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염없이 ‘몰랐다’고 되뇌는 모습이 처절했다. 누구보다 목소리 크고 호탕하게 웃던 이는 온데간데 없었다. 지난해 말 을지로 노포에서 소주잔 기울이다 “겨우 40대 중반인데… 구조조정 대상이 된 친구들을 어떻게 보낼지 막막하다”며 “할 수 있는 게 그냥 옆에서 소주나 마시는 것뿐”이라고 미안해하던 이 차장은 그렇게 아버지를 배웅했다. 사고였다. 급히 장례식장을 찾은 떠나간 동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할 말이 마땅찮았는지 서로 손만 부벼댔다. 그리곤 서로 마주보다 크게 울었다.
발인을 앞둔 새벽은 유난히 길었다. 고요한 장례식을 비추던 달도 사라지기 싫다는 듯 꼬리를 남겼다. 3일 내내 먹는 둥 마는 둥 제대로 음식을 넘기지 못하던 이 차장이 힘겹게 소주 한잔을 털어 넣더니 중얼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좋아하시던 등산 한 번 같이 못 갔는데… 손주 놈 재롱도 아직 보여주지 못했고… 같이 할 게 한두 개가 아닌데…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해드린 게 아무것도 없어.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근데 그거 다 거짓말이야. 이렇게 술 마실 시간은 있는데 찾아갈 시간은 없었다구. 다 내 잘못인데… 억울해. 앞으로 다신 못 본다는 게 너무 답답하고 억울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던, 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그렇게 내내 억울했다. 늘 생각만 했던 일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사무쳤다. 무엇보다 60대 후반에 떠나간 아버지가 야속하고 불쌍했다. 그래서 또 다시 억울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후, 휴대폰 너머로 이 차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툭 던진 말에선 억울함 대신 아쉬움이 묻어났다.
“몰랐어요. 고맙고 부끄럽습니다….”
며칠 뒤 월악산 하늘재를 찾았을 때 그가 떠올랐다. 할아버지를 선두로 아들과 그의 아들이 두런두런 얘기하며 걷는 모습에선 그가 내뱉던 억울함이 전염됐는지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봄맞이 산행에 나선 가족들이 눈에 들어왔을 땐 더더욱,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가장 오래된 고갯길
제2중부내륙고속도로를 돌아 제천에서 충주로 들어서니 월악산 자락이 아늑하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IC를 거쳐 수안보로 빠지는 게 정석이지만 청풍호 주변의 드라이브 코스는 여간해서 건너뛰기 쉽지 않은 길이다. 게다가 이 계절엔 푸릇푸릇한 기운이 그득하니 어느 곳에 시선이 닿아도 편안하다. 최종 목적지는 제천시와 충주시, 문경시, 단양군에 걸쳐진 월악산국립공원이다. 수많은 월악산의 명소 중 하늘재 고갯길의 시작점인 세계사(寺) 앞 미륵리 주차장에 차를 댔다. 행정구역상 충청북도 충주시 계립령로에 자리한 하늘재는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대원지에서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까지 연결됐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8대 왕인 아달라왕(阿達羅王·156년) 3년에 개통됐다고 기록된, 공식적으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다.
경상북도에서 충청북도로 북진하는 길이니 당시 신라에게 이 길은 개척의 길이요, 백제와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 요충지였다. 양질의 철 생산지인 충주는 꼭 지켜야 하는 요충지였다. 당연히 혈투는 물론 삼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첨예하게 대립하던 각축장이었다. 이쯤 되면 고작 해발 525m에 불과한 고개가 하늘이라 불리는 이유가 어렴풋하다. 어쩌면 그만큼 중요한 곳이란 의미를 담은 것 아닐까.
▶짧은 거리지만 눈이 즐거운 오솔길
주차장에서 하늘재 입구에 이르는 길 주변엔 사적으로 지정된 미륵리 절터가 훤하다. 들판에 부려놓은 듯 널브러진 돌무더기는 크기부터 남다르다. 10m가 넘는 석조여래입상(보물 제96호)의 표정에선 고려시대의 간절한 불심이 느껴진다.
