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여름 이라크에서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이라크의 과격주의 반군세력인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가 두 명의 미국인 기자를 참수했다. 2004년 김선일 씨를 살해한 단체에 뿌리를 둔 반군이다. ‘이슬람의 폭력성’이 또다시 세계 여론을 흔들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민간인, 특히 포로에 대한 살상이 금지된다. 이슬람국가는 이슬람을 극단적인 이념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반군조직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슬람국가가 ‘이슬람 단체’이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한다.
불편한 이슬람의 렌즈
많은 사람들이 중동의 여러 현상을 이슬람의 렌즈를 끼고 본다. 이슬람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곳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아랍 국가만 해도 22개국인데 이 중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선진화된 나라가 하나도 없다.
한국과 비교해볼 때 훨씬 먼저 서구화하고 산업화하고 더욱이 1970년대부터는 석유수출로 인한 엄청난 오일머니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후진성이 이슬람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하루에 다섯 번 예배를 보고 1년에 한 달을 단식을 하는데 언제 경제와 정치를 발전시킬 수 있냐는 것이다. 또한 1400여 년 된 이슬람의 오래된 가치가 아직도 중동의 정치, 경제, 사회 및 문화를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현대화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중동과 정교 일치
이 때문에 우리는 중동을 언급할 때 ‘정교일치’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정교일치(Unity Between Church and State)는 유럽학자들이 만든 용어다. 중세의 암흑시대를 개탄하며 꼬집는 말이다. 대체로 종교가 국가 권위 위에 있었던 시대 즉, 종교의 권위가 정치, 경제, 개인의 삶을 지배하면서 이성과 철학 그리고 과학이 침체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를 의미한다.
중동이 이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오히려 현재의 이슬람이 과거 중세의 기독교보다 더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슬람 역사에는 ‘유럽식’ 정교일치가 적용될 수 있는 시대가 거의 없다.
역사적으로 이슬람의 초창기 즉, 무함마드와 그의 4대 정통칼리파 시대 40여 년 동안은 정치지도자가 종교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가 국가 권력 위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즉, 1400여 년 동안 이슬람의 주류인 수니파에서는 종교기관이 국가 권력 혹은 왕권 위에 있었던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우리가 중세의 영화에서 자주 보는, 교황이 즉위하는 왕의 두 어깨를 칼등으로 두드리는 그런 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모세·예수와 다른 정치지도자 무함마드
왜 그럴까? 이를 위해서는 이슬람 종교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이슬람은 중동의 다른 양대 종교, 즉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와 태동에 있어 상당히 다르다. 이는 창시자 무함마드의 독특한 지위와 역할에 기인한다.
모세와 예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종교적 사명을 마치고 삶을 마감했다. 즉, 종교적 지도자 성격이 강했다. 출애굽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모세는 이집트에 사는 유대인들을 설득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까지 인도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가나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사도의 역할만 한 것이다. 기독교의 예언자 예수는 헐벗고 소외된 이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입성함으로써 하나님의 메시지 ‘범우주적 사랑’의 힘을 보여줬다.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신다’라는 메시지를 전파하고 힘없는 자들을 이끌고 사랑의 힘을 보여주었지만, 본인은 정착 예루살렘 입성 후 3일 만에 십자가에 못 박혀 하나님 곁으로 갔다. 그러나 이슬람의 사도 무함마드의 역할은 알라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종교를 정착시키는 데 끝나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종교적 지도자인 동시에 정치적 지도자 혹은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은 것은 그가 40세가 되던 610년이었다. 메카 인근의 산에 있는 히라(Hira) 동굴에서 3일간 명상을 하던 중 첫 계시가 내려왔다. 이후 그는 메카에서 하나님의 메시지인 평화, 평등 그리고 사회정의를 설파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무함마드는 당시 메카의 지배세력이었던 쿠라이시(Quraish) 부족에 속했으나 두 번째 서열의 가문 출신이었다. 유목 부족의 전통적 특성 중 하나는 최대 가문이 정치 및 경제 권력을 모두 장악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서열 가문 출신인 무함마드가 사회 정의와 평등을 주창하게 되자 지배가문은 상당히 심기가 불편했다. 결국 무함마드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진행되었다.
이를 알아차린 무함마드는 622년 식솔과 지지자들을 이끌고 메카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야밤에 이동을 시작해 구사일생으로 메카를 빠져나가 메니다로 이주한다.
