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곡가 샤를 구노(1818~1893년)는 문학의 감동을 주옥같은 음악으로 풀어냈다. 셰익스피어 소설 <로미오와 줄리엣>과 괴테 희곡 <파우스트>에 음악의 영혼을 불어넣어 전 세계인을 감동시켰다. 지난 10월 2~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 구노의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국립오페라단)에서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호주 출신 연출 거장 엘라이저 모신스키는 푸른 조명과 상징적인 무대로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아리아를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노래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복잡한 무대 세트를 없앴고 대신 원근법으로 무대 깊이와 거리감을 살렸다. 원작 배경인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인간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원근법이 처음 발명됐기 때문이다. 교회 중심 세계관이 무너지고 인간을 중시하는 ‘인본주의’가 널리 퍼지기 시작한 시대였다. 작가 셰익스피어도 휴머니즘을 강조했다. 모신스키 연출가는 “사람이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해야 하니까 요란한 장식이 많은 무대 세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뮤지컬은 조명과 장식으로 관객을 흥분시키지만 오페라는 아름다운 노래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객의 눈길을 뺏는 무대 세트가 없어진 덕분에 가사와 음악이 더 귀에 쏙쏙 들어왔다.
이 작품을 대표하는 줄리엣의 왈츠풍 아리아 ‘꿈속에 살고 싶어’의 의미를 찬찬히 음미할 수 있었다. 부모의 결혼 강요에 거부감을 느끼는 줄리엣이 아직은 더 꿈꾸는 처녀 시절을 즐기고 싶다는 내용이다. 서정적이면서 관능적이고 경쾌한 선율이 흐른다.
“아~. 난 아직도 더 오랫동안 나를 황홀하게 하는 꿈속에서 살고 싶어요. 달콤한 불꽃을 나의 마음속에 마치 보석처럼 간직하고 있을 거예요. 이 젊음의 황홀함은 단지 하루밖에 더 지속되지 않겠죠. 그 다음에는 눈물을 흘려야 할 시간이 다가올 거예요. 마음은 사랑에게 굴복하고 행복은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않겠죠….”
줄리엣은 로미오를 처음 만나자마자 불행을 예감한다. 로미오가 원수 집안인 몬테큐가 아들이라는 것을 안 후 “그를 너무 빨리 만났어. 증오가 그 치명적인 사랑의 요람이었다니. 이미 운명은 결정되었어. 만일 내가 그이의 여자가 될 수 없다면 무덤이 내 신혼 침상이 될 거야”라고 노래한다.
이 오페라의 백미는 사랑을 확인하는 발코니 장면이다. 두 사람의 손이 닿을 듯 말 듯하면서 간절한 사랑의 이중창을 부른다. 가사는 대담하다. 줄리엣은 “아! 당신은 밤이 나의 얼굴을 감춰주고 있다는 걸 아실 거예요. 당신은 아실 거예요. 나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신다면 순수한 내 마음이 당신에게 증명될 거예요. 헛된 여러 말들은 필요 없어요. 나를 사랑하시나요? 당신이 뭐라고 대답하실지 난 알 수 있어요”라고 속삭인다. 로미오는 “내 말을 듣고 계신 신 앞에 맹세해요. 당신에게 나의 진정한 마음을 바치겠어요”라고 화답한다. 국립오페라단 공연에서는 세계적인 테너 프란체스코 데무로와 소프라노 이리나 롱구의 절묘한 화음이 관객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랑은 결국 죽음에 도달한다. 로미오가 죽기 전에 줄리엣이 깨어나 부르는 마지막 이중창이 가슴을 저민다.
“아! 행복한 순간이에요. 당신과 함께 죽는 이 끝없고 지극한 기쁨. 함께 가요. 입 맞춰 주세요. 당신을 사랑해요.”
모신스키 연출가는 맹목적인 10대의 열애가 아니라 숭고한 사랑을 강조했다. 기존 오페라에서 줄리엣은 어리고 열정적이지만 이번에는 우아하고 희생적인 여성에 초점을 맞췄다. 로미오도 철없는 남자가 아니라 신중한 성격을 가진다.
구노는 1839년 베를리오즈의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 연주에 영감을 받아 오페라로 작곡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무려 26년이나 흐른 1865년에야 본격적인 작곡에 착수했다. 1867년 4월 27일 파리 리릭극장에서 초연한 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
오페라 <파우스트>는 세기의 걸작
구노의 또 다른 대표작은 1859년에 발표한 오페라 <파우스트>다. 독일 대문호 괴테가 60여 년에 걸쳐 완성한 원작은 인간의 본능과 이성의 충돌을 담고 있다. 그 무게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모든 학문을 섭렵해 우주의 이치를 깨달은 파우스트는 백발노인이 되자 모든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자살하려 한다. 이때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나 젊음과 영혼의 거래를 제안한다. 파우스트는 향락과 도덕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모순적 인간이다. 방황하던 그를 구원한 것은 순결한 처녀 마르그리트와의 사랑이다. 파우스트가 그녀의 집 앞에서 부르는 아리아 ‘정결한 집’, 마르그리트가 물레 앞에 앉아 실을 감으며 부르는 아리아 ‘툴레의 노래’가 가장 유명하다. 사랑을 고백한 두 사람이 부르는 이중창 ‘오! 사랑의 밤이여’도 진한 여운을 준다.
