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나 그냥 여기서 포기할래. 여기 왜 온 거야. 너무 가파른 거 아냐? 엄만 안 힘들어?”
“맞아. 내 인생 최대 고비야. 여기서 돌아가도 되는 거잖아. 그냥 내려가자 언니.”
어림잡아 초등학교 1, 2학년쯤 돼 보이는 두 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길을 오르다 내뿜은 푸념이 한바가지다. 앞서가던 아빠는 내심 미안했는지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란 말을 벌써 14번째 반복하고 있다.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는 그러나 단호하게 한마디 내뱉는다.
“올라가보자. 좀 더 가면 너희들이 세상에서 처음 보는 풍경이 나올 거야.”
그 말에 아이들의 불평이 사그라든다. 다시 오르길 십여 분. 이번엔 동생이 소리쳤다.
“어 언니, 뒤돌아봐. 저기 바다 아냐? 저어기 우리 호텔도 있어. 손가락만 한데.”
언니도 까르르 소리치며 신이 났다.
“야, 저어기 바다도 손바닥만 해.”
그때 이제야 진정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듯 당당해진 아빠가 한마디 거든다.
“조기 조 앞이 정상이다. 저 멀리 병풍처럼 커다란 바위가 설악산 울산바위야.”
강원도 고성에 자리한 금강산을 찾았다. 신라 혜공왕 5년 진표율사가 창건한 화암사(禾巖寺)에서 출발해 1시간 반 정도 오르면 닿는 신선대와 성인대의 풍경은 아는 사람은 이미 쟁여놓은 버킷리스트 중 하나다. 요즘 서서히 떠오르는 SNS 핫플이기도 한데, 성인대에 서서 오른쪽을 보면 울산바위가, 왼쪽을 보면 속초 앞바다가 훤히 눈에 들어온다. 평일인데도 수많은 등산객이 이곳을 찾는 이유다. 무리지어 사진을 찍던 이들의 말을 빌리면 “없던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샘솟는 명당”이란다. 아, 어찌 아니 그럴 수 있을까.
강원도 고성군 신평리 계곡에 자리한 금강산화암사(禾巖寺)는 신라 혜공왕 5년(769년)에 진표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일만이천봉이 수려한 금강산의 남쪽 줄기 끝에 자리해 사찰 이름 앞에 금강산이 더해졌다. 속초로 들어오는 관문 중 하나인 미시령옛길을 타면 좀 더 수월하게 도착할 수 있는데, 사찰의 제2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음을 옮기면 빨갛고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 사이로 가을 햇살이 눈부시다.
화암사에 들어서려면 계곡을 건너야 한다. 금강산 제1봉인 신선봉에서 발원해 남쪽 끝자락인 이곳까지 이어지는 계곡물은 위에서 보면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깨끗하다. 계곡을 건너려면 세심교(洗心橋)라 쓰인 화강암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름 그대로 마음을 씻는 다리다.
사찰을 한 바퀴 돌아보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면 왕관 모양의 우람한 바위가 멋스럽다. 금강산화암사의 상징인 수바위(쌀바위)다. 진표율사를 비롯해 여러 스님들이 수도장으로 사용하던 곳인데, 쌀 낟알 모양의 바위 위에 왕관 모양의 또 다른 바위가 얹혀있고 꼭대기에 길이 1m, 둘레 5m의 웅덩이가 있다고 한다. 이 웅덩이엔 항상 물이 고여 있는데 가뭄이 들었을 때 이 웅덩이의 물을 주변에 뿌리고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내렸다고 전해진다.
수바위 길로 들어서면 ‘금강산화암사 숲길’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화암사에서 수바위, 신선대, 성인대를 거쳐 다시 화암사로 돌아 나오는 원점 회귀 코스로 총 4.6㎞, 약 서너 시간이 걸린다.
사찰에서 출발하는 숲길이라고 단순히 산책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아무런 준비 없이 나섰다간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이 길, 쉽지 않다. 수바위에서 신선대에 오르는 길은 가파른 등산로다. 등산화까진 아니더라도 편한 운동화는 필수다. 어른 걸음으로 1시간 이상 올라야 하니 물 한 병도 꼭 준비해야 한다.
그렇다고 마냥 가파르기만 한 건 아니다. 한동안 고개 푹 숙이고 오르다보면 걷기 편한 오솔길 끝에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벤치도 두어 군데 마련돼 있다. 숨이 가빠질 때 즈음 만날 수 있는 신선대와 성인대는 짧은 고생을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을 만큼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어쩌면 90여 분의 짧은 산행 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풍경이다.
미시령 방향을 바라보고 우뚝 선 신선대 바위에선 속초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600여m의 높이에서 내려다본 속초 시내는 양손으로 가려질 만큼 아담하다. 신선대 뒤로 약 3분 여 오르다보면 커다란 바위가 탁 트인 공간을 지탱하고 선 성인대가 펼쳐진다. 평일과 주말 가리지 않고 수많은 이들이 찾는 곳인데, 누구랄 것도 없이 휴대폰 카메라를 손에 들고 셔터 누르기에 바쁘다.
미시령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설악산 울산바위와 마주선 덕에 성인대에선 그 큰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요즘말로 풍경 맛집이다. 바위에 걸터앉아 울산바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30여 분이 후딱 지나간다. 아, 이 샘솟는 호연지기를 어찌 표현하리요. 말보단 사진, 아니 사진보단 직접 확인해 보시길….
▶고성군에 가면 이건 꼭!
고성막국수-고성에선 동치미로 육수 맛을 낸다. 얼음이 둥둥 떠 있고 굵직한 무가 먹음직스러운 동치미를 떠서 국수에 부어 먹는데, 그 맛이 시원하고 담백하다.
명태맑은탕-고성군의 대표 어종인 명태에 마늘과 소금만 넣어 끓인 탕이다. 비리지 않고 시원 담백하며 칼슘과 단백질이 풍부한 저지방음식이다.
자연산 물회-어부들이 새벽 출어 전 먹던 음식이다.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자연산 가자미, 오징어, 해삼 등에 각종 야채와 초고추장이 어우러져 담백하고 신선한 맛을 낸다.
도치두루치기-고성 지방 겨울철 별미 중 하나로 잘 익은 김장 김치를 넣고 끓여 얼큰하고 개운하다. 심퉁이라고도 부르는 도치는 살이 연하고 뼈도 그냥 씹어 먹을 수 있다. 날씨가 추워지면 고성 항구에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도루묵찌개-겨울철 별미로 알이 꽉 찬 도루묵찌개는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알의 쫀득쫀득한 맛이 일품이다. 고단백 도루묵은 비늘 없는 생선이라 아주 담백한 맛이 난다.
방어회-고성은 새로운 방어 주산지다. 방어는 보통 봄과 가을에 많이 잡히는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겨울철에 잡히는 방어는 살이 차지고 쫄깃한 맛이 일품이다. 비타민D가 풍부해 골다공증과 노화 예방에 좋다.
[글·사진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6호 (2022년 1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