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자동차 시장은 외국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외국 자동차 회사와 국내 업체 간 합작사들이 그 주인공이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 독일 폭스바겐, 한국 현대기아차, 일본 토요타와 혼다, 닛산 등이 중국 업체와 합작 설립한 회사들이다. 시장점유율이 높은 업체들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대략 상하이GM과 이치폭스바겐, 상하이폭스바겐, 베이징현대, 둥펑닛산, 장안포드, 이치토요타, 둥펑위에다기아, 둥펑시트로앵 등이다.
이처럼 해외업체들이 주도하는 시장에서 그나마 선전을 펼치고 있는 중국 토종 자동차업체들이 몇 군데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BYD(比亞迪·비야디)다. 대기업이 대부분 국유기업으로 이뤄진 중국에서 민영기업인 BYD의 존재는 단연 눈에 띈다. BYD가 최고 전성기를 누렸던 지난 2009년에는 유수한 해외업체들을 제치고 중국내 판매순위 6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왕촨푸(王傳福) BYD 회장이다.
외국 메이커와 진검승부 중국 토종 자동차회사
그러나 BYD에게는 가파른 성장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판매 실적에서 2009년에 최고 정점을 찍었던 BYD는 2010년부터 갑자기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5년 연속으로 매년 100%씩 성장하던 자동차 판매에 급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회사 측은 어쩔 수 없이 그 해 8월에 연간 자동차 판매목표를 80만대에서 60만대로 하향 조정했다. 그나마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2010년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15.5% 증가하는 데 그쳤다. 회사 순이익도 전년 동기대비 33.5% 감소했다. 이런 실적 부진은 지난 2012년까지 3년간 지속됐다. 그 사이 종업원들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회사를 대거 떠나야 했다.
잘나가던 BYD가 이렇게 망가진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너무 외형적인 성장에만 치중한 나머지 내실을 다지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판매 대수를 빠르게 늘리기 위해 자동차 대리점에 해당하는 딜러를 무분별하게 모집한 데다 판매가 잘 되지 않자 밀어내기식으로 물량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딜러만 늘리면 판매가 늘어날 것으로 보고 딜러의 자격 기준을 대폭 낮춰 가능한, 많이 딜러를 모집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딜러가 자동차를 제대로 팔 리 만무했고, 결국 밀어내기 판매라는 최악의 방식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판매 목표를 달성한 딜러는 많은 현금 보너스를 받았지만 이 현금을 담보로 다시 BYD 자동차를 인수하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딜러숍 뒷마당에 BYD 재고가 넘쳐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동차 경기마저 주춤해지자 한 해 수십 개 딜러가 계약을 반납하기도 했다.
판매분야만이 아니라 생산방식에서도 문제가 드러났다. 다른 자동차 업체들은 생산원가 절감을 위해 공장 자동화 비율을 높이는 데 주력했던 반면 BYD는 과거에 하던 대로 반자동화 생산방식을 고수했다. 기계를 더 도입해서 해결하기보다 사람을 더 고용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인건비가 싼 중국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갈수록 인건비가 상승하면서 더 이상 수지를 맞추기 어려웠다. 전체 생산원가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급속도로 올라갔다. 매출액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중국 민영기업 중 최고를 기록했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경영과 생산관리 측면에서 문제 못지않게 자동차 자체의 상품 경쟁력에서도 적지 않은 문제를 노출했다. BYD의 대표작인 소형차 F3는 일본 토요타의 코롤라를 모방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가격 대비 괜찮은 성능으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F3를 대체할 새로운 차량 개발에 실패하면서 후속 히트작을 내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2년 5월 광둥성 선전시 택시업체에 공급했던 전기차 E6가 추돌사고를 낸 뒤 불이 붙어 3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전기차 위험론이 팽배해졌다. 사고 조사 결과 배터리가 폭발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지만 BYD 판매에 적지 않은 타격을 가했다. 이처럼 큰 난관을 겪었던 BYD가 지난해부터 부진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서서히 판매를 끌어올리면서 다시 전성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증권업계에서는 BYD의 지난해 순이익이 5억5000만위안(약 950억원)에 달하면서 전년 대비 7배 증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올해는 순이익이 7억7000만위안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난관 탈출… 작년 순익 7배 증가
BYD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저력을 발휘한 것은 과거 어려움을 극복한 경험이 밑거름이 됐다는 분석이다. BYD는 지난 2003년에도 첫 자동차 모델 316을 출시했다가 시장에서 참패를 당한 적이 있다.
자동차 디자인도 그저 그런 데다 가격도 그다지 저렴하지 않았고, 기능도 외국 브랜드에 비하면 상당히 부족했다. 가격 대비 성능에 문제가 있는 자동차를 판매하겠다고 나서는 딜러는 거의 없었다. 왕 회장은 결국 막대한 금액을 투입해 개발한 신차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실패가 왕 회장에게는 훌륭한 보약이 됐다. 회장 자신이 자동차 연구개발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엔지니어 출신인 그가 직접 개발에 뛰어들어 만들어낸 자동차가 바로 F3였다. 이 차는 타이어와 유리를 빼고는 모든 것을 BYD가 자체 생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왕 회장의 집념이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지난 2012년 출시된 이 모델은 중국에서 당시 인기가 높았던 폭스바겐 제타와 토요타 코롤라보다 더 많이 팔릴 때도 있었을 정도로 BYD 재건에 큰 역할을 했다.
BYD를 일군 왕 회장은 경영자로서는 아직도 혈기가 왕성한 나이다. 그는 1966년 2월 안후이성 우웨이현의 평범한 농촌 집안에서 2남 6녀 중 7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솜씨 좋은 목수로 이름을 날렸다.
