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로원을 만들 거면 시작을 하지 마라.”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1990년대 시니어타운 조성사업 기획 단계에서 삼성생명공익재단에 주문한 말이다. 단순히 노인들만 모여 있는 양로원 혹은 요양을 목적으로 하는 주거시설을 넘어 다양한 세대가 함께 어우르는 커뮤니티 문화를 만들어보라는 지시였다.
국내에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니어타운이었기에 실무자들은 북미·유럽·일본 등 다양한 선진사례들을 탐방하고 오기도 했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미국 애리조나주에 있는 ‘선시티(Sun city)’다. 마을 안에 소방서, 경찰서, 영화관, 쇼핑센터는 물론 골프장, 도서관 등이 조성돼 있다. 24시간 의료서비스는 물론 자녀가 방문하면 최대 90일간 머물 수 있는 숙소도 제공된다. 미국은 시니어타운을 단순 주거단지가 아닌 은퇴자 커뮤니티(Retirement community)로 부를 정도로 세대 간 소통을 중시하는데 그 결과 1950년대 말 시작한 선시티는 현재 인구 3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로 성장했다.
여러 선진사례를 벤치마킹해 탄생한 결과물은 2001년 개원해 운영 중인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소재 ‘삼성노블카운티’다. 555세대 규모로 세워진 노블카운티는 독립적 생활이 가능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주거시설인 타워동, 치매나 중풍 등으로 생활에 도움이 필요한 입주자를 위한 요양시설인 너싱홈, 스포츠센터와 문화센터, 주치의 서비스가 가능한 병원시설, 금융회사, 식당 등이 있는 리빙프라자 등으로 구성됐다. 주거 공간은 전용면적 50~119㎡(15~36평)까지 다양하고. 입주 보증금은 4억~12억원으로 평형 및 전망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매월 월세 75만원과 월 생활비 345만~655만원이 소요된다.
23만1400㎡의 넓은 대지에 자리잡은 노블카운티에 들어서면 아이들의 웃음소리부터 들린다. 1층 어린이집 아이들이 이어달리기를 하고 2층 워킹 트랙에서는 어르신들이 아이들을 보며 걷기운동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삼성노블카운티는 단지 내에 어린이집과 유아체능단을 운영하고 있다. 200명이 넘는 원아들은 체육시설이나 주말농장, 야외 산책로를 지나며 시니어타운의 거주민에게 손주같이 인사를 한다. 정기적으로 시니어타운 주민들과 연계해 체육행사나 안전교육 등 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수준 높은 시설과 커리큘럼으로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높아 어린이집 대기 인력이 상당하다는 후문이다. 노블카운티 안에서는 어린아이 못지않게 20~40대 젊은 사람들을 더 자주 마주친다. 실내수영장과 스포츠센터, 문화 프로그램 등도 지역 주민에게 개방했기 때문이다. 삼성노블카운티 관계자는 “입주한 시니어분들과 젊은 지역 주민 그리고 어린이 등 3세대가 함께하는 공동체를 조성해 시니어의 고독감을 해결하고 세대 간 활발한 소통을 장려한 것이 큰 특징”이라고 밝혔다.
2000년대 들어 은퇴자 인구가 늘어나고 점차 소득수준이 개선되며 단순히 오래 사는 ‘장수’가 아니라 ‘건강하고 활기차게’ 오래 사는 ‘웰에이징(well-aging)’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높은 경제력과 교육수준 등을 갖춘 액티브 시니어가 증가하면서 식사, 의료, 다양한 커뮤니티시설, 문화활동 등이 가능한 시니어타운(실버타운)이 웰에이징 라이프를 실현할 수 있는 주거지로 주목을 끌었다. 1988년 시니어타운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유당마을과 2001년 삼성노블카운티라는 모범사례를 벤치마킹해 대기업, 병원, 개인들은 시니어타운 사업에 나서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건국대학교 산하기업인 건국 AMC가 2006년 선보인 더클래식500이다. 광진구 자양동에 위치한 지하 6층~최고 50층 규모의 시니어타운인 더클래식500은 금호건설이 시공하고 건국대학교병원 교수진으로 구성된 전문의와 전담 건강관리팀이 맞춤 메디컬 서비스를 제공하며 간호사가 24시간 상주한다. 40층과 50층 건물 2개 동으로 구성돼 있고 이마트, 롯데백화점 등과 도보 통로로 연결된다. 서울 시내에 자리한 도심형 시니어타운의 대표 격으로 호텔식 생활 서비스, 야외수영장, 스파&피트니스 서비스, 커뮤니티 서비스, 식음&연회 서비스도 제공되는 것이 특징이다. 더클래식500은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입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더클래식500은 단일 평형으로 2인 기준 보증금이 9억원에 한 달 생활비는 644만원 수준이다.
