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대교를 건너니 바로 왼편에 오래된 성곽이 객을 맞는다. 지금이야 세월의 더께 그득한 그저 보기 좋은 유적이지만 300여 년 전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고 싸운 처절한 격전지(갑곶돈대)였다. 그 앞을 굽이치는 바다는 돈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뻘 그득한 물빛에 염하(鹽河)란 이름이 붙었다. 강화와 김포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바다, 좁은 물길이 강과 같다하여 불린 이름이다. 그 염하를 거슬러 해안순환도로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광성보(廣城堡)가 나온다. 사적 제277호인 이곳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 백병전이 벌어진 치열한 전장이었다. 그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에 한 겹 두 겹 세월이 더해지고 길이 놓이면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공간이 됐다. 울긋불긋 꽃 피는 계절이 돌아오면 그야말로 산책의 천국이 된다. 선조의 희생이 후손의 평안이 되는 현장…. 어린 아이와 손잡고 걷기에도 충분히 좋은 길엔 전설 같은 현실이 숨 쉬고 있다.
사면이 물이요 내륙엔 산악이 중첩된 곳, 강화도는 한강으로 들어서는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였다. 특히 외적이 침략했을 땐 더 이상 섬이 아닌, 한나라의 수도이자 왕실의 피란처가 됐다. 광성보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새 중 하나인데,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항전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한 후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이다. 뭐 하나 제대로 갖춘 것 없던 시절, 맨손으로 돌과 흙을 섞어 쌓은 성곽은 견고하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조선 광해군 시대에 헐린 곳을 다시 고쳐 쌓았고, 1658년 강화유수 서원이 광성보를 설치했다고 한다. 완전한 석성은 1679년에 완성된다.
강화도는 병자호란 이후 섬 전체가 하나의 요새가 됐다. 조선 조정은 이곳에 5진과 7보, 153개의 돈대(높은 곳에 설치한 관측소)를 설치해 군사력을 강화한다. 광성보는 그 수많은 군사시설 중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당시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격전지다. 불과 150여 년 전의 역사다.
▶격세지감, 걷기 편한 공원 그리고 산책로
피 비린내 나는 백병전의 기억은 역사의 흔적으로 남았다. 입장권을 끊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은 커다란 정문마냥 버티고 선 안해루(按海樓)다. 그 왼편에 자리한 광성돈대엔 당시 사용했던 대포와 소포, 불랑기가 복원돼 있다. 넓지 않은 원형의 돈대를 한 바퀴 돌고 나오면 안해루 오른편으로 소나무 산책길이 길게 뻗어 있다.
길은 제대로 정리한 타일이 가지런히 놓였다. 그 양쪽에 도열한 소나무는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팔로 하늘을 가려 늘어져 있다. 이채로운 건 나무의 뿌리다. 어쩌면 이름 모를 수많은 장병의 영혼을 감싸 안은 듯, 땅을 그러쥔 채로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섰다. 뿌리가 노출된, 그래서 비탈마다 계단마냥 층층이 자리 잡은 소나무는 광성보 전체에 산재해 있다. 그러니 길이 아닌 곳에 발을 내디딜 땐 행여 뿌리를 밟아 생채기라도 날까 한 번 더 돌아보게 된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손돌목돈대에선 강화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저 멀리 초지대교도 눈에 들어오는데, 염하의 폭이 생각보다 길지 않다. 병자호란 당시 왜 청군의 홍이포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당시 홍이포의 사정거리는 700m, 김포와 강화를 잇는 강화대교의 길이는 780m다.) 돈대와 돈대를 잇는 길엔 중간 중간 휴식공간이 자리했다. 미리 도시락을 준비했다면 더없이 좋은 나들이 터다. 간간이 강한 바닷바람에 머릿결이 날리지만 한가로운 풍경에 한동안 걸음을 멈추게 된다.
