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건사고에서 법원의 최종판결은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 형사사건은 물론이고 재산권분쟁, 소유권분쟁, 상속분쟁 등 온갖 민사분쟁사건에서도 법원의 판결이 곧 결론이다. 하지만 분쟁이 일었을 때 법적 권한이 없는 민간인의 ‘의견’이 법과 거의 동등한 권위를 갖는 분야가 있다. 바로 미술시장이다. 미술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주관적인 요소들이 많이 작용하는 것처럼, 작품 진위를 가리는 것도 전문가의 안목과 의견에 많이 의존하기 때문이다.
전문가 ‘의견’이 ‘법’ 수준 권위
미국에서 1993년에 있었던 유명한 ‘칼더 케이스’라는 사건이 있다. 딜러 A씨가 세계적 아티스트 알렉산더 칼더(1898~1976년)의 모빌 조각을 샀는데, 사고 나서 보니 진품이 아닌 것 같다며 “매매계약을 무효로 해달라”는 소송을 걸었다. 그 조각 작품을 원래 가지고 있었던 원소장자와 그 작품의 판매를 중개한 딜러 B씨에 대한 소송이었다.
A씨가 증거로 낸 것은 칼더를 전문으로 다루는 펄스 갤러리를 운영하는 클라우스 펄스(1912~2008년) 대표의 의견이었다.
펄스 대표가 이 작품이 자신의 갤러리가 가지고 있는 기록사진과 비교했을 때 형상이 많이 다르다며 이 작품이 칼더의 진품이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칼더는 ‘움직이는 조각’인 ‘모빌(Mobile)’을 창시한 조각가로 잘 알려져 있는 세계적인 작가다. 그의 작품 스타일은 사람들의 눈에 익숙하지만, 철판과 철사로 제작한 그의 입체조각 진위를 판단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
이 사건에서 법원은 펄스 대표의 ‘위작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이 작품을 판매한 B씨 측이 제시한 다른 전문가의 의견을 훨씬 타당하게 받아들였다.
펄스 대표는 이 작품을 잠깐 본 것에 지나지 않지만, B씨 측 전문가는 이 작품을 더 오랫동안 관찰했고 이 작품에 새겨져 있는 칼더의 서명도 객관적인 증거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법원은 이 작품이 진품이라고 보았다. 결국 법원은 ‘객관적 증거’를 바탕으로 이 작품을 진품이라고 결론냈다. 그래서 “가짜인 것 같으니 매매계약을 취소해달라”는 A씨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 작품을 판매한 B씨는 계약 대로 50만달러를 작품값으로 받았다.
하지만 그 작품을 울며 겨자 먹기로 구입한 딜러 A씨는 시장에 다시 파는 것이 아예 불가능해졌다. 법원이 아무리 ‘확실히 진품’이라고 했어도, 칼더의 가장 권위 있는 전문가인 펄스 대표가 ‘진품이 아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한 딜러의 의견이 법원보다 위에 있는 것이다. 게다가 칼더 작품을 총체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칼더재단’이 펄스 대표의 의견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칼더의 ‘카탈로그 레조네’에 싣지 않겠다고 해서 문제는 더 커졌다. 카탈로그 레조네는 미술작가의 전체 작품의 이미지와 제목, 재료, 크기 등 상세한 정보를 싣는 ‘전작도록’이다.
카탈로그 레조네에 들어가 있는 작품은 당연히 진품이라는 증거다. 미공개작이거나 기타 다른 이유로 카탈로그 레조네에 빠진 진품도 있을 수 있지만, 아무래도 카탈로그 레조네에 들어가 있지 않으면 진위 시비에서 불리하다.
칼더재단에서 발간한 칼더의 카탈로그 레조네에서 빠졌으니 이 작품이 시장에서 정상적으로 칼더 작품으로 대접 받기는 어려워졌다.
이중섭 - 어린이와 새와 물고기
‘소장기록’이 보증서보다 중요
미술시장의 특성상 어떤 서류 한 장보다 전문가들의 시각과 의견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니 결국 그림을 사고파는 컬렉터 입장에서는 어떠한 서류나 보증서 한 장보다도 ‘소장기록(provenance)’을 챙기는 게 가장 중요하다. 누가 처음 소장했었고 누구의 손을 거쳐 여기까지 온 작품인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소장기록이다. 쉽게 말해서 어떤 컬렉터가 그림을 팔겠다고 경매회사나 갤러리에 연락하면 그들은 보증서를 보여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소장기록을 보여달라고 한다. 보증서는 위조할 수 있지만, 소장기록은 위조하기도 어렵고, 위조해도 잘 드러난다.
