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헌철 특파원의 워싱턴 워치] 여지껏 이런 정권은 없었다… 바이든의 ‘컬러 내각’ 흑인, 여성, 성 소수자 장관 발탁 파격
신헌철 기자
입력 : 2021.01.04 15:09:46
수정 : 2021.01.04 15:34:32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이자 인종의 용광로로 불려왔다. 2019년 인구 센서스 기준 백인이 60.1%로 여전히 과반을 차지하지만 히스패닉(라티노) 비중이 꾸준히 늘어 18.5%에 달하고 있다. 이어 흑인이 13.4%, 아시아계가 5.9% 등이다. 이처럼 다양한 구성에 비해 소수 인종의 정치적 지분은 취약했다. 인종 간 빈부 격차도 문제로 지적되지만 정치권력 역시 백인들이 장악해온 것이 미국의 정치 현실이었다.
예를 들어 2020년 말로 임기가 종료된 116대 미국 의회에서 백인 비중은 78%에 달했다. 백인의 인구 비중에 비해 더 많은 정치적 지분을 향유한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장관 15명 가운데 흑인은 벤 카슨 주택도시부 장관 1명, 아시아계는 일레인 차오 교통부 장관 1명에 그쳤다. 히스패닉으로는 장관급 직책인 조비타 카란자 중소기업청장이 겨우 이름을 올린 수준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백인 일색이었고, 남성 우위가 두드러졌다. 이에 비해 1월 20일 취임하는 미국의 46대 대통령 조 바이든의 내각은 ‘파격적’이다. 흑인과 인도계 혼혈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이 미국 역사상 첫 여성 부통령에 오를 예정인 것을 비롯해 사상 첫 흑인 국방장관이 지명됐다. 오하이오주 흑인 여성 하원의원인 마르시아 퍼지가 주택도시부 장관에 발탁됐고 세실리아 라우스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유엔 대사도 흑인 여성이다. 수전 라이스 전 국가안보보좌관도 국내정책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아 수시로 각료회의에 참여할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25명 안팎인 각료회의 당연직 참석 멤버 중 흑인이 벌써 4~5명에 달하게 된다. 재무부 부장관에도 나이지리아 이민자인 월리 아데예모가 깜짝 발탁됐다.
히스패닉계 중에서도 쿠바계 이민자인 알레한드로 마요르카스가 사상 처음으로 국토안보부 장관 자리에 내정됐다. 아시아계로는 인도 이민자 가정 출신인 니라 탠던이 백악관 예산관리국(OMB) 국장에, 대만계 캐서린 타이가 무역대표부(USTR) 대표에 각각 지명됐다. 유색인종 여성 국장의 탄생은 1921년 OMB가 생긴 이후 처음이다. 예산관리국은 대통령실 직속으로 연방기관의 예산을 수립하는 중요 기관이다. USTR에는 여성 대표가 있었지만 아시아계로는 처음이다.
여성들은 인종을 불문하고 약진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었던 재닛 옐런은 역시 최초의 여성 재무장관에 지명됐다. 미국 정보기관 수장인 국가정보국장에도 애브릴 헤인즈가 여성으로는 처음 발탁됐다. 에너지부 장관에는 제니퍼 그랜홈 전 미시간주 주지사가 전격 발탁됐는데 그는 대선 기간 중 매일 CNN 패널리스트로 출연해 바이든 후보를 적극 지지하며 눈도장을 찍은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백악관 공보라인의 핵심보직 7곳이 모두 여성으로 채워졌다.
파격은 사상 최초의 게이 장관의 탄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의회에는 이미 레즈비언이나 게이임을 스스로 공개한 의원들이 일부 등장했지만 내각에선 처음이다. 주인공은 2020년 초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도 출마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피터 부티지지 전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 시장이다. 그는 지역 경선 초반 돌풍을 일으켰다가 승산이 사라지자 일찌감치 바이든 당선인을 지지하며 사퇴해 힘을 실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교통부 장관에 발탁된 셈이고, 행정경험을 키워 추후 대권주자로 재도약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전망이다.