광성보 풍경의 절정은 누가 뭐라 해도 용두돈대다. 강화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 위에 우뚝 선 돈대는 천연 교두보다. 1679년에 세워져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됐던 곳이다. 돈대에 가려면 수십m 이어진 성곽길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 길로 들어서자마자 염하의 ‘웅웅’거리는 소리에 귀가 얼얼해진다. 마치 폭포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돈대 끝에서 염하를 바라보면 소리의 진원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커다랗게 휘돌아 나가는 물길을 큼직한 바위가 막고 섰는데, 물이 바위를 빗겨가며 내는 소리가 꽤나 웅장하다.
여기엔 전설 같은 역사가 전해내려 오는데, 사실 이 물길은 수로 폭이 좁아지면서 물살이 험하고 소용돌이가 잦아 조선시대엔 세곡미를 운반하던 선박이 수시로 난파되던 곳이라고 한다. 전설의 시작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한 왕이 전란을 피해 강화로 피난길에 오르며 ‘손돌’이라는 뱃사공의 배에 몸을 의지하게 됐다. 배가 이곳에 이르러 갑자기 물살이 위태롭자 왕이 손돌을 의심해 참수를 명했는데, 죽음을 앞둔 손돌은 “물에 바가지를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고 유언을 남겼다. 손돌의 말대로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한 왕은 잘못을 뉘우치고 손돌의 넋을 위로하며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다시 용두돈대를 빠져나와 이정표를 따라 나서면 덕진진과 초지진에 이르는 강화나들길 2코스로 들어서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걷는 이의 선택이다. 가고자 하는 이는 바다를 끼고 도는 나들길의 정취를 느낄 수 있고, 다시 안해루도 돌아 나오는 이는 쭉 뻗은 소나무의 기상을 다시금 곱씹어 볼 수 있다.
■ 강화나들길로 이어지는 광성보 산책길
갑곶돈대에서 초지진까지 이어지는 강화나들길 2코스 중 하나가 광성보길이다. 7시간 이상 걸리는 코스인데, 광성보에서 덕진진, 초지진으로 이어진 길은 아무리 길어도 2~3시간이면 넉넉히 걸을 수 있다.
강화나들길 2코스(17㎞. 6~7시간)
갑곶돈대→용진진→용당돈대→화도돈대→오두돈대→광성보→용두돈대→덕진진→초지진/온수사거리
사적 제277호 광성보
안해루, 광성돈대, 용두돈대, 손돌목돈대, 쌍충비각, 신미순의총, 신미양요 순국무명용사비 등을 품은 광성보로 들어서기 위해선 입장권(성인 1100원)을 구매해야 한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방되는데, 내비게이션으로 주소를 확인한다면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해안동로 466번길 27’로 검색해야 한다.
■ 병인양요(丙寅洋擾)
1886년 초 흥선대원군이 명한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에 이후 수개월간 프랑스 선교사 9명, 한국인 천주교도 8000여 명이 학살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랑스 측 군함 3척이 그해 9월 인천 앞바다를 거쳐 서울 근교 서강(西江)에 이르렀다. 당시 조정에선 경인연안 경비를 강화했고 프랑스 함대는 중국으로 물러난다. 하지만 10월 총 7척의 프랑스 군함과 600여 명의 해병대가 다시 서해에 나타난다. 이 중 4척의 군함과 해병대가 강화 갑곶진 부근을 점령했고, 프랑스군은 한강수로 봉쇄를 선언하고 강화성을 점령, 무기와 서적, 양식을 약탈했다. 이후 정족산성 전투에서 참패한 프랑스군은 결국 철수하게 된다. 그들은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앞서 약탈한 은금괴와 대량의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갖고 중국으로 떠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더 견고해졌다.
■ 신미양요(辛未洋擾)
아시아팽창주의정책을 추진한 미국은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과 통상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한다. 조선원정에 나선 아시아함대는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해군과 육군 총 1230명이나 됐다. 미군은 6월 10일 군함 2척을 앞세워 육군 644명을 초지진에 상륙시켜 점령했고, 이어 덕진진·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했다. 그러나 6월 11일의 광성진전투에서 미군 역시 피해가 커 이튿날 물치도로 철수한다. 미군은 이곳에서 조선을 개항하려 했으나 흥선대원군의 쇄국과 민중의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