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바꿔치기(택스 인버전·Tax Inversion)”
최근 미국 정·재계를 뒤흔들고 있는 뜨거운 감자다. 택스 인버전이라는 것은 미국 기업들이 자국보다 법인세율이 낮은 해외로 본사를 옮기거나 신설법인을 설립, 절세에 나서는 세(稅)테크 전략을 말한다. 미국 기업들이 잇따라 유럽 기업 인수합병(M&A)에 나선 배경에는 이처럼 세금 바꿔치기를 통해 법인세를 줄이려는 꼼수가 숨어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미국 법인세율은 39.1%다. 세계 주요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반면 영국 21%, 아일랜드 12.5%, 폴란드 19%, 핀란드 20%, 체코 19% 등 유럽 국가들의 법인세는 대부분 10~20% 선이다. 미국 기업이 유럽으로 택스 베이스(Tax base)를 옮기면 기존 법인세 부담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미국 기업 입장에서 세금 바꿔치기는 기업 수익을 끌어올리는 지름길인 셈이다.
이 같은 세금 바꿔치기용 유럽기업 M&A는 주로 제약업체를 중심으로 활성화되고 있다. 유럽 쪽에 M&A를 할 만한 경쟁력 있는 제약업체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제약업체 밀란은 네덜란드 다국적 제약사 애벗래버러토리스의 제너릭사업부분을 53억달러에 인수했다. 법인세율이 25%인 네덜란드에 합병법인을 세워 세금을 절감하기 위해서다.
또 다른 미국 제약사 애브비도 법인세 절감을 위해 영국 제약사 샤이어를 인수한 뒤 영국으로 법인을 옮기기로 했다. 미국 미니애폴리스 소재 의료기기 제조업체 메드트로닉은 법인세가 미국의 3분의 1수준인 아일랜드에 자리 잡고 있는 코비디언사 인수 계획을 발표했다. 비아그라로 유명한 세계최대 제약사 화이자는 영국 제약업체 아스트라제네카를 1190억달러(약 120조원)에 사들이겠다고 제안한 바 있다. 아스트라제네카를 인수한 뒤 영국에 신설합병법인을 설립, 세금을 줄이기 위해서다.
이처럼 제약업체에 집중됐던 세금회피형 M&A가 이제는 미국을 대표하는 햄버거 체인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미국 2위 햄버거 체인이자 국민 브랜드인 버거킹은 캐나다 최대 커피·도넛 체인 팀호튼 인수에 나섰다. 인수 작업이 마무리되면 신설 합병 지주회사를 캐나다에 둘 예정이다. 캐나다 법인세율은 26.3%로 법인을 캐나다로 옮기는 것만으로 법인세를 3분의 1가량 줄일 수 있다.
이처럼 절세에 나선 기업 입장에서 세금 바꿔치기는 매력적인 세테크 전략이지만 정치권의 시각으로 보면 이 같은 세금 바꿔치기는 법의 허점을 노린 절세 꼼수일 뿐이다. 인프라와 법적체계가 잘 갖춰진 미국에서 필요한 혜택을 다 받으며 장사를 하면서 세금은 해외에 내는 비애국적인 장사꾼들의 술책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오바마도 세금회피 비판
버락 오바마 대통령 행정부는 절세차원의 ‘세금 바꿔치기’를 비애국적 행위로 규정하고 기업인들에게 ‘경제적 애국심’을 발휘해 본사 해외이전을 스스로 포기하라고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 심지어 오바마 대통령은 “세금 바꿔치기를 하는 기업들은 기술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이들 기업들을 탈영병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처럼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세금 바꿔치기를 미국 재계에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월가 헤지펀드 매니저가 있다. 바로 세금 바꿔치기 개척자(파이어니어)로 불리는 제프리 웁벤(Jeffrey Ubben) 밸류액트캐피털매니지먼트 창업자다. 운용자산만 140억달러에 달하는 샌프란시스코 소재 대형 헤지펀드인 밸류액트캐피털매니지먼트의 웁벤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2010년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던 제약업체 밸리언트가 캐나다 소재 제약사 바이오베일(Biovail)을 인수한 뒤 캐나다로 본사를 옮기는 세금 바꿔치기용 M&A를 진두지휘했다. 캐나다로 택스 베이스를 옮긴 뒤 밸리언트는 법인세를 확 줄일 수 있게 됐고 결국 캐나다 최대 제약회사로 성장했다.