1859년 리릭 극장에서 초연했을 때는 실패했다. 구노는 포기하지 않고 수차례 고쳐 1869년 파리 오페라하우스 무대에 다시 올렸다. 화려한 왈츠와 축제, 발레 장면이 청중을 열광시켰다.
마녀들이 요염한 춤으로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누비아 여인의 춤’, ‘클레오파트라와 금잔’, ‘트로이의 여인들’ 등 관능적인 발레 향연이 관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1893년 구노가 숨을 거두기까지 무려 2000회 넘게 공연됐으며 외국 무대에서 러브콜도 받았다.
프랑스 오페라의 자존심 지킨 작곡가
구노는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들이 점령한 프랑스 음악계에서 존재감을 과시한 작곡가다. 이탈리아 작곡가 도니제티(1797~1848년)와 로시니(1792~1868년), 독일 작곡가 마이어베어(1791~1864년)가 당시 프랑스 오페라 극장들을 꽉 잡고 있었다. 그러나 구노의 <파우스트>와 <로미오와 줄리엣>이 상황을 역전시켰다. 마이어베어와 모차르트,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자기만의 프랑스 오페라를 창조했다. 프랑스인 특유의 아름답고 낭만적인 선율을 추구했으며 절제와 조화를 중시했다. 물론 이탈리아와 독일 양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독일 교회 음악의 장엄함과 유연한 이탈리아 선율에 프랑스적 관능미를 결합했다. 1864년 초연한 오페라 <마레유>는 프랑스 민속 음악 어법으로 프로방스 지역색을 담았다. 그의 가곡 <세레나데>도 프랑스 특유의 낭만으로 넘실거린다. 그는 교회 음악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BWV 846 중 전주곡 1번 다장조에 멜로디를 붙인 ‘아베 마리아’가 유명하다. 성모송을 가사로 담은 가곡 중에서 가장 많이 불린다. 1853년 구노의 장인 피에르 치머만이 구노의 연주를 편곡해 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종교 음악을 쓴 이유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가톨릭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올 뻔했다. 건강이 안 좋고 작곡에 전념하고 싶어 여행을 포기했다. 그가 조선에서 순교한 앵베르과 샤스탕 신부를 전송하는 그림이 파리 외방전교회 성당에 남아 있다. ‘아베 마리아’ 외에도 ‘장엄미사’와 ‘성녀 체칠리아 미사’ 등 종교 음악이 사랑을 받았다.
오페라와 종교 음악, 가곡 넘나들며 명곡 남겨
구노는 1818년 6월 1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음악적 재능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다. 아버지는 저명한 화가였지만 그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아들의 천재성을 일찍 알아본 어머니 덕분에 1836년 파리 음악원에 진학해 대위법과 작곡법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1839년 칸타타를 작곡해 로마 대상을 수상한 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3년 동안 로마에 머물면서 신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미사곡을 작곡해 로마에서 초연했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파리에 돌아온 후에는 외방전교회 성당 오르간 연주자가 되어 종교 음악에 전념했다. 하지만 화려한 오페라에 관심이 갔다. 친구였던 가수 폴린 비야도르의 부탁으로 1851년 첫 오페라 <사포>를 작곡했다. 레즈비언의 유래가 된 고대 그리스 레스보스 섬의 서정시인 사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었지만 대중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절치부심한 그는 오페라 <벼락치기 의사>(1858년)와 <파우스트>(1859년)를 연달아 발표하면서 정상급 작곡가 반열에 올랐다. 1867년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큰 성공을 거둔 후부터 다시 종교 음악으로 관심이 기운다. 오라토리오 <속죄>와 <삶과 죽음> 등 명곡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는 1870년 52세 때 보불 전쟁이 터지자 파리를 떠났다. 5년 동안 런던에 거주하면서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이곳에서 구노 합창단을 만들어 앨버트 협회 합창단(왕립 합창협회) 기초를 세웠다. 구노처럼 오페라와 종교 음악, 가곡에서 골고루 중요한 업적을 남긴 작곡가도 드물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면서 서정적이면서도 엄숙하고 품위 있는 선율을 만들었다.
아름다운 음악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그는 죽은 손자를 위한 <레퀴엠>을 완성한 직후인 1893년 10월 18일 파리 교외의 생 클루에서 뇌졸중으로 마지막 숨을 거뒀다.
[전지현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