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참 애매하다. 한 해를 여는 1월도 아니요, 한 해를 마감하는 달도 아니다. 잔인한 4월, 계절의 여왕 5월, 같이 특별한 애칭이 붙은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이도 저도 아닌 11월이다.
이러니 나들이 코스도 어중간하다. 만추(晩秋)에 홍엽(紅葉) 나들이 가자니 단풍이 훅 져버린다. 그렇다고 눈꽃(雪) 트래킹 운운하기엔 너무 빠르다. 자, 이럴 때 요긴한 게 둘레길이 아닐까. 둘레야말로 어정쩡하다. 산 정상을 오르내리는 트래킹도 아니요, 그렇다고 핵심 콕 찍는 길도 아니다. 오죽하면 이름이 ‘둘레’일까.
그런데 이게 끝내준다. 정확함과 핵심만 요구하는 이 시대 한번쯤 이렇게 둘레길 걸으며 멍 때리는 것, 이런 게 삶의 여유, 여백 아니겠는가. 핵심 못 찍고 변죽 좀 울리면 어떤가. 인생, 너무 타이트 하게 사는 거 그것만큼 삭막한 거 없다.
강화, 그 둘레를 걷다
길마다 물이 오를 때가 있다. 강화의 둘레를 걷는 ‘강화 나들길’. 속 꽉 찬 대하살 만큼이나 탱글탱글, 살이 오를 때가 11월이다.
강화의 길엔 리듬이 있다. 느릿느릿 중모리 리듬인가 하면 자진모리 휘모리로 빨라지고, 그러다 다시 슬금슬금 느려진다. 그 엇박의 리듬을 따라, 그 틈새를 따라 문화, 역사, 맛이 버무려진다. 이거 끝내준다. 갓 구워낸 달달한 대하살 맛이다.
강화 나들길의 첫 번째 코스는 ‘심도 역사 문화길’ 다. 그 시작점이 천년을 넘나드는 용흥궁(龍興宮)이다. 용흥궁은 조선 제25대 임금인 철종(재위 1849~1863)의 잠저다. 여기서 잠깐 잠저의 의미. 정상 법통이 아닌 다른 루트로 임금에 오른 이가 궁으로 옮기기 전 살던 거처다. 용흥은 철종이 13세부터 18세까지 산 곳이다. 당시에는 초가였으나 1853년(철종 4) 강화 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지금과 같은 집을 짓고 용흥궁이라 불렀다. ‘용이 승천한 궁’이라니. 그러고 보니 ‘딱’이다.
용흥궁의 뒷문은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으로 이어진다. 고종 33년(1896년) 김희준이 강화도에서 처음 세례 받은 것을 계기로 1900년 세운 한국 최초의 성공회성당이다. 11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아직 견고한 느낌이다.
고려궁지를 지나 송학골 빨래터를 지나는 길은 호젓한 숲길이다. 걷기엔 지금만큼 적당할 때도 없다. 푹신푹신 밟히는 낙엽길. 솔방울도 이리저리 뒹굴며 늦가을을 아쉬워한다. 농로와 신작로를 지나 도착하는 곳은 연미정이다. 삼포왜란 당시 왜적을 무찌르고 함경도 야인(野人)을 진압한 황형(黃衡)장군에게 조정에서 하사한 정자다.
서울로 가는 배들은 만조가 될 때까지 이 정자 아래에서 기다렸다 하는데, 달빛 절경이 으뜸이어서 강화 팔경의 하나로도 꼽힌다. 이 길은 16km구간으로 2시간 30분~3시간 정도가 걸린다.
2코스부터는 리듬이 빨라진다. 변화무쌍한 해안길이다. 이름은 ‘호국돈대길’. 강화도 동편을 에두른다. 이 길엔 늘 갯내음이 풍긴다. 입맛엔 짭쪼름한 맛이 돌 정도. 장어구이 촌도 놓치지 말자.
이 가을 백미는 3코스다. 이름 하여 ‘능묘가는 길’. 강화 나들길 여덟 코스 중 늦가을 가장 빼어난 풍모를 자랑하는 단풍의 명소다.
이 길의 리듬은 앙증맞다. 스타카토처럼 톡톡 끊어지는 굴곡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길은 모양새도 영판 올록볼록하다. 길을 따라 봉긋 봉긋 솟은 릉 때문이다. 남한 땅에서 고려 왕릉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헌데 강화에는 고려시대의 왕릉이 다수 있다. 전등사 동문에서 출발해 삼랑성, 온수리 성공회성당, 길정저수지, 이규모 묘 등을 지나 곤릉, 석릉, 가릉에 이르는 18km를 이어진다. 5~6시간 걸리니 꽤나 긴 코스다.
