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젠성(福建省) 룽시(龍溪) 출신인 린위탕(林語堂)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이렇듯 건전한 관념과 소박한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은 온전히 그 민남지방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산언덕에서 태어나 자란 덕분”이라고.
여기서 린위탕이 빼어나게 아름답다고 자랑하는 민남지방(閩南地方)은 오늘날의 푸젠성 지역이다. 타이완과 마주 보고 있는 푸젠성은 현재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성 중의 하나이며, 특히 샤먼(廈門)은 칭다오(靑島)와 함께 중국사람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가장 아름답고 깨끗하고 부유한 도시로 꼽히고 있어서 민남지방에 대한 린위탕의 자랑이 헛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에서 민남지방이 현재처럼 부유하고 아름다운 지역으로 떠오른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해로(海路) 트이면서 급성장
푸젠성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달리고 있는 무이산맥(武夷山脈)이 북쪽의 저장성(浙江省), 서쪽의 장시성(江西省)과 자연적 경계선을 만들고 있어서 중원문명과의 접촉이 쉽지 않았다. 더구나 기후마저 습윤한 아열대 기후여서 일찍부터 중원문명과 교류하며 역사의 중심으로 부상한 저장성에 비해 푸젠성은 상대적으로 외지고 낙후된 지역이었다. 푸젠성을 가리키는 ‘민(閩)’이란 글자에 벌레 충(虫) 자가 들어 있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중원지방 사람들이 오랫동안 야만의 땅으로 간주했던 곳이다. 이 푸젠성이 국제적인 교역과 상업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본격적으로 문명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은 송(宋)나라와 원(元)나라 때에 이르러서였다. 육로보다 해로로 접근하는 것이 더 편리하다는 지리적 문제점이 낯선 외국인들에게 교역을 허가하는 데는 오히려 적당한 장소로 부각되면서 푸젠성은 발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수(隋), 당(唐) 시기에 번성했던 양저우(揚州), 송(宋), 원(元) 시기에 번성했던 닝보(寧波)와 취안저우(泉州), 19세기 이후 번성하고 있는 샤먼(廈門)과 홍콩(香港)에서 알 수 있듯 중국의 경제적 중심이 해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는 역사적인 추세 속에서 푸젠성은 부유하고 아름다운 성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푸젠성의 취안저우에 내가 처음 간 것은 2012년 말이었으며, 다시 간 것은 2013년 5월이었다. 취안저우의 ‘해외교통사박물관(海外交通史博物館)과 개원사(開元寺)를 보기 위해서였다. 1970년대 초 내가 대학에 다닐 때 고전시가를 담당했던 정병욱 선생님은 <처용가(處容歌)>에 등장하는 처용이란 인물이 아라비아 상인일 수도 있다는 파격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당시 나는 신라와 중국과의 인적 물적 교류에 무지했었기 때문에 선생님의 그런 이야기를 뜬금없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고대인들이 만든 설화를 처용이란 인물의 외모 묘사만으로 아라비아 상인으로 간주하는 비약적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중국을 드나드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점점 커졌고, 그 때문에 신라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양저우를 여러 차례 찾았다. 그렇지만 나는 구체적인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이처럼 내가 취안저우를 찾은 첫 번째 이유는 <처용가> 때문이었다.
내가 취안저우를 찾은 두 번째 이유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 때문이었다. <고려사>에는 수도 개경에 500여 명의 송나라 사람들이 주로 장사를 목적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그 다수가 ‘민인(閩人)’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 고려와 중국의 교역은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와 푸젠성의 취안저우를 통해 이루어졌으니까 취안저우 지역 사람들 수백명이 개경에 와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구나 <고려사>에서는 거주자의 이름이 구양정(歐陽征), 임인복(林仁福), 진문궤(陳文軌) 등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틀림없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또 <고려사>의 그런 기록이 사실이라면 마찬가지로 취안저우를 중심으로 한 중국 해안지역에는 개경에 거주하던 중국 사람보다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의 송나라는 고려보다 더 문화의 보편성을 가진 나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려보다는 훨씬 풍요롭고 자유로운 선진국이었기 때문이다.
또 송나라는 고려가 거란족의 요(遼)나라나 여진족의 금(金)나라와 가깝게 지낸다고 의심하여 교역을 제한하려고 한 반면 고려는 어쩔 수 없는 입장을 해명하면서 적극적으로 교역을 추진했었기 때문이다.
무슬림 청정사
해외교통사박물관 엄청난 유물 간직
취안저우의 해외교통사박물관은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난 양의 유물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박물관의 유물들은 대부분이 취안저우 시 일대의 묘지에서 발굴된 석관과 비석 및 묘지 주위를 장식하던 석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것들을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으로 구분하여 연대순으로 배열해 놓고 있었다.
박물관에서 내가 가장 먼저 맞닥뜨린 것은 기독교도들의 묘비였다. 커다란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묘비들은 그 모양과 문양은 다양했지만 가운데에 십자가를 새기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한자로 씌어진 묘비와 라틴어로 씌어진 묘비, 경교(景敎) 계통의 묘비와 아르메니아 교회 계통의 묘비, 중국인 평신도의 묘비와 외국인 주교의 묘비, 중국화가 진전된 묘비와 그렇지 않은 묘비 등 그 다양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초원과 사막의 실크로드를 통해 이루어진 경교의 중국 전파에 대해 나름대로 상당한 지식을 가졌다고 자부하던 나로서는 묘비의 다수가 아르메니아 교회 신자들의 것임을 보면서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이루어진 기독교의 전파, 특히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의 상업 활동과 포교 활동에 얼마나 무지했었는지를 반성해야 했다.
