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미국 대선을 향한 민주당의 레이스가 심상치 않다. TV 토론이 시작되기 전인 5월만 해도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40%를 넘는 압도적 지지율을 보였다. 물론 바이든은 여전히 20%대 중후반의 지지율로 1위를 거의 놓치지 않고 있다.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초반에 반짝 상승했던 군소 후보들이 빠르게 소멸되면서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에게 표가 흡수되고 있다는 점이다.
워런 의원은 10월 들어 몇몇 전국단위 여론조사에서 바이든 전 부통령을 앞질렀다. 워런 의원과 지지층이 겹치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심장 수술을 받는 등 건강 문제가 대두되면서 상승 모멘텀을 잡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바이든 대세론을 위협하고 있는 워런 의원은 어떤 인물일까. 그리고 지난 2016년 대선에서 여성인 힐러리 클린턴을 후보로 선택했던 민주당이 또 다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항마로 여성을 선택할 것인가.
워런 의원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앤 헤링(Elizabeth Ann Herring)으로 1949년 미국 오클라호마주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성은 고교 동창으로 첫 번째 남편이었던 짐 워런의 성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증조부인 존 헤링은 잉글랜드 콘월에서 태어나 6살 때 미국 몬태나주로 이주했다. 오클라호마주 웨툼카(Wetumka)로 터전을 옮겨 1910년 ‘헤링 하드웨어’라는 잡화점을 운영했다. 마차부터 말안장, 주방기기 등을 파는 가게로 조부 때까지 가업으로 이어졌다. 부친인 도널드 헤링은 오클라호마 A&M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했지만 대공황과 세계대전 와중에 무너진 가업을 이어가지 못했다. 부친은 카펫 세일즈맨으로 일하며 4명의 자녀(3남 1녀)를 키웠고, 그마저도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모친인 폴린 리드는 사범대학을 나왔으나 육아에 전념했다. 모계 역시 영국 이주가정 출신이다. 워런 의원에 따르면 모친 가계에 아메리칸 원주민 혈통이 섞여 있다는 이유로 부친 가족들의 반대가 극심했고, 부모는 결국 증인 2명 앞에서 몰래 결혼을 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자신의 인종을 아메리칸 원주민으로 적은 문건들이 발견됐는데 이를 통해 소수인종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워런 의원은 DNA 검사까지 자처했지만 결과는 6~10대 조상 중에 원주민이 있을 수 있다는 정도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를 ‘포카혼타스’라고 부르며 조롱했던 배경이다. 족보가 없는 미국 사정을 감안하면 확인이 불가능하긴 하지만 모계 쪽에선 오랫동안 스스로 원주민 혈통이 섞여 있다고 믿어온 듯하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 바이든 전 부통령(왼쪽)과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워런 의원의 가정은 중산층의 끄트머리쯤에 있었던 모양이다.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방 2개에 차고는 없는 2층짜리 목조주택에 오랫동안 살았다.
이 같은 가정형편 때문에 워런 의원은 13살 때부터 이모의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거나 베이비시터를 하며 일찍부터 용돈을 벌어 썼다.
고교 시절에는 토론 서클에 참여해 전국대회에서 우승까지 했다. 이코노미스트 등 시사 잡지를 탐독하며 논리력을 키운 것이 지금의 ‘여전사’ 워런을 있게 했다는 평가다.
첫사랑과 결혼하기 위해 장학금을 받고 진학한 명문 조지워싱턴대학을 중퇴했던 워런 의원은 이후 학비가 싼 휴스턴대를 나온 뒤 특수학교 언어치료사로 취업했다. 출산 후엔 평범한 주부였으나 당시 미국을 휩쓴 여성운동을 접한 뒤 럿거스대 로스쿨에 진학해 만학을 이어갔다. 그 사이 이혼하고 법학자인 브루스 만과 재혼했다. 자녀는 전 남편과 사이에 1남 1녀를 뒀다.
37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펜실베이니아대 교수가 됐고 1995년에는 하버드대로 옮겼다. 개인 파산을 양산하는 금융구조의 문제점을 연구하는 데 천착했고 파산법 전문가로 유명해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대형 은행에 대한 규제가 이슈가 되자 금융개혁안을 직접 제시하며 정치권에 발을 딛게 됐다. 2010년 미국 소비자금융보호국(CFPB)이 만들어지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고 201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면서 워싱턴 정가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같은 해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2009년 테드 케네디 의원 사망 후 잠시 공화당이 가져갔던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자리를 워런 의원이 되찾아온 것이다.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특별한 공직이나 하원의원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상원에 입성한 드문 사례였다. 60세가 넘어서야 정치권에 몸담은 점도 이례적이었다. 초선 상원의원이었지만 2016년에도 대선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정치적 무게감이 남달랐다. 상원의원으로 6년간 일하며 지명도를 더 높인 워런 의원은 작년 선거에선 60% 지지를 얻어 36%에 그친 공화당 후보를 큰 표 차로 따돌렸다.
그리고 올해 2월 민주당 후보 중 가장 먼저 2020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지난 5월만 해도 지지율이 한 자릿수에 그쳤으나 네 번의 TV토론을 거치며 조 바이든 전 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상승세를 나타냈다. 올해 3분기에만 2460만달러에 달하는 후원금을 모아 버니 샌더스 의원(2530만달러)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대선 공약의 전면에는 중산층 재건을 내세우고 있다. 개인 자산이 5000만달러 이상인 7만5000명의 미국 최고 부자들에게 ‘울트라-백만장자세(Ultra-Millionaire Tax)’를 연간 2500억달러씩 걷겠다는 것이 핵심 공약이다. 이 돈으로 보편적 아동 무상 건강보험과 초등학교 입학 전(Pre-K) 무상교육 등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한국처럼 전 국민이 낮은 부담으로 가입하는 보편적 건강보험, 즉 ‘메디케어 포 올(Medicare For All)’을 도입하고 대학생들의 학자금 대출부담을 대폭 경감하겠다는 공약도 내놨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테크 공룡’들을 분할해야 한다고 주장해왔고, 대기업들이 이사회의 40%를 근로자에게 할당해야 한다는 법안도 냈다. 부자와 대기업을 겨냥한 다소 과격해 보이는 공약은 민주당 내부 경선에선 선명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지만 본선 승부를 좌우할 중도 표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다. 일각에선 워런 의원이 민주당 대선후보로 결정되면 트럼프 대통령에겐 좀 더 손쉬운 상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중도 성향인 바이든 전 부통령이 펜실베이니아주, 플로리다주 등 지난 대선에서 공화당이 승리한 지역을 되찾아올 잠재력이 있는 반면, 워런 의원은 민주당 지지층을 공고히 할 수는 있어도 표의 확장성은 떨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이든 전 부통령보다 트럼프 대통령과 분명히 대조되는 특성을 갖춰 해볼 만하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내년 2월 아이오와 코커스로 막을 올리는 민주당 경선은 바이든 전 부통령, 워런 의원, 샌더스 의원 등의 3파전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샌더스 의원이 중도 포기하고 워런 의원 지지를 선언한다면 워런 의원의 경선 승리 가능성은 매우 높아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