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③ 언어의 마술사이자 돈에 집착한 욕심쟁이 윌리엄 셰익스피어, 고향 英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서 조용한 末年
입력 : 2019.04.11 10:00:43
수정 : 2019.04.11 10:01:16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영어사에 남긴 업적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는 희극, 비극, 사극, 낭만극을 포함해 희곡 37편과 장편 시 2편 그리고 소네트 154편을 썼고, 자신의 작품에 1만7677개의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영어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excellent, hurry, hint, bump, homicide, lonely, majestic 등이 바로 셰익스피어가 처음으로 사용한 단어들이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흔적을 만나기 위해서는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북서쪽으로 150㎞ 정도 떨어진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으로 가야 한다. 인구 2만여 명의 소도시,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은 ‘로마인이 닦은 길이 강을 가로지르는 개울’이라는 의미로 7세기 때부터 교통 요충지였다. 따스한 봄기운이 완연한 이곳은 강과 어우러진 마을 풍경이 마치 수채화처럼 은은하고 고즈넉하다. 이 작은 도시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소를 찾는다면 셰익스피어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와 런던에서 돌아와 만년을 지낸 뉴플레이스다.
우선 그가 태어난 이층집 생가는 현재 기념관으로 탈바꿈돼 그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성지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생가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1600년에 그려진 셰익스피어의 초상화 ‘플라워’가 걸려 있고, 내부에는 라틴어책이나 성서 등의 다양한 책들이 전시돼 있다. 또한 입구 바로 옆에는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죽제품 가게가 중세시대 모습으로 재현돼 있다. 약간 어두운 빛으로 조명된 실내는 셰익스피어의 예술적 영혼을 만나기에 충분하다. 특히 그가 태어난 2층의 작은 방에 들어서면 마네킹으로 만든 갓난아기 모습의 셰익스피어와 빨간 침대가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온다. 집 내부는 오래된 가구와 빛바랜 사진들로 장식돼 있고, 움직일 때마다 나무 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데, 불쾌하기보다는 정겨운 음악처럼 몸과 마음에 스민다. 그럴 때마다 방 어디에선가 불쑥 셰익스피어가 나타날 것만 같은 묘한 기분에 빠져들고, 주마등처럼 그의 삶이 머릿속을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셰익스피어는 영국 르네상스의 정점기인 엘리자베스 1세 때인 1564년 4월 23일에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4월 23일을 그의 탄생일로 정한 것은 셰익스피어의 탄생 기념행사를 이날 치르기 때문이다. 교구 교적부에는 4월 26일이 그의 출생일로 기록돼 있다.
윌리엄의 아버지인 존 셰익스피어는 이 도시에서 가죽가공업과 중농을 겸하는 상인이었으며,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중산층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나기 전까지 그는 초·중급 학교에 다닌 것으로 확인되며, 1500년대부터 유럽의 국제어인 라틴어를 중심으로 한 기본적인 고전교육을 받았다. 이때 배운 라틴어와 고전교육은 훗날 그가 극작가로서 필요했던 역사와 천재성을 발휘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셰익스피어와 연극의 인연은 그가 열 살 즈음부터 시작되었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축제나 휴일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축하잔치를 하거나 유랑극단의 연극이 많이 펼쳐졌다.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은 영국의 중부지방에 있어 교통이 활발했고, 그 때문에 런던의 유명한 유랑극단이 이곳을 지나며 다양한 공연을 펼쳤다. 특히 1573년과 1576년 레스터 백작 극단과 1579년 스트레인지 경 극단은 이곳에서 연극의 진수를 선보였다. 그중에서도 레스터 백작 극단은 엘리자베스 1세와 신하들을 초청해 신화극, 불꽃놀이, 연극 등 다채로운 행사를 3주 동안 펼쳤는데, 그 자리에 셰익스피어도 있었다. 이때부터 소년 셰익스피어는 환상적인 연극에 매료되어 장차 희곡작가와 극단 제작자로서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 후 셰익스피어는 런던 연극계에 혜성처럼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부분이 바로 학자들이 셰익스피어가 실존 인물이 아님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고등학교도 겨우 마칠 정도로 교육 혜택이 미비했던 셰익스피어가, 더군다나 7년간이나 자취를 감췄다가 돌연 런던의 연극계를 주름잡는 작가로 나타났다는 점은 많은 오해와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젊은 나이에 부와 명성을 거머쥔 셰익스피어는 런던에서 명망 있는 극작가이자 연극 제작자로서 성공하였고. 수익성 있는 사업을 가려내는 안목도 갖춰 재산을 많이 모았다. 1592년 그의 나이 28세 때, 윌리엄은 런던에서 아주 유명한 극작가 중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작가로서, 제작자로서 명성을 날릴수록 그에게는 좋지 않은 비판들이 함께 쏟아졌다. 그의 맞수이자 선배 작가인 로버트 그린은 셰익스피어를 ‘벼락출세한 까마귀’라고 불렀고, 크리스토퍼 말로, 조지 필, 토머스 내시 등 당대의 유명한 극작가들은 “대학교육도 받지 못한 무식한 풋내기가 연극업계를 망치고 있다”고 혹평을 쏟아냈다. 하지만 30대 들어서자 그의 위력은 런던 연극계를 평정할 만큼 더욱더 강해졌다.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거머쥔 윌리엄이지만, 세무기록이나 유언장을 살펴보면 그는 돈에 집착하고 이재에도 상당히 밝았던 성격의 소유자였다. 돈을 갚지 않는 채무자를 무자비하게 독촉해 돈을 받아 내고야 마는 집요함도 있었다.
어쨌든 런던에서 부와 명성을 쌓은 셰익스피어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생가가 아닌 마을에서 가장 좋은 집 한 채를 사들여 ‘뉴플레이스(New Place)’라고 명명한 뒤, 조용하게 이곳에서 글을 쓰면서 말년을 보냈다. 그의 작품에도 등장하는 홀리 트리트니 교회 바로 앞에 있는 뉴플레이스는 생가와 달리 벽돌로 지어졌고, 주변에는 울긋불긋한 꽃들의 정원이 있어 노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내부는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살림 도구와 부엌이 있고, 2층에는 그와 관련된 많은 책과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퍼스트 폴리오>라고 불리는 셰익스피어의 전집으로, 세계에서 다양한 언어로 출간된 책이 전시돼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퍼스트 폴리오>도 있다.
사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셰익스피어 전집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대본이 출간되는 것을 반대했었고, 그로 인해 윌리엄이 죽은 지 7년 뒤 킹 극단에 소속된 배우이자 셰익스피어 친구인 존 헤밍과 헨리 콘델이 배우들에게 흩어져 있던 그의 연극 대본을 모아 출판하였다. 그때 만들어진 셰익스피어 전집인 <퍼스트 폴리오>는 사극, 희극, 비극 등 세 범주로 나눠놓은 것이다.
1616년 4월 23일, 묘하게도 그의 탄생일로 추정되는 같은 날에 셰익스피어는 5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4월 25일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 있는 성 삼위일체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여기 덮인 흙을 파헤치지 마시오. 이 돌을 건드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이 뼈를 옮기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으리라”라고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