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어서 정치나 경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럼에도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은 나에게 자주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인가, 자본주의 국가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이유는 아마도 첫째는 자신이 본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라고 믿어지지 않아서일 것이고, 둘째는 중국에 자주 드나드는 내가 좀 더 시원한 이야기를 해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나는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 개방 정책이 만들어낸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다.
90년대 사회주의 실감
내가 중국을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부터였다. 당시의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을 시시각각 실감할 수 있는 나라였다. 가이드는 공무원이었고, 여행사는 국영이었으며, 숙소도 호텔보다 초대소일 경우가 많았다. 식사를 하는 것도, 물건을 사는 것도, 화장실에 가는 것도 국가에서 운영하는 장소에 가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당시의 중국은 국가가 모든 사람에게 직장을 마련해 주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화장실 앞에도, 공원입구에도, 기차역 광장에도,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도 완장을 차고 자기 직분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어디를 가건 완장 찬 사람들로부터 자주 야단을 맞으면서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을 시도 때도 없이 실감해야만 했었다.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가장 실감하는 거의 유일한 장소는 천안문 광장이다. 오성홍기(五星紅旗)가 휘날리는 광장의 중심부에 서서 천안문 중앙에 걸려 있는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와 그 왼편에 ‘중화인민공화국 만세(中華人民共和國萬歲)’라고 크게 써놓은 글씨를 마주하게 되면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중국의 공식명칭이 ‘중화인민공화국(The People’s Republic of China)’이란 사실을 눈으로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천안문 광장을 벗어나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가면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을 느낄 요소는 많지 않다. 마주치는 풍경 대부분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위력을 보여주는 슈퍼마켓과 패스트푸드점의 인파, 주식과 부동산에 대한 사람들의 열정적 관심, 별장과 골프장을 선전하는 요란한 광고판, 사무실 근무자와 현장 노동자의 출퇴근 행렬, 떠돌이 농민공들로 북적이는 기차역, 고급아파트와 서민아파트의 선명한 대비 등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재의 중국에서 시장경제의 위력을 보여주는 것들은 눈앞에 즐비한 반면 그것들을 기획하고 제어하는 공산당과 행정관청은 자본주의적 풍경의 이면에 조용히 숨어 있다.
중국 당국은 중국이 현재 걸어가고 있는 길을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다시 말해 ‘중국식 시장경제 체제’ 라고 말한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에 대해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로 대표적 인물인 남경대학의 장이빈(張異賓) 서기는 나에게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이다. 서방 국가 중에도 자기 현실에 맞는 사회주의를 모색하는 국가가 있는 것처럼 중국은 중국의 현실에 맞는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하고 있다”고 그는 거침없이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에서 ‘중국 특색’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로 광대한 영토와 생활수준의 차이를 들었다. 중국은 남과 북, 해안지역과 서부지역 사이에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빈부의 격차가 있고,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만들어내는 생활수준과 수많은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통제하고 조절하며 발전해 나갈 수밖에 없다고 그는 힘주어 강조했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는 바로 그 통제와 조절의 필요성이 만들어낸 이념이자 체제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날로 심각해지는 빈부격차 문제에 대해 그는 “축적된 자본을 가지지 못한 중국이 발전의 기본적 에너지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시적 부산물일 따름이며, 중국 정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앞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장이빈 서기의 설명은 명쾌하고 논리적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중국의 경우 장이빈 서기가 강조한 자연적 조건과 현실적인 필요성에 못지않게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우리 인간은 개인이건 집단이건 참담한 좌절을 맛보지 않고는 자기 고집을 쉽사리 꺾지 않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가 하루아침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실패에 대한 역사적 경험에서 등장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자면 장이빈 교수 앞에서 중국공산당의 오류를 지적해야 했다. 1949년 중국공산당이 승리한 후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해 나가는 과정에서 저지른 참담한 실패들을 먼저 지적해야 했다. 