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강정은 묘하게 매력적이다. 배고플 때 간단하게 식사대용으로 먹을 수 있고 맥주와 찰떡궁합이어서 술안주로도 제격이다. 주당의 기호식품인 만큼 아이들 취향에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는데 실상은 간식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한마디로 나이와 성별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것이 닭강정이다.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한국을 찾는 관광객은 물론 요즘은 외국 현지에서도 인기가 높다.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까운 도쿄와 북경, 상해를 비롯해 동남아 여러 도시와 뉴욕 등지에서 음식 한류를 이끄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닭강정, 맛은 있지만 무엇이 그렇게 매력적일까 싶기도 한데 입맛을 유혹하는 핵심 비결은 역시 맛이다. 누가 처음 닭강정을 개발했는지 모르지만 음식의 구성을 보면 기본적으로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신발도 기름에 튀기면 맛있어진다는 말처럼 베이스가 닭고기 튀김이다. 여기에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강정 소스를 덧씌웠으니 한국을 넘어 여러 나라 사람들한테 사랑받을 조건을 갖췄다. 하지만 닭강정이 사랑 받는 요인으로 맛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재료가 특별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고급스럽지도 않으면서 연령과 성별, 국적을 초월해 두루 환영받는 데는 맛 이외에 또 다른 특별한 무엇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요즘 뜨고 있는 음식 한류, 닭강정의 인기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노예의 음식과 왕실의 진미
다양한 풀이가 가능하겠지만 닭강정을 역사라는 관점, 경제라는 측면에서 들여다보면 꽤나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과거와 현대가 시공을 넘어 서로 섞여 있으면서 서양의 프라이드치킨과 한국의 강정요리라는 동서양의 이질적 요소가 합쳐져 있는 데다, 노예의 음식과 왕실의 진미라는 양극단이 서로 결합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닭강정은 앞서 말한 것처럼 기름에 푹 담가 튀긴(Deep Fried) 닭고기, 즉 프라이드치킨이 바탕이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프라이드치킨은 미국 흑인의 소울 푸드였다. 18~19세기 미국 남부의 흑인 노예들이 만들어 먹으며 퍼트린 음식이다.
미국의 닭고기 요리에는 나름 계보가 있다. 영국의 잉글랜드 출신이 주로 정착해 살았던 동부에서는 닭고기를 장작불에 굽는 로스트치킨, 통닭구이가 발달했다. 반면 상대적으로 추운 지방인 스코틀랜드 출신이 많았던 남부에서는 우리나라 빈대떡 부치듯 프라이팬에 기름을 듬뿍 두르고 지지는 치킨 프리터(Fritter)가 중심이었다.
이런 스코틀랜드식 프리터 요리를 토대로 미국 남부에서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지지는 정도가 아니라 기름에 재료를 푹 담가 튀기는 요리법이 생겼다. 대규모 농장이 많은 남부였기에 농업부산물이 많았고 이런 풍부한 사료 덕분에 양돈업이 성행했다. 그 결과 돼지기름이 넘쳐나 생긴 조리법이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는 주인에게 전통적인 방식으로 닭고기 프리터를 요리해 준 후 넘치는 돼지기름에 백인은 먹지 않는 닭 모가지와 닭발, 닭 날개 등 허드레 부위를 튀겨 먹었다. 고온의 기름에 깊숙이 담가 순간적으로 튀겨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라이드치킨은 이렇게 만들어진 미국 흑인 노예의 땀과 눈물이 깃든 음식이었다. 프라이드치킨은 이렇듯 백인 요리법에 흑인 조리법이 더해지면서 미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퍼졌다. 이렇게 우리나라에 들어온 프라이드치킨에 새로운 요리법이 더해졌다. 튀긴 닭고기에 고추장, 마늘, 물엿을 넣어 버무린 양념 통닭이 유행하더니 어느 순간 프라이드치킨을 강정 소스에 버무린 닭강정이 생겨났다.
강정은 전통 한과 조리법으로 만드는 음식이다. 볶은 쌀이나 밀, 혹은 과일이나 채소를 참기름과 들기름, 꿀에 버무려 만드는데, 다양한 재료를 기름과 꿀에 버무렸기에 유밀과(油蜜果) 혹은 유과(油果)라고 한다. 약과와 산자, 강정 등이 대표적이다. 닭강정은 볶은 곡식이나 채소, 과일 대신 닭고기를 버무린 것으로 물론 현대에 생겨났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강정 요리가 특별할 것 하나 없어 보이지만 예전에는 달랐다. 예컨대 강정을 만들 때 쓰는 참기름은 예전 할머니들이 한 방울도 아까워 손가락으로 기름병 입구를 훑어 먹던 기름이다. 꿀 역시 지금은 흔하지만 옛날에는 약으로나 썼을 정도니까 이런 재료로 만든 강정은 함부로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설 같은 명절이나 결혼 잔치 아니면 먹지 못할 정도였는데 그만큼 귀했기에 조선시대에는 강정을 잘 만들어 출세한 사람까지 있었다.
