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겉만 보곤 모른다더니 정말 등골이 오싹했다니까.”
잘 다니던 대기업 보란 듯이 때려치우고 사업한다며 명함 찍어 돌리던 김 사장의 입에서 불쑥 다른 사람 얘기가 튀어나왔다. 중견기업 임원으로 재직하다 쫓기다시피 중소기업으로 이동한, 이미 알던 이였다.
“그 양반이 전무 하다가 쫓겨나서 규모가 훨씬 작은 중소기업에 이사로 갔었잖아. 성추행이었던가, 아니 바람이었나. 그런데 옮긴 곳에서 어찌나 사장 신임이 두터웠던지 한 1년은 친동생이나 다름없었다지 아마. 근데 요 며칠 전에 얘길 들어보니 알짜만 쏙 빼들고 날랐다는 거야.”
거의 막장드라마 같은 스토리는 대략 이러했다. 중견기업 근무 당시 같이 근무하던 여직원과 요즘 말로 ‘썸 타던’ 양 전무, 그의 사회생활에 브레이크가 걸린 건 사내에서 과도한 스킨십이 목격된 후였다.
유부남 임원과 여직원에 대한 뒷담화는 당연히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나마 잘리지 않고 옮길 수 있었던 건 그간 실적에 대한 회사의 배려 아닌 배려 덕분이었다. 옮긴 곳에선 1년간 정신 바짝 차리고 일했다. ‘사람이 달라졌다’, ‘예전 그 사람으로 돌아왔다’는 말이 돌았다. 허나 여전히 불씨가 남아 있던 썸이 문제였다.
“회사 사장은 이사가 회사 재산 빼돌린 걸 뒤늦게 알고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더라고. 칠순을 훌쩍 넘긴 어르신이라는데… 그 나이가 돼도 사람 속은 모르는 건가봐… 슬슬 직원 면접 보고 있는데, 그 얘기 듣고선 이력서에 쌓여 있는 스펙은 안 보고 있어. 모르면 가르치지 뭐.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거보다 훨씬 낫더라고. 무엇보다도 사람하고 일해야지, 요즘 그렇지 않은 것들이 많아서… 아, 사람도 안됐는데 스펙도 없는 건 아예 싫고.(웃음)”
무의도와 소무의도를 잇는 인도교
무의도 광명항 선착장
사람을 부르는 길, 그 끝에 섬이 있나니
가을하늘 공활(空豁)한데 높고 구름 없다고 했던가. 훌쩍 높아진 하늘을 짊어지고 인천 중구에 자리한 무의도로 향했다. 겉과 속이 다르기야 이곳만한 곳이 또 있을까. 나즈막한 동산의 전경도 절경이 되는 숨은 명소다.
인천국제공항을 향해 고르게 뻗은 공항고속도로에서 용유, 무의 방향으로 나서니 불어오는 바람에 살짝 짠내가 묻어났다. 톡 치면 터질 것 같은 가을 공기 그득한 서해바다는 높고, 깊고, 넓었다. 장군복을 입고 춤을 추는 것 같아 무의도(舞衣島)라 불렀다는 섬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었다. 서울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떨어져 있는, 도시와 가까운 섬이었지만 오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다. 상황이 급변한 건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고 나서다. 2001년 공항이 완공되면서 넓은 길이 났고 육지와 연결된 잠진도의 잠진선착장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놓인 무의도(큰 무리 선착장)는 도시인에게 새로운 관광지로 떠올랐다.
높은 산이나 넓은 평야처럼 확실한 랜드마크는 없었지만 무의도는 사람을 불러들였다. 그러곤 숨은 실력자가 조용히 스펙을 쌓듯 부속 섬인 <실미도>(2003)나 드라마 <천국의 계단>(2004)을 품고선 강하고 빠르게 각인됐다. 최근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 무의도 끝의 작은 섬 소무의도 또한 큰형님(무의도)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길이 사람을 불렀고 섬이 사람을 머무르게 했다. 2011년 인도교가 놓이기 전까지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거짓말 조금 보태 주말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
품안에 들어온 바다… 서해의 알프스
잠진선착장에 차를 세우고 눈앞에 잡힐 듯 자리한 큰 무리 선착장까지 배로 이동하니 버스 한 대가 사람들을 기다리고 섰다. 섬사람들의 눈이 되고 귀가 되고 발이 되는 마을버스는 일종의 ‘콜버스’다. 막배 시간에 몰려 전화로 위치를 알려주면 어디선가 짠하고 나타난다 해서 붙여진 애칭이다. 총 3대가 번갈아 운행하는데, 어느 버스를 타도 구수한 목소리가 라디오 DJ의 입담을 앞지른다. 산에 오를 건데 어떻게 가는 게 좋으냐고 물으면 어느 정거장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1시간 코스라고, 어느 곳의 경치가 좋고 어떤 경로가 힘든지 술술 이야기보따리가 풀린다.
