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대개 하루 24시간의 3분의 1은 노동하는 데 쓰고, 3분의 1은 잠자는 데 쓰고, 나머지 활동에 3분의 1을 소비한다.
노동하는 데 쓰는 3분의 1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 사람이 마르크스고, 잠자는 3분의 1의 메커니즘을 규명한 사람이 프로이트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 인간은 먹고 마시고 만나고 즐기고 꾸미고 사랑하고 공부한다. 바로 이 나머지 3분의 1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 사람이 프랑스의 세계적인 석학 피에르 부르디외다. 그의 저서 <구별짓기>의 한국어 번역서는 1000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이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여가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 됐다. 부르디외가 간파한 것은 이 나머지 3분의 1의 시간이 갖는 가치다.
이 시간은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받고, 끊임없이 자신의 소속감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이 여가시간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고 경제적이다. 이 시간이야말로 인간을 구별짓는 시간인 셈이다.
예를 들어 난해하고 기품 있는 클래식 음악은 소득과 교육 수준이 높고,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흥겨운 일인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졸음을 몰고 오는 수단에 불과할 수도 있다. 서울 강남 노래방에서 많이 불려지는 노래와 시골 소읍에서 불려지는 노래는 다르다. 또 도시에서 팔리는 화장품과 시골에서 팔리는 화장품도 다르다. 음식과 패션, 집 꾸미기 역시 마찬가지다. 문화는 이처럼 매우 경제적인 ‘구별짓기’다. 그 어떤 행위보다 계급적이다.
투표권을 생각해보자.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이나 돈 많고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이나 구별 없이 투표권은 한 장이다. 그러나 문화는 결코 똑같은 한 장을 허용하지 않는다.
부르디외는 여가가 중요시되면서 양반문화와 상놈문화가 오히려 더 정교하고 세밀하게 재생산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부르디외의 말대로라면 정치적 평등이나 경제적 분배보다 더 불가능한 것이 문화적 평등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대중가요는 유난히 목숨 건 사랑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
한국인에게 사랑은 ‘단 하나의 목숨을 거는 일’이거나 ‘이 생명 다 바쳐서 죽도록’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실제로 사랑 때문에 죽었다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한국인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이 그만큼 극단적이라는 말이다.
이 같은 알량한 목숨 걸기는 사회 어디에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필사적인 단어들을 입에 담는다.
“목숨 걸고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느니 “이 자리에서 죽을 각오로 법안 통과를 저지하겠다”느니 하는 말은 이제 식상할 정도다. 물론 목숨 바친 정치인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국민이나 언론도 마찬가지다. 무엇이든 필사적 대결 구도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극단적이다 보니 한국사회에는 갈등이 많다. 논객 강준만은 자신의 저서 <한국인 코드>에서 한국적 극단주의에 대해 싸늘한 비판을 쏟아 놓는다. “극단주의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어느 한 극단으로 치달을 때까지 ‘올인’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기 때문이다. 목숨 거는 사람들이 적은 사회가 편안한 사회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놀라운 건 이 같은 극단주의가 우리 모두의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모 방송 시사프로에서는 초등학생 대부분이 혼혈인과 친구가 되기 싫어 한다는 조사내용을 방영한 적이 있었다. 편견에서 가장 순수해야 할 아이들까지 어른들의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극단주의를 학습한 것이다. 피부색으로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아이들을 보며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극단주의는 우리 사회 갈등의 가장 근본적인 하부구조를 이룬다. 노사, 지역, 계층, 성, 이념갈등의 본질에는 뿌리 깊은 극단주의가 존재한다. 왜 우리는 인간이 지닌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정하지 않는가.
입시지옥, 교통정체,바캉스… ‘고독한 한국인’.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불교 경전 <수타니파타>에 나오는 구절이다.
한국인은 고독을 두려워한다. 해마다 일어나는 바캉스 전쟁을 보자. 한국에서 바캉스는 이미 휴식이 아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교통정체, 목욕탕을 방불케 하는 해변의 인파, 넘치는 쓰레기와 바가지 요금, 심지어 바캉스 비용 마련을 위한 범죄까지. 그런데 왜 한국 사람들은 매년 그 대열에 동참할까.
이유는 ‘남들이 다 가니까’다. 남들이 다 가는 그 대열에서 이탈하는 게 두려운 것이다.
제대로 된 혼자를 경험해 볼 일이 없이 사람들과 뒤엉켜 입시전쟁을 치르고, 또 취업전쟁을 치르고, 서로서로 괴롭히면서 잘살기 위한 전쟁을 치르며 평생을 사는 한국인들에게 고독은 낯선 개념이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고독한 존재가 한국인이다. 예리한 시각으로 한국사회의 병리현상을 꾸준히 비판해 온 논객
강준만은 <고독한 한국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인은 고독할 겨를이 없을 것 같지만, 사실은 고독을 경험해 볼 기회가 거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역설 같지만 그래서 한국인은 고독하다. 자신보다는 남을 더 의식하고 살아간다. 한국인들은 남들로부터 인정받아야만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 인정 투쟁의 대가들이다.”
고독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더 고독한 한국인들은 불행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사실 고독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고독을 견디면서 자기 내면을 응시하는 습관은 개인적 성숙의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준다. 스스로 일어선 사람만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고, 타인의 삶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강 교수는 고독을 못 견디는 한국인의 습성이 엄청난 사회적 비용 지출을 조장한다고 말한다.
고독이 두려운 한국인의 특성은 각종 연고와 정실문화를 만들어냈고 그것은 곧 뿌리 깊은 병폐로 이어져 지금도 한국사회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 고독한 한국인이여, 자신과 마주하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