광해군 때 좌의정까지 오른 한효순이 그 주인공으로 집안의 음식 솜씨가 빼어났다. 더덕으로 강정을 만들어 광해군에게 바쳤는데 맛있는 음식을 진상한 덕분인지 왕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정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한테는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어 더덕 재상이라는 별명까지 들었다.
<광해군일기>와 <연려실기술>에 당시 한효순을 조롱하는 세간의 노래가 나온다. “처음에는 더덕 정승의 권세가 중하더니/지금은 잡채상서 세력을 당할 자 없도다.” 여기서 더덕 정승은 좌의정을 지낸 한효순, 잡채상서는 잡채를 만들어 임금에게 바쳐 출세한 당시 호조판서 이충을 비꼬아 부른 말이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11년(1619년) 3월 5일자 기록을 보면 한효순의 집에서는 더덕으로 밀병을 만들었고, 이충은 잡채에 다른 맛을 가미했는데 그 맛이 독특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한효순 집에서 만들었다는 밀병은 한자로 꿀 밀(蜜)에 떡 병(餠)자로 적혀 있는데, 더덕을 까서 두드린 후에 찹쌀가루를 입혀 기름에 지진 후 다시 꿀로 버무려 만든 더덕강정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상 사람들이 더덕 강정 때문에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고 비웃었을 정도니 대단한 처세술을 떠나 그 맛이 기막히게 좋았던 모양이다. 강정은 이렇게 대단한 음식이었다.
▶700년 전 외국에 알려진 강정
요즘 닭강정 맛에 반한 외국인들이 적지 않은 것처럼 옛날에도 강정 맛에 푹 빠졌던 것은 비단 광해군을 비롯한 우리 조상뿐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음식 한류로 닭강정이 이름을 알리기 700년 전부터 이미 우리 음식, 강정이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렸던 것인데, 예컨대 고려 때 원나라 왕족과 귀족들이 고려의 강정을 먹어보고는 그 맛을 잊지 못해 수시로 강정을 보내달라고 성화를 부렸다고 한다.
<고려사>에 당시 정황이 보인다. 1296년 고려 제26대 국왕인 충선왕이 원나라 공주와 결혼을 할 때 잔칫상에 고려 풍속에 따라 갖가지 종류의 강정을 차렸다. 이후 고려 강정이 맛있다고 소문나면서 원나라에서 강정 수요가 늘었다는데 이런 엉뚱한 유명세로 인해 당시 백성들은 강정을 만들어 보내느라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어쨌거나 국내외를 막론하고 옛날 사람들이 강정을 좋아했던 것은 그만큼 맛있는 고급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강정을 많이 만들어 먹었는지 고려와 조선에서는 강정을 비롯한 유밀과를 사치 음식으로 분류해 반드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법으로 만들지 못하게 제한했던 경우가 많았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명종 22년(1192년)에 “요즘 풍속이 낭비가 심해 곡식을 모래같이 쓰고 기름과 꿀 보기를 뜨물 쓰듯 하니 지금부터는 강정을 쓰지 말라”며 이를 어기면 죄를 묻겠다는 기록이 있다.
강정의 인기가 높고 그로인해 꿀과 곡식, 참기름의 낭비가 심했기에 강정을 비롯해 유밀과 제조금지령이 자주 내려지는데 조선시대 <국조보감>에는 영조 때 왕실 결혼부터 사대부 혼인까지 결혼 잔칫상에 강정 놓는 것을 금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심지어 조선 후기 법전인 <대전통편>에는 혼인이나 제사와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데 함부로 강정을 만들면 곤장을 때린다는 내용까지도 있다. 물론 조선시대 문헌에서 강정 만들어 먹었다고 벌 받았다는 기록은 찾아보지 못했으니 실제 집행되지는 않고 엄포에 그쳤던 것 같기는 하지만, 강정이 그만큼 대단한 음식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러고 보니 요즘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닭강정이 여러 면에서 새삼 특별하게 느껴지는데 동서양의 이질적 요리가 시공을 초월해 합쳐진 데다 소울 푸드와 사치요리라는 극단의 요리가 만나 음식 한류를 선도하고 있으니 역시 융합의 힘은 위대하다. 극과 극이 서로 밀어 내지 않고 끌어안아 만든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