그런데 손님의 입장에서, 또 나를 따뜻하게 맞아준 중국공산당의 핵심 이론가 앞에서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질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은 대재앙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후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을 엄청난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1958년부터 1960년 초까지 계속된 대약진운동과 1966년부터 1976년까지 계속된 문화대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첸카이거(陳凱歌)감독의 <패왕별희(覇王別姬)>란 영화 덕분인지 문화대혁명의 무질서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대약진운동의 끔찍함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다. 중국 사람들이 3년간의 대재앙이라고 부르는 대약진운동은 3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희생자의 수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수십 배 능가하는 끔찍한 운동이었다. 대약진운동으로 말미암아 굶어죽은 사람의 수가 적게는 2000만명에서 많게는 3000만명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당시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대약진운동의 기원은 마오쩌둥이 1956년 8월을 기해 전국적으로 설립하기 시작한 인민공사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오쩌둥은 이 운동의 초기에 농민을 군대처럼 생산대대(生産大隊)라는 단위로 조직한 다음 ‘인민공사’화함으로써 상당한 생산증대 효과를 거두었다. 그렇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생산대대 사이의 초과달성 경쟁이 엄청난 허위보고로 이어지면서 이 운동은 거꾸로 농촌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은 제2차 5개년 계획의 생산 목표를 1958~1959년 2년 동안에 달성했다는 자신감으로 1960년 ‘대약진운동’을 시작했다.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인생(人生)>에서 생생하게 보여주듯이 철강생산에서 7년 내에 영국을, 8년 내에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목표를 설정한 후 농촌의 인력을 강제로 도시로 차출했을 뿐만 아니라 생산대대마다 용광로를 만들어서 철강생산을 하도록 독려했다. 그 결과 도시에서는 생필품 공급부족이 심각해졌고, 농촌에서는 농기구까지 용광로에 넣어 녹이면서 초과달성을 보고하는 경쟁이 이어졌다. 여기에 연이은 자연재해로 인한 흉작까지 겹치면서 중국 땅은 순식간에 수천만 명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하는 생지옥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은 1966년에 다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중국대륙 전체를 10여 년 동안 파괴와 무질서 속으로 몰아넣었다. 자신이 대약진운동으로 망쳐놓은 민생경제를 류사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이 자본주의 정책의 일부를 채용하여 되살려 놓자 최고 권력의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이 자본주의자들을 타도하라고 철없는 청소년들을 선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소녀 홍위병이었으며 후일 영국에서 『대륙의 딸』이란 자서전을 쓴 장룽(張戎)은 문화대혁명을 가리켜 “끊임없이 대립과 갈등을 일으켜 엄청난 고통과 죽음을 가져온 권력투쟁”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그리고 하루하루의 생존마저 힘겹게 만들면서 오로지 마오쩌둥 우상숭배로 흘러간 이 광기에 찬 혁명에 대해 “혁명의 대의를 성취한 후 최고 권력자가 권력을 사유화하여 자신을 신격화할 때 그 혁명은 바로 무서운 재앙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장룽의 말처럼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수많은 문화재를 파괴하고, 중국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첸인커(陳寅恪), 펑요우란(馮友蘭), 지셴린(季羨林) 등에게 씻을 수 없는 수모를 안기고, 중국의 발전을 20년 이상 지체시킨 대재앙이었다.
덩샤오핑 시장경제 접목
마오쩌둥이 죽자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생산력 발전에 유리한가 여부가 판단 기준이다”라는 과감한 주장을 내세우면서 중국은 계획경제이건 시장경제이건 경제 발전에 유리한 길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 덩샤오핑의 이러한 발언은 명백히 인민공사를 만들어서 전 인민의 생활수준을 동일하게 만들려고 했던 마오쩌둥 노선의 부정이며, 전 인민을 프롤레타리아 의식으로 무장시키려고 했던 문화대혁명 정신의 부정이다. 덩샤오핑은 대약진운동의 생산력 저하가 야기한 참혹한 아사와 문화대혁명의 평등주의가 야기한 심각한 경제후퇴를 인민과 함께 겪은 사람이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시장경제는 덩샤오핑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중국인민의 역사적 경험이 만들어낸 필연적 귀결이다.
1979년 11월 덩샤오핑은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중국은 “계획경제를 위주로 하여 시장경제를 결합시켰다”고 말했다.
그리고 1990년 12월에는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으며, 자본주의에도 계획에 의한 통제가 있다”고도 했다. 덩샤오핑의 이러한 말에는 물론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나에게는 그러한 전제보다는 ‘시장경제’ 쪽에 훨씬 무게가 실린 것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는 덩샤오핑이 선부론(先富論)을 내세우며 마오쩌둥의 평등주의를 타파했기 때문이다. 일부 지역의 경제가 먼저 발달하거나 일부 주민의 경제가 먼저 부유해지는 일, 다시 말해 빈부격차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부정적 현상도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덩샤오핑이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일까, 자본주의 국가일까? 그 답은 우리 스스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