그 모든 애피타이저를 뒤로 하고 들어선 하늘재는 잠에서 깨어난 송계계곡의 물줄기가 청아하다. 주변의 전나무와 굴참나무는 키가 족히 20여m에 이른다. 볕이 쨍한데 바람이 시원한 건 팔 벌려 해를 가린 나무와 숲 덕분이다. 꼭대기까지 2㎞이니 가다 서다를 반복해도 족히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고갯길은 구불하지 않고 쭉 뻗었다. 그러니 같이 떠난 이들과 얘기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험하지 않은 길바닥이 시선을 멀리 둘 수 있게 도와주니 하늘과 땅, 쪽 고른 보호목의 피부까지 대화의 주제가 된다. 여기에 미리 하늘재의 역사적 의미를 공부했다면 슬쩍 아는 체하기도 좋다. 그렇다고 많은 말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주거니 받거니 얘기하다보면 어느덧 길이 저문다. 그러니 꼭 해야 할 말을 가슴 속에 담아둔 이들이라면 하늘재만한 해우소(解憂所)가 없다. 말 그대로 근심을 푸는 곳이다.
시끄러운 구석이라곤 좀처럼 찾기 힘든 공간은 새들의 천국이다. 간혹 모습을 드러낸 새들은 도심에선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희귀종이다. 고개를 반쯤이나 넘었을까. 작은 팻말에 ‘김연아를 닮은 소나무’란 글이 선명하다. 올려다보니 허리를 꺾어 팔과 다리를 모은 자세가 영락없는 선수 시절 김연아다.
숲이 끝나는 길은 포장한 길과 맞닿아 있다. 문경시 쪽에서 오르는 길은 고갯마루 가까이에 사는 주민들을 위해 아스팔트를 깔았다. 그 오른편의 나무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하늘재 정상이다. 탑처럼 우뚝 솟은 4m 높이의 비석(碑石)엔 ‘백두대간 하늘재’란 비문이 큼지막하다. 그 앞은 문경이요, 뒤는 충주다.
정상 부근에 자리한 자그마한 산장에선 잠시 쉬어가는 이들의 수다가 끝이 없다. 알록달록하게 칠한 산장 벽면엔 방문한 이들이 낙서하듯 적어놓은 사연이 빽빽하다. 친구·동료·부모·형제·아내·아들·딸에게 전한 마음은 형태는 달라도 바람이 매한가지다. 서로 통하고 싶다는… 그래야 살 수 있다는….
▶캠핑에 온천까지
짧은 산행이 아쉽다면 하루 묵어가는 건 어떨까. 하늘재에서 차로 10분이면 도착하는 ‘닷돈재풀옵션캠핑존’은 장비 없이도 야영할 수 있는 캠핑장이다. 침구세트와 취사세트까지 대여가 가능하다. 맛집을 찾는다면 덕주골이 바로 그곳이다. 버섯전골, 닭볶음탕, 더덕구이들을 내는 식당이 모여있는데, 직접 만들어 내놓는 손두부가 일품이다.
닷돈재와 반대편 길로 10~15분쯤 나서면 수안보 온천에 다다른다. 국내 최초의 자연온천이자 약 3만 년 전부터 솟아오른 천연온천수를 경험할 수 있다. 땀 흘린 후 즐기는 온천욕, 더 이상 말해 뭐할까.
▶하늘재 가는 길
서울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괴산IC에서 수안보 방면으로 나온다. 597번 지방도를 따라 제천 방면으로 이동하면 월악산국립공원이 나온다. 세계사, 미륵대원사 표지판을 따라가다 보면 미륵리사지터에 다다른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위로 오르면 샛길마냥 오롯한 오솔길 시작점에 ‘하늘재’란 표석이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