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니파 이슬람 과격세력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가 6월 초 이라크 제3의 도시인 북부의 모술을 장악하면서 중동은 또 다른 충격에 빠졌다. 국제유가가 단기적이지만 급등했다. 세계 증시도 동반 하락했다.
이라크 사태가 새로운 중동전쟁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이 이라크 시아파 정권을 지원하고, 다른 수니파 국가들이 수니파 반군을 지원하면서 중동 전체가 전화(戰火)에 휩싸일 것이라는 시각이었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파 간 갈등을 확대해석한 것이다. 이란의 공개적인 이라크 사태 개입도 없었고, 주변 국가들도 ISIL을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 수니파 학자들은 ISIL이 선언한 ‘이슬람국가’도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1980년에서 1988년까지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은 아직도 시아-수니파 전쟁으로 불리곤 한다. 그러나 이 전쟁은 1979년 집권한 수니파 출신 사담 후세인이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이란을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같은 해 접경국가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발생하고, 권력을 잡은 호메이니가 ‘이슬람혁명 수출’을 선언하면서 후세인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권력 기반인 수니파는 이라크에서 소수파였다. 이라크 인구의 65%는 시아파다. 시아-수니파 종파 간 반감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종교적 반감이 갈등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일부 세력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정치적으로 이 반감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을 뿐이다. 따라서 이라크 내전의 원인도 종파 간 갈등보다 정치적 이용에서 찾아야 한다. 널리 알려진 편견과 달리 시아파와 수니파는 중동 지역에서 1천년 넘게 공존해 왔다. 수니파 왕조를 시아파가 아닌 수니파가 전복한 경우가 더 많았고,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엔 두 종파가 모두 공산당에 합류하기도 했다.
정치적 갈등으로 등장한 시아파
시아파라는 용어는 잘못된 것이다. 아랍어로 시아(Shia)의 의미는 ‘분파’ 혹은 ‘파’다. 따라서 시아파라고 하면 ‘파파’가 되는 것이다. 시아파의 원래 이름은 ‘시아 알리(Shia Ali)’다. 즉, 알리를 따르는 무리 혹은 분파라는 의미다. 용어의 기원에도 잘 나타났듯이 정치적 분파다.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 사후 권력 승계를 놓고 발생한 정파다. 당시 대다수 사람들이 무함마드가 사망하면 알리가 권력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쉽게 말하면 시아파는 ‘대권을 차지할 사람에게 줄 대던 사람들의 무리’였다.
왜 사람들은 알리를 추종했을까? 사도 무함마드는 메카와 메디나를 통일해 이슬람국가를 건립했다. 그런데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여러 아들이 모두 어린 나이에 죽었다. 네 딸만이 살아남아 장성했다.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던 중동의 전통을 고려했을 때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무함마드의 인척에 눈길을 줄 수밖에 없었다. 바로 무함마드의 사촌인 알리다.
알리는 또 초기부터 무함마드를 도와 이슬람의 전파를 도왔다. 이에 무함마드는 자신의 딸을 알리와 결혼시켰다. 사위로 삼은 것이었다.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누가 보아도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가장 유력했다. 국가 건설 후 2년도 안 돼 무함마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후계자에 대한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동료들이 모였다. 그리고 무함마드보다 3살 적었던 아부 바크르(Abu Bakr)를 후계자로 선출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알리가 너무 어린 것이 문제였다.
알리의 추종자들은 불쾌했겠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가부장적 권위주의 사회에서 알리보다 27살이나 많은 원로의 선출을 공개적으로 비난할 수 없었다.
아부 바크르 이후에도 두 번째 후계자로 우마르(Umar), 세 번째 후계자로 우스만(Uthman)이 선출됐다. 궁극적으로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난 지 24년 만인 656년이 되어서야, 우스만이 암살당하면서 알리가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지난 6월 30일 바그다드 인근 수니파 회교도 집단거주지역 아자미야에서 이라크 국민방위대원들이 순찰하고 있다.
시아 알리의 득세와 비극의 시작
반란 세력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알리가 드디어 네 번째 후계자로 선출된다. 그러나 5년간 그의 통치는 순탄치 않았다. 우마위야 가문 등 적지 않은 세력이 그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알리는 수도를 메디나에서 이라크의 쿠파(Kufa)로 옮겼지만, 내전이 그의 통치 기간 내내 이어졌다. 알리는 661년 쿠파의 모스크에서 새벽 기도를 하던 중 살해당한다. 그리고 우마위야 가문의 지도자 무아위야(Muawiyya)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하는 우마위야 왕조를 세운다. 이어 670년 알리의 아들 하산(Hasan)이 독살당하고, 680년에는 또 다른 아들 후세인(Hussein)이 우마위야 왕조의 정벌대에 의해 이라크의 카르발라(Karbala) 전투에서 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참수 당해 머리는 몸과 분리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이런 비참한 최후를 기리기 위해 현재도 시아파들은 이 비극을 기리는 행사에서 자신의 몸을 때리거나 자해하며 피를 흘린다.
알리 일가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면서, 알리의 추종자(시아 알리)는 사우디의 메카와 메디나를 떠나 이라크에 정착한다.