성직자가 없는 수니파 이슬람
메디나 이슬람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무함마드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여러 제도와 장치를 만든다. 정치 및 종교 공동체 지도자로서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실용적인 계시를 많이 받았다. 정치지도자로 약 9년 동안 세력을 규합한 무함마드는 631년 대군을 이끌고 메카로 향한다. 군사력을 바탕으로 무혈입성에 성공한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지배가문을 시리아로 추방한다. 그리고 이슬람국가 및 제국의 기틀을 다졌다. 약 2년간 통치하고 죽었다. 최고 권력자 및 정치지도자로서 무함마드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는 시스템을 갖춰 놓았다. 특히 무함마드는 자신의 종교적 권위와 정치권력에 도전할 세력을 용인하지 않을 목적으로 두 가지 원칙을 만들었다.
첫째, 이슬람의 90%를 차지하는 수니파에는 성직자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소수인 시아파는 정치적 탄압을 받아오면서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하기 위해 지배자에게 종교적 권위까지 부여할 수 있는 성직자 계급을 만들었다. 때문에 시아파 국가인 이란은 현재 대통령 위에 최고 종교지도자가 군림하는 정교일치 혹은 신정일치 국가로 변모했다) 무함마드가 자신의 종교적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이나 집단 자체를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수니파 이슬람에서는 누구나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할 수 있다. 이처럼 설교단이 누구에게나 개방되면서 반정부 세력이 모스크를 장악하려 하자, 근대에 들어와 중앙집권 정부들은 정부에서 월급을 주는 모스크 담당자를 파견하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에서는 경전과 신학을 공부한 학자(ulama)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독립적인 성직자 집단은 없고 이들 학자들도 정부의 이슬람법 해석이나 종교재산 관리를 위해 고용될 뿐이다. 즉, 성직자는 없고 공무원만 있다는 것이다. 직업적 성격의 교황, 주교, 목사 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이슬람은 기독교의 십일조에 해당하는 자카트(희사)도 누구에게나 줄 수 있도록 규정했다. 자카트는 모든 무슬림의 의무다. 자기 수익의 2.5%를 내야 한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부의 재분배를 위해 이슬람에서 도입한 제도이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이 자카트를 누구에게나 줄 수 있도록 했다. 기독교처럼 교회에 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에게 주는 돈도 자카트다. 돈이 종교기관에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위의 두 가지 원칙을 정리해 보면, 이슬람에서는 종교기관에 사람과 돈이 없다. 사람과 돈이 없는 종교기관이 왕권 혹은 권력층에 도전하거나 위에 올라설 수 없다.
유럽의 중세하고는 크게 다르다. 정치 지도자 무함마드가 추구한 것은 도전이 존재하지 않는 권위주의 사회였다.
사회적 영향력이 강한 이슬람
그렇다고 이슬람의 영향력이 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슬람이 가진 영향력은 사회적인 것이다. 어떤 종교나 이념이 권력을 추구한다면 오래가지 못한다. 권력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권력이 무너지면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중세와는 달리 현재 유럽의 기독교 종교기관이 이런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이슬람이 권력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애초에 여러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결국 이슬람이 등장한 이후부터 사회적인 역할만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같은 사회적 역할과 영향력이 1400여 년이 지나도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중동에서의 이슬람은 정치 및 경제적 분야가 아니라, 사회적 분야에서 강력한 기능을 하고 있다. 따라서 중동의 정치경제를 연구하고 진출 전략을 구축하는 데 이슬람의 틀로 이를 본다면 상당한 오류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중동의 젊은이들도 우리의 젊은이들처럼 일자리를 찾는 데 가장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하루에 다섯 번 예배를 잘 보기 위해서만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중동 미니상식‘H’는 신성함을 상징한다!
이슬람국가에서 온 서한에 보면 날짜를 표시하는 부분에 H라는 문자가 있는 경우가 많다. 아랍어 히즈라(Hijra)의 영문 표기 첫 글자다. 히즈라는 ‘이주’라는 뜻이다.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것을 의미한다. 서기 622년이다. 이 해가 이슬람의 첫 해다. 이슬람력은 622년을 원년으로 한다. 2014년은 히즈라력으로 1393년이다. 영어로는 앞에 H를 붙여 H1392년이라고 표기한다.
좀 이상하다. 어떤 종교의 첫 해라고 하면 보통 창시자가 태어난 해라든가 아니면 사망한 해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최소한 첫 계시를 받은 해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슬람은 창시자가 죽음을 피해 탈출한 해가 첫해다. 그러나 622년은 이슬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해다. 무함마드가 이주한 메디나는 당시 여러 부족이 갈등을 벌이고 있는 곳이었다. 무함마드는 중재자로서 메디나 일부 부족에게 초대를 받은 것이다. 이는 무함마드가 메디나에서 정치지도자로 부상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622년은 이주를 통해 무함마드의 지도력 하에 첫 번째 이슬람 공동체가 등장한 해인 것이다. 이슬람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신성한 해다. 서한의 H를 지운다거나, 그 위에 낙서를 하는 행동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른 곳에 H를 쓸 때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