지난해 7월 TV 프로그램 <구해줘! 홈즈>에 소개돼 큰 화제가 됐던 ‘서울 시니어스 가양타워’는 서울송도병원이 모기업이다. 지난 1998년 신당동 서울타워(144세대)를 시작으로 2003년 등촌동 강서타워(142세대)와 성남시 분당타워(254세대), 2007년 등촌동 가양타워(419세대), 2015년 자곡동 강남타워(95세대)를 잇달아 열었고, 2017년에는 전북 고창에 한국형 실버타운인 고창타워까지 총 6곳의 실버타운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시니어스가양타워 기준 보증금은 4억5000만원에 식사비를 별도로 내야 하는데 입주민 전용 피트니스, 골프연습장, 사우나를 제공한다.
2010년대 들어서며 무분별하게 시니어타운이 난립하기도 했다. 분양권을 팔기 위해 각종 호화시설과 서비스를 과대광고해놓고 입주 후에는 서비스와 시설활용이 줄어드는 속칭 ‘실버타운 먹튀 분양’이 활개치기도 했다. 노인복지주택으로 인가받았지만 실제로는 일반 아파트로 변질된 실버타운도 여럿 있다. 이러한 부작용이 사회문제로 불거지며 정부는 2015년부터 분양형 노인복지주택을 폐지했다. 이러한 침묵을 깨고 시니어타운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곳은 롯데건설이다. 2024년 입주 예정인 첫 번째 레지던스 ‘VL 라우어 오시리아’는 부산 오시리아 관광단지 내 한화건설이 조성하는 메디타운에 위치한다.
VL은 574세대이며, 썬시티에서 관리하는 헬스케어하우스 408세대가 함께 구성된다. 롯데건설은 서울에는 마곡지구에 ‘VL르웨스트’를 조성한다. VL르웨스트는 서울 도심 한복판 마곡 마이스복합단지에 들어서는 하이엔드 시니어 레지던스다. 전용 51~149㎡, 지하 6층 ~ 지상 15층, 4개 동 규모로 조성된다. 약 800세대 이상이 입주할 예정인 르웨스트는 롯데백화점, 롯데몰, 롯데시네마와 같은 대형 쇼핑몰 및 문화시설이 인접해 있고, 단지 내 지하 보행통로를 이용하면 축구장 70개에 달하는 약 50만 4000㎡ 규모의 ‘서울식물원’을 도보로 이용할 수 있다. 국내 굴지의 시행사인 MDM과 시공사인 대우건설이 함께하는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 일원에서 ‘백운호수 푸르지오 숲속의 아침’도 분양에 나섰다. 이곳은 지하 6층~지상 16층, 13개 동, 전용면적 99~119㎡, 총 1378실 규모로 조성된다. 이 중 주거용 오피스텔 842실을 먼저 분양하고, 이후 고품격 노인복지주택 536실을 임대로 공급할 예정이다. 이 단지는 의왕시 명물인 백운호수와 인접해 주목받는 ‘의왕백운밸리’ 내 업무복합용지 2개 블록에 조성된다. 의왕백운밸리는 2단계 개발까지 마치면 총 4000여 세대가 입주할 계획이다.
더시그넘하우스는 인천광역시 서구 청라동 일원에서 ‘더시그넘하우스 청라’를 분양할 예정이다. 지하 3층~지상 9층, 1개 동, 총 138실 규모로 조성된다.
업계 관계자는 “기존 아파트 단지와 달리 60대 이상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시니어타운이 등장하고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보일 정도로 수요층도 탄탄하다”라면서 “새로운 시니어타운들이 내부 특화 설계를 잇달아 선보이고 있는 만큼 노년층의 주거 선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라고 말했다.
[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