즉, 현재 최대 시아파 국가는 이란이지만 시아파가 정립된 곳은 이라크다. 따라서 이란인들이 이라크의 나자프(Najaf), 카르발라(Karbala) 등 시아파 성지를 순례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슬람 역사 내내 집권세력의 탄압을 받는다.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 가문의 피를 이어받는 정치 세력이라는 점에서 모든 수니파 정권은 이들을 배격하고 억압한다.
시아파는 1501년 이란의 사파비드(Safavid) 왕조가 시아파를 국교로 삼을 때까지 소수 종파로서 그리고 ‘위험한’ 정치 집단으로서 소외받고 고통을 당한다. 전체 이슬람 신자 중 현재도 시아파는 10%에 불과한 소수파로 남아 있다.
성직자를 만든 시아파
7세기 중반부터 16세기 초까지 억압 속에 살아오면서 시아파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치·종교적 제도를 만든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직자인 ‘아야툴라(Ayatollah: 알라의 말씀 혹은 구절)’ 그리고 최고 공동체 지도자인 이맘(Imam)이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가장 큰 차이는 성직자의 존재 여부다.
수니파에는 성직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울라마(ulama)라고 불리는 학자들만이 있다. 일부 학자들이 정부에 고용되어 종교지도자 역할을 할 뿐이다. 수니파에서의 이맘은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앞에 선’ 사람을 의미한다. 아랍어로 ‘이맘’은 ‘앞’이라는 뜻이다. 누구나 이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탄압을 받아온 시아파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성직자 계급을 만들고 이들이 시아파의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 운용을 관여하도록 허용했다.
현재 존재하는 57개 이슬람국가 중에서 대통령 위에 성직자가 국가 최고지도자로 존재하는 나라는 시아파인 이란뿐이다. 따라서 신정일치 혹은 정교일치는 현재 시아파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시아파는 신과 유사한 능력을 가진 이맘은 알라에 의해 선택되며 그의 권위와 능력이 혈통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따라서 무함마드의 후손들이 통치자가 되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시아파는 수니파가 정통성을 가진 후계자라고 인정하는 아부 바크르, 우마르, 그리고 우스만이 원로들에 의해 선출되었기 때문에 합법적인 지도자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무함마드 가문 출신인 알리 그리고 그의 후손만을 적법한 지도자라고 믿는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이맘의 권능을 믿기에 수니파와는 달리 시아파에는 기복신앙이 존재한다.이 때문에 수니파에서는 우상화를 우려해 무함마드의 성화도 존재하지 않지만, 시아파는 알리와 그의 두 아들 하산과 후세인의 성화를 허용한다.
공존의 역사를 가진 수니파와 시아파
이외에도 수니파와 시아파는 순례, 단식, 기도 등에 있어 약간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아와 수니는 이슬람의 쿠란과 주요 믿음의 원리들을 공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우디아라비아 대사와 이란 대사가 서울 이태원에 있는 사원에서 함께 예배한다.
시아파가 종교관이나 교리보다는 역사관과 정치적 이해로 인해 등장한 분파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오랫동안 수니 무슬림으로부터 차별과 억압을 받아 왔다는 점에서 시아 무슬림들의 불만은 이어졌다.
또 일부 수니파 학자들은 아직도 시아파를 이단으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시아파가 형성된 초기 혼란시대를 제외하고는 양측 간의 정치적 반감이 유혈 충돌로 이어진 사례는 역사적으로 거의 없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이 현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영국이 이라크를 식민통치하면서 양측 간의 갈등을 조장했기 때문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설명한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도 미국 등 다국적군이 수니-시아 간 갈등을 부추겨 후세인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이라크가 현재까지 혼란을 겪고 있는 배경 중 하나다.
따라서 현재의 이라크 사태를 시아-수니 종파 간 분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적절치 않다. 현재의 상황은 후세인의 비호 하에서 한 때 권력의 핵심이었던 세력이 시아파가 주도하는 국가운영에 불만을 갖고 투쟁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레바논 베이루트의 한 모스크에서 예배 후 설교하는 시아파 성직자.
중동 미니 상식 : 정치적 주제는 피할 것
“왜 민주주의가 어렵죠?”,“왜 이란에서는 대통령 위에 종교지도자가 군림하죠?”
중동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대화를 무겁게 만든다. 시아파와 수니파에 대한 질문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외국인이 중동의 뿌리 깊은 정치·종교적 반감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그리 환영 받는 발언이 아니다. 또 적지 않은 중동인들은 서방 제국주의를 중심으로 외부 세력이 중동의 민주화를 더디게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의 갈등과 분쟁은 다양한 배경이 교차하면서 발생하는 것들이다. 역사적, 민족적, 종파적, 정치적, 부족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그리고 외부적 배경이 존재한다. 또 중동은 모자이크 사회다. 특히 유럽의 제국주의 세력이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국경을 일방적으로 획정한 곳이다. 다양한 민족, 부족, 종파 등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중동국가들은 인구조사(census)를 하지 않는다. 국가 내 인구 구성은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다.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10% 전후의 시아파가 거주한다. 주로 동부 유전지대에 밀집해 살고 있다. 사우디인들은 이들 시아파가 3%도 안 된다고 강조한다. 시아파 종주국 이란에도 8% 전후의 수니파가 살고 있다. 수니파 아랍계 반군 혹은 반정부 세력도 존재한다. 이슬람 국가 이집트에는 1000만명 이상의 기독교인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