이후 웁벤 CEO는 또 미국 식품업체 사라 리 경영진을 설득, 음료부분을 네덜란드 식품업체 DE마스터스블렌더와 합병한 뒤 신설법인 본사를 네덜란드로 옮기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세금 바꿔치기를 통해 법인세를 줄이는 그의 전략은 그대로 들어맞았고 합병신설법인은 절세효과를 톡톡히 봤다. 이처럼 세금 바꿔치기를 통한 법인세 절감 효과가 입소문을 통해 월가에 퍼지면서 이를 모방해 지난 수년간 웁벤 CEO가 개척한 절세용 M&A가 들불처럼 급격하게 확산됐다는 게 월가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최근에도 웁벤 CEO는 캐나다 최대 제약사로 성장한 밸리언트가 보톡스(Botox) 제조업체인 미국 앨러간을 상대로 추진하고 있는 53억달러 규모의 적대적 인수를 돕고 있다. 성장성이 높은 앨러간을 인수합병할 경우, 앞으로 매출확대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앨러간 사업부분에서 나오는 이익에 대해 절세효과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금 바꿔치기를 위한 글로벌 M&A가 확산되는 것과 관련해 웁벤 CEO는 “최근 이전에 우리가 해왔던 것(세금 바꿔치기용 M&A)이 유행처럼 확산되고 있다”며 “그동안 멍청한 법인세 체계를 개혁하지 못한 미국 의회는 세금 바꿔치기를 당해도 싸다”고 공개적으로 택스 인버전을 옹호하고 나섰다. 치열한 글로벌 경쟁구도에서 경쟁력 유지를 위해 법인세를 덜 내는 곳으로 본사를 옮기는 게 뭐가 문제냐는 주장이다.
웁벤 CEO는 투자기업에 적극적으로 경영간섭을 해 주주수익을 극대화하는 행동주의 투자자이기도 하다. 웁벤 CEO는 밸류액트캐피털을 통해 지분을 투자한 기업 경영에 관여하기 위해 해당 기업 이사회에 ‘자기 사람’ 심어놓기를 선호한다. 밸류액트캐피털이 지분투자를 하고 있는 기업 절반 정도는 웁벤CEO가 보낸 사외이사가 이사회에 포진해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 아이칸엔터프라이즈 회장이나 빌 애크만 퍼싱스퀘어캐피털 창업자처럼 지분투자 기업의 경영진과 각을 세우는 일은 거의 없다. 이게 웁벤 CEO가 다른 행동주의 투자자와 다른 점이다. 아이칸이나 애크만이 특정 회사 지분을 사들이면 해당 회사 경영진은 바짝 긴장을 한다.
하지만 웁벤 CEO는 투자한 회사 경영진과 신뢰를 바탕으로 잘 지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때문에 밸류액트캐피털이 지분을 매입해도 해당 기업경영진이 긴장하지 않는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도 있다. 아이칸이나 애크만은 공개적으로 기업들과 싸움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만 웁벤 CEO는 막후에서 설득의 리더십을 통해 기업들과 협력관계를 구축해 나간다. 기업들과 갈등을 빚기보다는 신뢰를 쌓는 데 더 집중한다는 얘기다.이 같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투자는 탁월한 펀드수익으로 연결됐다. 웁벤 CEO는 지난 2000년 밸류액트캐피털을 설립한 뒤 75개 기업의 변화를 이끌어왔고 이를 통해 투자자들에게 매년 평균 17%에 달하는 고수익을 안겨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