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비즈니스를 하며 지인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중 하나는 우리나라의 와인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판매하는 와인 가격은 이웃한 일본이나 홍콩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비싼 편이다. 해외여행이 흔하지 않던 과거에는 그러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최근에는 저가항공 덕분에 해외 도시를 가는 게 훨씬 쉬워지면서 와인 가격의 차이를 크게 체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와인과 관련한 휴대폰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하면 전 세계의 와인 가격을 비교할 수 있게 되어, 최근에는 와인 매장에서 휴대폰으로 가격을 비교하는 고객들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와인 가격이 비싼 이유는 크게 3가지 정도 언급이 된다. 첫째는 세금이다. FTA로 인해 관세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애초부터 관세보다 주세와 교육세의 비중이 더 높았다. 두 번째로는 까다로운 검사나 배송같이 눈에 안 보이는 비용이 많다는 점이다. 오래된 와인 한 병을 들여오더라도 새로운 제품이거나 식약청의 요구가 있다면 무작위 검사라는 것을 받아야 하는데, 이게 꽤나 빈번한 편이다. 만약 희귀한 와인 2병을 수입했는데 한 병을 검사해야 한다면, 수입업자는 이익을 남기기 위해 두 배 이상의 가격을 부를 수밖에 없다. 세 번째는 유통 구조다. 우리나라의 와인 유통 구조가 복잡하다고 알려졌지만, 와인의 본고장인 프랑스와 비교해 보면 별로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의 와인 유통은 수입, 도매, 소매로 나누어져 있어서, 수입에서 소매까지의 일방통행만 허용되어 있고, 도매 간의 거래는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중개인, 대형도매, 소형도매 등이 거미줄 같이 이어져 있어서, 어떤 농부들은 자신들의 와인을 어디에서 판매하는지도 잘 모를 정도다. 와인 전문지에는 종종 자기가 판매했던 와인이 출고 가격보다 더 싼 가격에 마트에서 팔리는 것을 보고 놀란 농부들의 이야기를 볼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단순한 유통구조는 정부가 통제하기에는 쉬울 수 있으나 오히려 쉽게 독점구조를 만드는 편이다.
프랑스의 와인 유통 시스템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알려져 있는 것은 바로 ‘네고시앙 (Negociant)’이라고 불리는 보르도의 와인 상인들이다. 보르도 와인의 유통 구조는 독특하고 얼핏 보면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다. ‘샤토’라고 불리는 보르도의 생산자들은 직접 와인을 유통하지 않는다. 샤토에서 와인을 만들면, 쿠르티에(Courtiers)라는 일종의 브로커를 거쳐서,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도매상이라 할 수 있는 네고시앙에게 전달된다.
이 와인들은 또다시 프랑스 국내의 다른 도매상(Grossistes)이나 해외의 수입업자를 거쳐 프랑스 내수 시장과 해외에 판매된다. 일설에 의하면, 과거에 보르도의 샤토들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은 왕가나 귀족 가문의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직접 와인을 판매하는 게 고귀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대리인이 필요했고, 네고시앙 시스템을 만들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 기원이 어찌되었던 복잡해 보이는 유통 구조는 개별 회사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보르도의 샤토들은 철저하게 생산과 관련된 조직만을 갖고 있고 영업이나 마케팅같이 생산과 상관이 없는 조직은 갖고 있지 않다. 최근에는 시장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잘 알기 위해 수출 담당자나 마케팅 담당자를 두는 경우도 있으나 그들의 역할은 한정적이고 실제 유통은 네고시앙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마치 생산과 영업, 마케팅 조직이 각자의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움직이는 큰 유기체와도 같다.
보르도의 네고시앙은 와인이 소비되는 어떤 곳이라도 주저 없이 날아가 와인을 팔아왔다. 미국과 일본·중국뿐만 아니라, 아랍이나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까지, 당장의 이익이 나지 않을지라도 그들의 선배들이 400년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습관적으로 시장을 방문하고 와인을 소개해왔다. 그래서 신대륙에 처음 도착한 것은 선교사와 보르도 네고시앙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보르도 네고시앙은 단지 와인을 유통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와인 생산자들에게 부족한 자본을 융통해주기도 했는데 이렇게 해서 보르도 엉프리뫼르(En Primeur)라 불리는 선물 거래 시스템이 태어나게 된다. 대부분의 보르도 고급 와인은 와인이 완성되기 약 2년 전, 막 오크 숙성을 시작한 상태로 거래된다.
원래의 취지는 생산자들이 미리 자본을 확보할 수 있고, 유통업자들은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대부분의 생산량이 엉프리뫼르로 거래되고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초기의 취지와는 조금 다르게 운영되고 있다. 그래서 ‘샤토 라투르’ 같이 더 이상 와인을 엉프리뫼르로 거래하지 않는 회사들도 생기고 있다.
한때 샤토로부터 와인을 오크통째로 사서 서로 다른 샤토의 와인을 마음대로 블렌딩하고, 와인 레이블도 자기 마음대로 붙일 정도로 보르도 네고시앙이 큰 권력을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들의 영향력은 1855년 나폴레옹 3세를 설득하여 보르도 그랑크뤼(Bordeaux Grand Cru)라고 불리는 와인판 미슐랭 가이드를 만들며 최고조를 달렸지만 20세기 초, 좋지 않은 날씨가 지속되어 와인의 품질이 떨어지면서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1924년 ‘샤토 무통 로칠드’는 품질 관리라는 명목으로 병입 권한을 네고시앙으로부터 샤토로 가져왔다. 그리고 무려 40년간 이웃들을 집요하게 설득하여 1967년에는 모든 그랑크뤼 샤토가 직접 샤토 병입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보르도 와인의 권력은 조금씩 네고시앙에서 샤토로 옮겨가게 됐다. 최근에는 자신들이 직접 와인 유통을 시작하는 생산자들도 생기고 있는데, 물론 그 형태는 자신들이 직접 운영하는 네고시앙 회사를 통해서다.
비록 와인 생산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보르도 네고시앙은 세계 최고의 와인 유통망을 가지고 있다. 가령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있는 ‘오퍼스원(Opus One)’과 ‘알마비바(Almaviva)’는 각각 미국과 칠레에서 생산되지만, 전 세계 유통은 보르도 네고시앙에 의해 이루어진다. 덕분에 신대륙 프리미엄 와인이라는 단점과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빠른 시간에 전 세계 시장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 두 와인의 성공에 힘입어 최근에는 전 세계의 많은 프리미엄 와인들이 네고시앙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안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의 파트너였던 ‘샤토 드 보카스텔’의 최상급 와인인 ‘자크 페랑(Hommage Jacque Perrin)’이나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최고급 와인인 ‘오르넬리아(Ornellaia)’도 이제는 보르도 네고시앙을 통해 유통되고 있다. 반면 보르도 샤토들과 네고시앙들의 관계는 전과 같지 않다.
어쩌면 보르도 와인을 성공시킨 보르도 네고시앙들에 의해, 프리미엄 와인의 권력이 보르도에서 이탈리아나 캘리포니아로 넘어갈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