힌두교도들의 유물실은 기독교도의 유물실에 이어져 있었으며 그 규모도 삼분의 일 정도로 작았지만 특색이 있었다. 기독교의 유물은 묘비명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단출했지만 힌두교는 사원이나 주택을 장식했던 석각 조형물과 건축물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훨씬 웅장하고 규모가 컸다. 그것은 아마도 힌두교도의 경우 화장을 했기 때문에 무덤은 없고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던 사원이나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의 주택만 유물로 남은 탓일 것이다. 취안저우의 힌두교도 유적을 보면서 나는 다시 나의 무지함을 탄식해야 했다. 나는 취안저우의 힌두교 유물을 보기 전까지는 인도문명의 상한선은 높은 산악이 남북을 가르고 있는, 북위 17도선이 지나는 베트남 중부지역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다낭 근처에 있는 참파왕국의 유적인 미션 유적이 중화문명과 인도문명의 경계선이라고 내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취안저우의 힌두교 유적은 나의 이러한 상상을 비웃고 있었다.
무슬림 유물 대규모 교역 입증
취안저우의 해외교통사박물관에서 압권은 무슬림들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었다. 별도로 마련된 이슬람 문명 전시실은 유물의 양과 유물실의 규모에서 다른 두 종교를 압도하고 있었으며, 무덤에서 발굴된 묘비명의 숫자는 당시 취안저우에 거주했던 무슬림들의 숫자가 엄청났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전시된 유물의 삼분의 일 정도가 상인의 묘비명이 아니라 고위관리들의 묘비명이란 사실은 원(元)나라가 무슬림들을 다수 중국남방 지역의 다루가치로 임명한 역사를 입증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정책에 힘입어 해상을 통해 아라비아 반도의 상인들이 대거 중국에 와서 정착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랍계통이건 중앙아시아 계통이건 당시의 취안저우에는 무슬림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고, 그런 연유로 이들의 공동묘지도 만들어졌을 것이다.
나는 이슬람 문명 전시실에서 먼저 명(明)나라의 영락제 때 대규모의 원정대를 이끌고 인도를 거쳐 아프리카에 이르렀던 정화(鄭和)를 떠올렸고 다음으로 ‘처용’을 떠올렸다. 정화의 아버지는 중앙아시아 출신의 무슬림으로 원나라 때 윈난성(雲南省)의 다루가치를 지낸 마합지(馬哈只)였으며, 그의 본명은 마화(馬和)였다. 중국의 무슬림들이 마호메트를 본 따 ‘마(馬)’씨로 성을 삼는 것처럼 그의 집안도 그렇게 마씨가 되었을 것이며, 그가 해상 실크로드의 원정 대장으로 임명된 것도 집안내력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처용가>에 등장하는 처용은 정병욱 선생의 말처럼 아라비아 혹은 중앙아시아 계통의 상인일 가능성이 많아 보였다.
일찍부터 취안저우에 이들의 출입이 이처럼 잦았다면 그들 중의 누군가는 틀림없이 신라 상인들과 접촉해서 경주까지 배를 몰고 왔을 것이다. 또 그렇게 온 사람 중의 누군가는 경주에 정착해서 아내를 얻고 정착했을 것이다.
(위)해외교통사박물관, (아래)해외교통사박물관
옛날부터 이어진 뛰어난 조각 솜씨
내가 취안저우의 개원사를 찾아간 목적은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개원사에 남아 있는 유명한 쌍탑을 보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개원사에 드나들었을 우리나라 사람들을 생각해보기 위해서였다. 중국은 온통 황토로 이루어진 대지이며 돌이 많지 않다. 그래서 중국의 북방에서 전탑이 아닌 석탑을 찾아보기는 무척 힘들다.
그런데 취안저우의 개원사에 다보탑처럼 생긴 석탑이 있다는 글을 읽고, 나는 시기적으로 비슷한, 불국사의 탑과 비교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승려 숫자만 1000여 명에 달했다는 개원사는 건축물도 대단했지만 높이 40미터에 달하는 동쪽의 진국탑(鎭國塔)과 서쪽의 인수탑(仁壽塔)이 지닌 위용이 더욱 대단했다. 더구나 두 쌍둥이 석탑의 매층에 새겨진 천왕상, 금강상, 나한상은 마치 나무를 다루듯이 돌을 너무나 부드럽고 매끈하게 다루고 있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놀라운 솜씨를 보면서 나는 이 탑 아래에 걸터앉아 나와 마찬가지로 중국문명의 높이와 깊이를 가늠했을 우리나라 사람들을 생각했다.
장사를 하러 왔던 사람,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왔던 사람, 선진적인 지식을 흡수하기 위해 왔던 사람 등 그들의 종류는 다양했겠지만 그들은 모두 당시의 우리나라에서 무척 선진적이고 모험적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이 두 탑을 만든 뛰어난 솜씨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내면에서 치밀어 오르는 문화적 자존심을 확인하기 위해 열심히 이 탑에 새겨져 있다는 지장보살 김교각(金敎覺)의 모습을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안타깝게도 시력 탓인지 세월에 마모된 조각상 탓인지 그들이 보았을 신라왕자의 성불한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