특히 이 코스의 포인트는 능묘와 능묘 사이. 호젓한 숲길이다. 이맘때, ‘사각사각’ 흥겨운 부빔의 소리를 내는, 가을 억새까지 분위기를 돋운다. 전등사를 둘러보는 짧은 코스도 있으니, 기자처럼 걷기가 싫은 분들은 이 코스를 찍으면 된다. 울긋불긋한 단풍과 어우러져 한 폭의 붉은 유화처럼 자리 잡은 전등사 전경도 포인트다.
반전 매력 한라, 그 둘레길
제주 한라는 계절을 닮는다. 어정쩡한 11월, 어김없이 두 얼굴이다. 한 편은 바싹 마른 만추(晩秋)요, 다른 한 편은 눈 시린 설국(雪國)이다. 당연히 산의 맛을 제대로 아는 여행 고수라면, 11월 말께 꼭 한라를 찾는다.
먼저 설국 한라부터 스타트. 이맘 때 한라의 바람, 꽤나 매섭다. 정말이지 날선 면도날이다. 굳게 닫힌 땀구멍, 팍팍 잘도 베어낸다. 빠르면 11월말 설국 한라를 볼 수 있는 포인트, 1700m 고지. 선작지왓 평원이다. ‘선’은 제주 말로 ‘서있다’는 의미다. ‘작지’는 돌이요, ‘왓’은 밭이다. ‘작은 돌들이 서 있는 들판’이라. 둘러보니 그렇다. 원래 이곳은 돌밭이다. 그 위에 눈이 차곡차곡 덮는다. 매서운 칼바람은 그 눈밭 위를 훑고 지난다.
설국을 감상한 뒤 하산 코스는 돈내코 쪽. 예서부터 둘레길 탐방을 이어가면 된다.
‘반전 매력’의 늦가을 한라 둘레길은 꽤나 길다. 일제강점기 병참로(일명 하치마키 도로), 임도, 목장길 등 아기자기한 구간을 거치는 80km 장도로 이어진다. 이 애칭이 ‘환상(環狀) 숲길’. 한라의 허리를 한 바퀴 돈다는 의미인데,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11월, 제대로 물이 오르는 길은 서귀포시 서호동 시오름에서 자연휴양림 사이까지 9km 코스 구간이다. 시오름에서 시작해 서귀포시 자연휴양림을 거쳐 1100도로∼한라생태숲∼제주절물휴양림∼사려니숲길∼수악교∼돈내코 상류까지 이어진다. 편백과 삼나무, 동백이 숲을 이루니 지루할 틈이 없다.
만추의 절경을 간직한 곳 절물 자연휴양림이다. 올레의 그늘에 묻히긴 했지만, 매년 60만명 이상이 다녀가는 ‘소리 없이 강한 명소’다. 국내 휴양림 가운데 최다 방문객 기록을 세운 곳도 이곳이다.
여기는 드라마, 영화 촬영의 단골 명소로도 유명하다. SBS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와 ‘거상 김만덕’, ‘김수로’ 등 드라마의 촬영지이며, 영화 ‘하녀’와 각종 뮤직비디오, 잡지 화보 촬영이 이뤄졌다.
하이라이트는 산굼부리 근처 장생의 숲. 이 숲길은 글자 그대로 소중한 건강을 되돌려 주는 향긋한 숲길이다. 300㏊의 면적에 40∼45년생 삼나무가 수림의 90% 이상을 뒤덮는다. 그러니 명상과 치유의 숲길로 알려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휴양림 내엔 볼거리도 많다. 숲속의 집과 산림 문화 휴양관, 약수터, 연못, 잔디광장, 맨발 지압 효과가 있는 산책로 등 다양한 코스가 숲길 내내 등장한다.
샤려니 숲길도 명품이다. 한라산 국유림을 통과하는 이 코스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다녀가면서 더욱 유명해 진 길이다.
사실 이렇게 코스 딱딱 정해놓고 가는 거, 별 의미가 없다. 사실 둘레라는 것 자체가 핵심을 벗어난 그 주변이라는 뜻이지 않은가.
그래. 까짓 거, 머릿속 비우고 생각도 지우고 그저 길 따라 놀멍쉬멍, 꼬닥꼬닥 걷어보시라. 그렇게 럭스멘 독자들만의 둘레길, 한번 만들어보시라.
둘레길 여행 Tip 강화 나들길 100배 즐기기*요긴한 웹사이트
•강화군청 www.ganghwa.incheon.kr(032-930-3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