우리나라에서 미술작품의 진위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가장 유명한 두 개의 사건인 ‘이중섭 위작 사건’과 ‘박수근 빨래터 사건’을 봐도, 미술품 진위 분쟁에서 전문가들의 의견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 두 사건은 법원 판결 결과가 각각 정반대였지만, 둘 다 수사 과정에서 전문가들의 의견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먼저 이중섭 위작 사건. 2005년에 우리 미술계뿐 아니라 나라 전체를 시끄럽게 했던 사건으로 법원에서 ‘위작’이라고 판결을 내리고 마무리되면서 크게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당시 서울옥션을 통해 한 컬렉터에게 3억2000만원에 팔렸던 이중섭의 수채화 <물고기와 아이>에 대해 한국미술품감정협회에서 ‘진품이 아닌 것 같다’고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대해 유가족과 그림 원소장자 측이 반발하고 감정협회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하자 검찰은 수사에 들어갔다. 결국 법원에서는 이 그림을 포함해 문제가 되었던 이중섭과, 박수근의 그림 58점에 대해 모두 ‘위작’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세기의 위작사건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이때 검찰에서 수사를 할 때 가장 의존했던 증거가 바로 갤러리 딜러 등 미술계 전문가들의 감정 결과였다는 점이다.
다시 검찰은 장안에 잘 알려진 이중섭 그림 전문가들은 죄다 불러 문제가 된 그림을 보여주고 진위여부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미술품 위작 수사 때에는 이런 과정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가 고(故)이중섭과 박수근 화백의 작품이라고 주장되던 그림들이 어떻게 해서 가짜로 판명됐는지 설명하고 있다.
법원 판결도 ‘전문가 의견’ 바탕으로
이 사건과 반대로 ‘박수근 빨래터 사건’은 법원이 ‘진품’으로 판결내면서 마무리가 되었다. <빨래터>는 2007년 서울옥션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돼 당시로서 국내 미술경매 역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던 그림이다.
하지만 그림이 팔리고 약 1년 뒤 미술 월간지 아트레이드가 <빨래터>의 위작 의혹을 제기했다. 서울옥션은 곧바로 미술품감정협회에 감정을 의뢰해 ‘진품’ 감정서를 받아냈다. 그리고 위작의혹을 제기한 아트레이드 측에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다. 법원은 약 2년 동안 진행된 재판 과정을 통해 <빨래터>가 진품이라고 판결 내렸다. 이때 법원이 증거로 내세운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과학 감정 결과였고, 또 하나 더 중요했던 증거는 바로 ‘소장기록’이었다. 그림의 원소장자였던 미국인 존 릭스가 1954~1956년 한국에 근무할 때 소장하게 됐다고 진술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림은 진품이라고 판정을 받았지만 정작 소송의 본질이었던 ‘손해배상 청구’에 대해서는 서울옥션 측이 진 것이다. 법원은 이 그림이 진품이지만, 월간지 아트레이드가 위작 의혹을 제기한 것에 대해서는 정당한 언론활동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트레이드 측의 손해배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법원은 서울옥션 측이 위작 의혹 기사가 나오기 전까지 구체적인 감정결과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술잡지로서는 위작 의혹을 제기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설득력이 있다. 그럼 궁금해진다. 도대체 서울옥션은 왜 그런 의혹기사가 나오기 전에 진작 미술품감정협회의 감정서 같은 객관적 자료를 제시하지 않았을까? 이 또한 미술시장의 독특한 특징 때문이다. 처음 이 그림이 나왔을 때부터 박수근의 장남을 비롯해 많은 전문가들이 의심 없이 박수근의 작품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서울옥션은 굳이 ‘진품이라는 서류’ 즉, ‘보증서’를 구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경매를 진행했던 것이다. 미술시장에서 법보다 더 확실하게 통하는 게 전문가들의 ‘안목’이니까 당연히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미술시장 역시 시장이지만, 사람의 안목과 주관적인 의견도 워낙 중시되는 예술품이다보니 독특한 특징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보증서나 서류보다 소장기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서류상으로 아무리 화려해도, 기록상으로 아무리 ‘진품’이라는 증거가 있어도, 전문가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면 시장에서는 거래가 될 수 없는 ‘시체 작품’이 된다. 그래서 컬렉터 입장에서는 전문가들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소장기록’을 갖고 있는 게 가장 든든하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9호(2014년 10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