 만큼 안 해도 될 얘기를 노파심 많은 노파처럼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때는 짜증이 나지만 또 어떤 때는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흐뭇해지고 따뜻해진다. 할아버지, 할머니 혹은 아버지, 어머니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같이 있을 때는 잔소리가 싫지만 그들의 말투, 우리들의 인생을 걱정해 주는 그 끝없는 얘기들이 종종 그리워질 때가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딱 그렇다. 그의 신작 <라스트 미션>이 꼭 그런 모양새다. 늙은이 잔소리 같은 영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나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긴 하다. 그는 1930년생으로 올해 만 89세이다. 영화 전편은 89세 노인네의 거칠 것 없는 말투와 올드 패션 음악들로 가득 차 있다. (<황야의 무법자>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시절의 그 젊고 잘 생겼으며, 귀족적인 데다 지적이기까지 했던 용모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제 너무 늙고 (낙엽처럼) 바싹 말랐는데 이는 영화 캐릭터 설정 상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야위어 가고 있다. 한 마디로 죽음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어서인지 영화 속에서 이스트우드는 시종일관 꼬장꼬장하면서도 일견 무표정한 얼굴을 내비친다. 세상만사 다 귀찮아진지 오래이며 이제는 무서운 것도 없고 재미있는 것도 없어졌다는 식이다.
▶비로소 깨닫게 되는 가정의 소중함
<라스트 미션>은 90세가 된 노인 얼 스톤(클린트 이스트우드)이 마약 운반책이 되면서 겪게 되는 일을 그린다. 그 과정에서 이 ‘늙은이’는 비로소 가족과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이야기다. 근데 그보다는 늙은 남자가 마약을 나르고 다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영화는 이 얘기에서 저 얘기로 노인 특유의 삼천포식 대화법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원래 얼의 직업은 백합 재배자였다. 백합 재배는 인터넷 유통의 전사(前史) 시절에는 꽤나 고가(高價)의 산업이고, 또 꽤나 고상한 직업이어서 이 남자, 남부러울 것 없는 재미를 봐 가며 살아간다. 철없는 남자들 대부분이 잘 나갈 때는 자신이 잘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얼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미주(美州) 전역에 걸쳐 개최되는 백합 대회 따위에 참가하고, 올해의 백합 상 같은 걸 ‘주워 담느라’ 인생 대부분을 흥청망청 지냈다. 멕시코 일꾼들과 지내며 전국 행사를 쏘다니고 혼자서 즐길 건 다 즐겨왔다. 술과 친구, 여자들과 지냈으며 또 그러다 보니 당연히 가족과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담을 쌓고 지냈다. 아내 메리(다이앤 위스트)와는 한 10년 잘 살았나, 이미 오래 전 그녀의 곁을 떠났다.
영화의 첫 장면은 2005년이고 이때는 그의 딸 아이리스(앨리슨 이스트우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친딸이다.)의 결혼식 날이었는데 신부의 손을 잡고 식장으로 들어가야 할 아버지는 끝내 예식에 나타나지 않는다. 어디선가 바에서 생판 모르는 남녀의 결혼식 하객들에게 한 잔씩 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일 이후 딸 아이리스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는다. 그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시간은 흘러 이제 2017년이 됐는데, 이번엔 손녀 지니(테이사 파미가, 여배우 베라 파미가의 친딸이다.)의 결혼 전 회식 자리가 벌어지고 얼은 여기에 웬일인지 참석하기 위해 나타난다. 하지만 아내 메리와 딸 아이리스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불쾌한 기분으로 돌아가는 자리에서 파티에 왔던 한 흑인 젊은이에게 이상한 제안을 받게 된다. 바로 일리노이 주 어딘가로 마약을 운반하는 일이다.
인생 내내 교통 딱지 한번 안 떼인 데다가 규정 속도로만 달리는 이 늙은 운전자를 의심할 자는 아무도 없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두목 라톤(앤디 가르시아)은 기발한 배달부를 구했다고 생각하고 점점 더 그에게 많은 양의 일을 맡기게 된다. 늙은 얼은 얼대로 백합 공장은 문을 닫은 지 오래인 데다 그 옆에 딸린 집은 은행에 넘어간 지가 ‘100만 년 전이고’ 무엇보다 손녀딸이 돈이 없어 피로연도 제대로 못 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렇다면 까짓 것 하자는 기분으로 일을 맡게 된다. 그런데 ‘물건’을 갖다 주는 일 만으로 한 번에 수만달러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그는 점점 더 욕심을 내기 시작한다. 그저 욕심이 아니다. 그 막대한 돈으로 그동안 자신이 잘못했던 일, 꼭 했어야 하는 일, 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못해 왔던 일을 하나씩 해결해 나간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임무가 다가오기 시작한다.
▶90세 얼에겐 시간이 없다
다 늙은 얼이 흑인 갱단, 히스패닉 갱단을 만나 전혀 공포에 떨지 않고 주섬주섬 자기 일을 해내고, 그들에게 입 바른 말을 척척 하는 모습들은 오히려 이 영화의 코믹한 장면에 속한다. 자꾸 웃음이 나오며 사람이 늙으면 그다지 큰 욕심은 내지 않으며 살게 마련이다. 그건 영화 속 얼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자기가 배달하는 것이 (마약이지만) 뭔지 잘 알려고 하지 않고 그것의 값어치가 수백만 달러가 되든 말든 거기서 2만, 3만달러를 가져가는 데 만족하려 한다. 거기다 마약왕 라톤은 그에게, 그가 그렇게 좋아하는 여색(女色)과 비싼 술을 제공하는 데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얼은 늘 횡재하는 기분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하고 싶은 선행(善行)은 쌓여 있고 자신의 나이는 물리적으로 이제는 거의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90세 노인 얼의 발목을 잡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라스트 미션>에서 주인공 얼은 참전용사 출신으로 나온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싸웠다. 그가 애지중지 다니는 곳도 참전용사들이 운영하는 맥주홀이다. 그는 이곳을 새로 고치고 밀린 세금을 내기 위해 마약으로 번 돈을 ‘때려’ 넣기까지 한다. 주인공 얼의 모습을 이런 식으로 그리는 것을 보면 이 영화는 언뜻 트럼프 시대에 대한 클린트 이스트우드 식의 리액션이라고 볼 수도 있다. 모두가 다 아는 것처럼 이스트우드는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통령 집권기에는 고집스럽게 보수의 가치를 강조하는 영화를 찍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막상 트럼프 시대가 오고 나니, 이 트럼프라는 자가 워낙 ‘망나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트럼프처럼 나도 막 살면 어떨까, 그렇게나 돈이 좋다고 하니 어디 돈(마약) 놓고 돈 먹기를 해 볼까, 근데 설마 이게 진짜 보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하는 마음이 영화 속 내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미국사회 보수주의의 마지노선, 최후의 보루는 어쩌면 참전용사들일 수 있다. 참전용사가 망가지면 미국 사회는 끝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영화를 두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식의 ‘보수주의에 대한 성찰’이라고 해석하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더 뮬(The Mule)’, 곧 노새이다. (평범한) 인간들은 어쩌면 노새처럼 힘들게 일하고 속절없이 늙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늙은 노새는 여전히 묵묵히 일하지만 고집을 부릴 때는 아무리 채찍질을 해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를 않는다. 그것 참 밉상인데, 이상하게도 그렇다고 이 노새를 버릴 수가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제목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근데 라스트 미션이 뭐람, 라스트 미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