그러나 바이든 당선인의 용인술이 환영 일색인 것은 아니다. 민주당 내부는 물론 시민사회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다. 가장 큰 이의를 제기하는 쪽은 민주당 내 진보(progressive)그룹이다. 이들은 바이든 당선인이 버락 오바마 정권의 관료 출신으로 내각과 백악관 주요 보직의 70%를 채웠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른바 회전문 인사가 이뤄졌다는 얘기다. 새 정부에 진보그룹 출신이 참여하지 못하고 중도 성향의 민주당 기존 주류들이 권력을 꿰찼다는 주장이다.
당장 농무부 장관에 지명된 톰 빌색 전 오하이오주 주지사가 비판의 표적이 됐다. 그는 오바마 정부에서 무려 8년간 농무부 장관을 지낸 인물로 농업계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보훈부 장관에 지명된 데니스 맥도너 전 백악관 비서실장도 군 경력이나 보훈 관련 경험이 전무한 인물이다. 경선 때 자신을 지지해준 존 케리 전 국무부 장관에게 기후변화 특사를 맡긴 것도 사실상 ‘위인설관’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바이든 당선인이 자신의 선거운동을 도운 측근들을 상대로 다소 무리한 논공행상을 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반대로 바이든 당선인이 자신들의 지분을 요구하는 민주당 내 진보진영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물론 바이든 정권 내각 가운데 한국의 국익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인물은 제한적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 지명자가 꼽힌다. 올해 58세인 블링컨 지명자는 헝가리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도널드 블링컨의 아들로 우크라이나계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모계는 헝가리 출신 유태인이다. 그의 삼촌도 벨기에 대사를 지내는 등 유태계 명문가 출신이다. 어린 시절을 프랑스 파리에서 보냈고 미국으로 돌아와 하버드대와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나온 전형적인 엘리트다.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도 3곡이나 발표하는 등 한량 기질도 있다.
1990년대 빌 클린턴 정부에서 이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직원으로 일했고 2000년대 버락 오바마 정권에선 상원 외교위원회 국장, 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국무부 부장관으로 쾌속 승진했다. 바이든 당선인의 오랜 외교책사로 일찌감치 국무부 장관이나 국가안보보좌관 물망에 올랐던 인물이다. 오바마 정권에서 대북 제재를 직접 집행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블링컨 지명자가 2018년 6월 싱가포르 정상회담 직전에 뉴욕타임스(NYT)를 통해 제시했던 북핵 문제 해법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협정을 ‘끔찍한 협상’이라며 폐기시킨 것을 상기시킨 뒤 “트럼프의 논리대로라면 북한과의 협상은 이란 핵협정보다 더 낫고 포괄적이어야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며 “트럼프에게 최선은 버락 오바마가 이란과 이뤄냈던 협상 수준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블링컨 지명자는 “이란과 달리 북한은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핵 왕국의 열쇠’를 넘겨주길 바라는 것은 판타지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식 협상은 중국 등이 대북 제재를 완화할 여지를 주고 미국이 가진 지렛대를 오히려 약화시켰다고 비판했다.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이라고도 불리는 이란 핵협정은 오바마 정권 말기인 2015년 7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체결된 협정이다.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과 독일, 유럽연합(EU)이 이란을 상대로 체결했다. 이란이 핵프로그램을 단계적으로 포기하는 대가로 협상 당사국들은 경제 제재를 해제하는 것이 골자다.
바이든 정부가 들어서면 이란 핵협정을 되살리는 동시에 북한에도 유사한 모델을 적용하기 위해 관련 당사국과 서서히 논의를 시작할 전망이다. 일각에선 실패했던 6자회담 모델의 반복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하고 있다. 북한 김정은 정권도 6자회담의 한계를 인식하고 미국과의 양자 협상을 선호했기 때문에 아무런 당근 없이 북한이 협상에 응할지도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