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6일 미국 워싱턴DC의 싱크탱크인 ‘초당파적 정책센터(BPC)’ 행사장. 오후 1시 30분이 되자 수백 명의 청중이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든 행사장에 거물들이 속속 입장하기 시작했다.
코카콜라의 무타 켄트, 미국 1위 이동통신사업자인 버라이즌(Verizon)의 로웰 맥애덤,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의 브라이언 모이니헌, 미국 최대 건강보험회사인 애트나(Aetna)의 마크 베르톨리니….
말 그대로 미국 재계를 이끄는 간판 CEO(최고경영자)들이다. 이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생뚱맞게도 ‘건강’ 때문이었다.
이날 모임에서 CEO들은 “미국 재계는 변화와 발전의 주도자 역할을 맡아왔다”며 “미국의 건강 및 건강관리 개선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CEO들은 “미국인의 건강은 글로벌 시장에서 미국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라며 근로자들에게 ‘광범위한 건강 증진 프로그램’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기업별로 추진해온 각종 건강 증진 프로그램을 추적해서 그 결과를 공유하겠다고 선언했다.
얼핏 이해가 안 갈 수도 있다. ‘돈 벌이’에 열중해야 할 CEO들이 왜 갑자기 ‘건강 증진’을 외치고 나선 것일까. 사회 공헌이나 노사 안정 차원에서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모인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은 또 다른 ‘돈벌이’를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사연은 이렇다.
미국인 건강비용 천문학적
오늘날 미국인들은 매년 2조8000억달러(약 2880조원)를 건강관리 분야에 쏟아붓고 있다. 전체 지출액의 5분의 1수준이다. 이 가운데 45%가량이 기업 등 민간부문에서 근로자 등에게 지출하는 비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막대한 지출에도 미국의 건강관리 수준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훨씬 뒤처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진단이다. 건강을 잃은 미국인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연간 5760억달러(약 593조원)에 이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CEO들은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개별 기업들의 경험을 공유해 보다 효율적인 건강관리 기법을 고안할 수 있다면 엄청난 비용을 절감하거나, 새로운 부(富)를 창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건강 및 혁신 CEO 평의회’(CEO Council on Health and Innovation)이고, 이날 워싱턴DC에 모인 CEO들이 바로 그 멤버들이다.
이날 출석하지는 못했지만 맥킨지의 도미니크 바튼, 존슨앤존슨의 알렉스 고르스키, 미국의 초대형 잡화체인인 월그린의 그레고리 왓슨, 미국 건강보험기업 연합체인 ‘블루크로스 앤 블루쉴드 협회’의 스콧 세로타 등도 평의회의 멤버다. 회원 기업의 종사자만 100만명이 넘어서고, 이들 기업이 제공하는 건강보험 수혜자는 150만명에 이른다. 이날 CEO 평의회는 ‘더 나은 건강 구축’(Building Better Health)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직원 건강해야 기업발전
보고서의 요지는 ‘미국인의 건강 개선은 삶의 질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미국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에도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례는 많다. 어느 날 애트나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원들이 매년 평균 2500달러를 건강관리 분야에 더 지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회사는 직원들을 위해 12주짜리 명상 및 요가 프로그램을 도입해 효과를 톡톡히 봤다. 직원들이 건강관리 분야에 지불하는 금액이 연 3000달러나 떨어졌다. 직원들만 좋아진 것이 아니다. 전반적인 생산성이 높아졌고, 회사의 건강관리 비용도 첫해에만 7%나 줄일 수 있었다.
무타 켄트 코카콜라 공동CEO는 이날 모임에서 “미국 기업들은 근로자들의 건강을 위해 엄청난 비용을 부담하고 있지만 그 결과는 긍정적이지 않다”며 “미국 재계가 힘을 모아 조속히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더 건강한 근로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기업이 더 건강하다는 의미”라며 “(근로자들이 건강해야) 기업인들이 회사를 키울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을 채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켄트 CEO는 “이 모든 것이 기업 생태계와 관련된 것”이라며 “쉽게 딸 수 있는 과실이 널려 있다”고 강조했다.
위대한 CEO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돈줄’을 찾아내는 법이다. 길게 내다보고, 깊이 들여다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요즘 미국의 간판 CEO들은 근로자들의 건강에서 새로운 ‘돈줄’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