무의도에서의 첫 기착지는 호룡곡산(虎龍谷山)이다. 소무의도 입구인 광명항 정거장에서 하차해 마을 사이로 난 좁은 길을 오르면 정상으로 향하는 비탈길이 조금씩 넓어진다. 해발 245.6m. 얽히고설킨 백두대간에 비하면 작은 동산에 불과하지만 마당바위, 부처바위, 수직절벽 등 곳곳에 절경을 품고 있는, 섬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오죽하면 서해의 알프스라 불렀을까. 산세가 험하진 않지만 정상까지 경사가 계속돼 쉬엄쉬엄 올라야 숨이 가쁘지 않다. 길 주변에는 소나무와 떡갈나무, 자작나무과인 소사나무가 빽빽해 그늘이 시원하다. 간혹 하늘이 탁 트였을 때 뒤를 돌아보면 소무의도와 서해바다, 그 뒤에 인천 송도의 스카이라인까지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진다.
뭐니뭐니해도 무의도의 제 1경은 호룡곡산 정상에서 바라본 바다다. 나무 데크로 안전하게 마무리한 정상에 오르면 왼쪽에는 서해의 관문인 인천항과 인천국제공항이, 중앙으론 서산반도가, 오른쪽엔 덕적도 너머 너른 서해바다 풍경에 눈이 시리다.
(위)무의바다누리길 전망대
걷다 쉬다 사색하다… 무의바다누리길
다시 광명항으로 돌아와 소무의도로 걸음을 옮기면 길이 414m에 달하는 타원형의 인도교가 사람을 반긴다. 폭은 넓지만 자동차가 지날 수 없는, 사람을 위한 다리다. 그러한 이유로 소무의도에선 자동차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간혹 짐을 옮기는 오토바이가 부릉대는 게 전부다.
총 면적 1.22㎢의 섬은 인천상륙작전 당시 군 병참기지로 사용되며 1960년대까지만 해도 500여 명이 거주하던 새우잡이의 전진기지였다. 하지만 그 기세는 좀처럼 불지 못했다. 지금은 동쪽과 서쪽 두 개의 마을에 90여 명의 주민이 맥을 잇고 있는데, 2011년에 다리가 놓이며 조용하던 마을에 변화가 시작됐다. 마을 어르신의 말을 빌면 “다리가 놓이기 전엔 한 해 1000명 남짓 하던 관광객이 이후엔 10만명을 넘고 있다”니 이런 게 천지개벽이 아닐까.
이러한 변화에는 섬 주변을 휘돌아 나오는 무의바다누리길도 크게 한몫했다. 143억원의 예산을 들인 인도교가 주민들의 불편사항이던 교통과 급수문제를 해결해줬다면, 둘레길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48㎞에 이르는 무의바다누리길은 탁 트인 전망과 해변, 숲길이 아름답다. 8구간으로 나뉘는 트레킹코스는 부처꾸미(당제를 지냈던 곳), 몽여해변, 몽여(썰물 때마다 드러나는 두개의 바위), 명사의 해변(박정희 전 대통령 휴양지), 장군바위, 당산과 안산(봉우리), 어촌마을, 소무의 인도교 등 곳곳에 누리 8경을 품고 있다.
주요코스는 나무데크로 마무리돼 가족 나들이에도 안성맞춤인 곳이다. 해안길과 산길이 번갈아 이어지는데, 언뜻 제주의 올레길이 연상되기도 한다. 소무의도에서 가장 높은 안산 정상에는 하도정이란 정자가 오롯한데, 저녁 어스름 무렵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낙조는 직접 경험해야 할 버킷리스트다.
길 따라 맛 따라 ♠ 승용차
서울에서 출발>방화대교>공항고속도로>용유, 무의 진입로(신불IC 지나 약 1㎞)>잠진도선착장>카페리(4분 소요)>무의도(직진 4㎞, 10분)
일산, 구리, 판교에서 출발>노오지(외곽순환도로)>공항고속도로>이하 같은 방향
인천에서 출발>북인천IC(시내에서)>공항고속도로>이하 같은 방향
제2경인고속도로를 이용하면>인천대교>인천공항방면>용유, 무의 진입로(신불IC 지나 약 1㎞)>이하 같은 방향
♠ 대중교통
버스나 공항철도를 이용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공항 3층 5번 출구에서 222번 버스(매시간 20분 출발)>잠진도선착장>카페리>무의도
♠ 소무의도 ‘해병호식당’
소무의도의 바다누리길을 휘둘러 내려오면 연도교 앞에 ‘해병호식당’이 눈에 띈다. 해군 출신 주인장이 솜씨 좋게 구워낸 전어 한 입 베어 물면 트레킹의 고단함이 단맛으로 바뀐다. 전어구이 한 접시 1만원, 소라구이 2만5000원, 자연산 회를 내는데 한상차림이 8만원이다. (032)752-2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