덕분에 막판에는 우웨이현의 당서기를 맡기도 했다. 왕 회장이 13세가 됐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정 형편이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가 중학생이 됐을 때는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났다. 그를 돌본 것은 하나 뿐인 형과 형수였다. 그의 형은 왕 회장의 미래를 예견이라도 한 듯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동생인 왕 회장을 극진하게 보살폈다.그가 대학원에서 석사까지 딸 수 있었던 데는 형님 부부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다. 심지어 왕 회장이 입학한 후난성 명문 중난대학에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도록 자신들도 동생을 따라 후난성 창사로 이사를 했을 정도다. 형은 그 곳에서 작은 가게를 열어 번 돈으로 동생의 학비를 댔다. 왕 회장은 형의 지원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대학 때도 공부에만 전념했다.그가 BYD의 핵심사업인 배터리(전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때부터였다.
왕 회장은 1987년 중난대학 야금물리화학과를 졸업한 뒤 베이징에 있는 비철금속연구원에 들어가 석사과정을 밟았다. 1990년 배터리에 대한 연구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이수한 뒤 이 연구원을 직장으로 선택했다. 연구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실험실 부주임으로 승진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1993년에는 연구원에서 광둥성 선전에 설립한 배터리회사인 비거전지유한공사 대표로 임명되는 등 직장인으로서도 승승장구했다.
외사촌형에게 빌린 돈으로 배터리 사업 시작
그러나 세상을 멀리 내다볼 수 있었던 그에게 연구소 산하 소규모 배터리 회사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연구소에 들어간 지 8년 만인 1995년 회사 경영자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확인한 데 힘입어 창업의 결단을 내렸다. 1995년 외사촌형인 뤄양상에게 당시로서는 거금인 250만위안(약 4억3000만원)을 빌려 충전용 휴대폰 배터리를 생산하는 BYD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배터리 사업에 주목한 것은 당시만 해도 아무나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가였던 휴대폰을 사려는 사람들이 급증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는 뒷날 한 중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면서 “휴대폰 매장에 대당 2만위안(약 350만원)이 넘을 정도로 고가인 휴대폰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이를 통해 휴대폰에 꼭 필요한 배터리 수요가 폭발할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BYD는 당시 휴대폰용 배터리 시장을 독점하던 일본 기업들에 맞서 시장점유율을 빠르게 잠식해 들어갔다.
BYD의 강점은 경영자 스스로의 기술력이었다. 왕 회장은 오랫동안 배터리 분야에서 갈고 닦아온 실력을 바탕으로 회사에서 판매하는 모든 제품을 직접 개발했다. 이미 연구소 산하 기업을 운영한 경험도 있었던 덕분에 경영 관리와 투자 방면에서도 실력을 발휘했다.
BYD가 배터리업계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계기는 1997년에 찾아왔다. 당시 대만 최대 휴대폰 업체였던 다바가 BYD의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인정해 납품처를 일본 산요전기에서 BYD로 바꿔버린 것이다. 덕분에 그 해 1억위안 매출을 돌파하면서 BYD는 중견기업으로서 모습을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BYD는 이후 3년간 매년 100% 이상의 성장세를 유지했다. 아시아 외환위기가 발목을 잡을 만도 했지만 창업 초기부터 원가절감에 주력한 덕분에 파고를 넘을 수 있었다.
워런버핏 지분 투자… 승승장구
BYD가 배터리 회사에서 자동차 회사로 변신한 것은 2003년이었다. 경영난에 허덕이던 산시성 시안의 친촨자동차를 인수한 것. 왕 회장은 자신의 전공을 살려 배터리와 자동차를 결합한 전기차 사업에 승부수를 띄웠다. 때마침 정부의 적극적인 자동차 산업 지원 정책에 힘입어 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5년간 매출을 매년 2배씩 늘릴 정도였다. 전설적인 투자가인 미국이 워런 버핏이 2008년 9월 2억3000만달러를 들여 BYD 지분 10%를 인수하지 BYD는 일순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이 되기도 했다. 회사가 승승장구하면서 왕 회장 개인 재산도 불어나 그는 2009년 일약 45세의 나이에 350억위안 재산을 보유한 중국 대륙 최고 부자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최근 몇 년간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왕 회장은 이제 해외 시장 진출을 통해 제2의 도약에 시동을 걸고 있다. BYD는 이미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롱비치와 로스앤젤레스(LA)에 전기버스 ‘K9’ 35대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이 전기차는 네덜란드로도 공급될 예정이다. 폴란드와 캐나다 등 시장도 새롭게 진출이 시도되고 있다. BYD의 전기버스는 이미 광둥성 선전과 후난성 창사, 산시성 시안, 톈진시 등 중국내 주요 도시에서 운행되고 있다.
BYD는 영국 런던에 전기차 택시 공급을 준비하고 있다. 런던 택시회사 ‘스리브’에 20대 가량의 전기차 택시를 공급키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런던 최초의 전기차 택시에 해당한다. 이로써 BYD는 일본의 유력한 경쟁사들보다 먼저 런던에 전기 택시를 공급하게 됐다.
BYD의 전기차는 이미 광둥성 선전에서 800대의 택시로 운용되고 있다. 이 전기차 E6는 한 번 충전으로 300㎞를 달릴 수 있어 주행거리 면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경쟁차종을 앞선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 정부가 전기차를 국가적 사업으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주요 도시에서는 충전설비 설치와 전기차 도입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전기차 개발과 판매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려는 BYD의 야심을 중국 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모양새다. 왕 회장이 전기차를 통해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인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