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억달러(약 160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을 운용하는 세계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를 설립한 레이 달리오(Ray Dalio·64)회장은 평소 명상 습관 덕분에 월가의 냉혹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았다고 말할 정도로 명상 신봉론자다. 생존에 그친 게 아니라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를 세운 뒤 지난 37년간 탁월한 수익률을 거둔 배경에 명상이 자리 잡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달리오 회장은 지금도 하루에 두 차례씩 20여 분간 꼭 명상을 한다. 명상을 통해 잡념을 없애고 평정심을 찾는 한편 투자흐름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힘을 얻는다고 강조한다. 약육강식의 월가 정글 속에서 명상을 통해 쌓은 내공과 경륜을 앞세우는 달리오 회장을 철학적인 큰손 투자자라고 월가가 평가하는 이유다. 코네티컷 주 웨스트포트에 위치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직원들도 명상은 물론 달리오 회장이 만들어놓은 212가지의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규모가 커지면서 달리오 회장이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근무원칙을 정해 직원들이 이를 준수하도록 한 것. “의견을 낼 수 있을 만큼의 권리를 얻었는지를 자신에게 물어봐라” 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원칙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직원들이 따르도록 하고 있다. 외부에서는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가 달리오 회장이 교주로 있는 종교집단(Cult)처럼 운영되고 있다고 꼬집기도 한다. 포브스에 따르면 달리오 회장은 미국의 31번째 갑부로 재산이 129억달러에 달한다.
경제현상을 다르게 보는 달리오 회장
월가 거물인 달리오 회장은 단순히 돈 많은 세계최대 헤지펀드 회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코노미스트로 불릴 만큼 경제흐름에 정통하다. 전통 경제학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실제경제 흐름을 일반 투자자들에게 설명한다는 취지에서 ‘경제 기계가 작동하는 법(How the Economics Machine Works)’이란 제목의 30분짜리 경제교육 비디오를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다. 지난 9월말 올린 이 비디오는 40여 일만에 50만 건의 클릭수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비디오에서 달리오 회장은 “경제는 하나의 단순한 기계처럼 움직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혹은 경제라는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많은 불필요한 경제적인 고통이 뒤따르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전통경제학에 반기를 든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디레버리징(De-Leveraging, 차입축소)을 하나의 예로 들었다. 전통 경제학은 차입자가 신규로 돈을 빌리는 것을 멈추고 기존 빚을 갚기 시작하면 부채부담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 상황이 벌어진다. 빚을 갚는다는 것은 그만큼 현재 소비를 줄인다는 의미를 갖는다. 결국 부채축소라는 선택으로 소비가 쪼그라들고 이는 가계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다른 사람의 소득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는다. 이처럼 소득이 줄면 오히려 부채부담이 더 늘어나는 부채축소 역설이 나타난다는 것.
달리오 회장은 통화정책 결정권자들이 단순히 통화공급을 통제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을 관리할 수 있다는 이론도 믿지 않는다. 또 그가 볼 때 경제에는 5~10년, 75~100년이라는 두 개의 경기사이클(주기)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루, 주간 단위로 경기사이클을 보려 한다고 꼬집는다.
앞으로 10년간 주식수익률 4%선… 알파를 기대하지 말라
경제학자 만큼 경제흐름에 정통한 달리오 회장은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견한 월가 큰손 중 한 명이다. 시장 변곡점을 남들보다 더 빨리 내다보는 달리오 회장의 능력(?)덕분에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는 월가의 다른 경쟁자들도 놀랄 만큼 높은 수익을 꾸준히 내왔다. 이 때문에 달리오 회장 한마디 한마디가 투자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다.
올 중반까지만 해도 달리오 회장은 주식에 올인했다. 주식투자만큼 더 큰 초과수익을 안겨줄 금융자산은 없다며 주식투자 타이밍을 놓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올 하반기 들어 달리오 회장이 다소 신중모드로 접어들었다. 달리오 회장이 “앞으로 투자자들은 주식 등 금융자산 투자를 통해 더 이상 추가(알파)수익을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하기 시작한 것. 그러면서 향후 10년간 주식 평균수익률이 4%선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이처럼 갑작스레 달리오 회장이 주식에서 발을 빼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로 연준 양적완화(QE) 정책 효과가 줄어들고 있다는 판단 때문. 글로벌 금융위기 때 연준이 양적완화라는 비전통적 수단을 통해 시장에 거대한 유동성을 공급, 경기를 부양하고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하지만 이제 이 같은 양적완화 정책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기 힘들다는 게 달리오 회장의 진단이다. 그동안 양적완화 정책덕분에 시장에 풀린 과도한 유동성이 증시로 몰리면서 주가를 위로 밀어 올렸다. 주가상승으로 개인 가처분소득이 증가하고 이를 통해 가계가 소비를 늘리는 부의 효과(wealth effect)가 창출돼 총수요 증가를 가져오고 어느 정도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를 만들었다.
하지만 단기간 주가가 큰 폭으로 오르면서 앞으로 주가 상승여력이 줄어들 것이라는 게 달리오 회장의 생각이다. 미래 상승분까지 당겨 주가가 미리 올라버려 상승 모멘텀이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얘기다.
달리오 회장이 “연준 양적완화 조치가 주가를 끌어올렸지만 이제는 기대수익률을 낮춰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주가 상승 모멘텀이 줄어들면 부의 효과도 덩달아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달리오 회장은 부의 효과를 키우기 위한 양적완화 정책 약발이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달리오 회장 입장에서 현재 중요한 것은 연준이 양적완화를 축소하느냐 안하느냐 여부가 아니다. 연준이 양적완화 축소에 나선다는 것은 그만큼 미국경제가 자생력을 갖췄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아니다. 미국 경제가 양적완화라는 경기부양조치가 필요 없을 만큼 강해졌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또 생각한대로 미국 경제가 강하게 성장하지 못하면 연준이 다시 방향을 바꿔 양적완화 규모를 늘릴 수 있다. 이처럼 미국 경제상황에 따라 연준이 언제든지 자산매입 규모를 줄이거나 늘릴 수 있다는 점에서 양적완화 축소여부는 큰 이슈가 아니다.
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바로 양적완화 효과가 다 한 것은 아닌지 여부다. 그리고 만일 양적완화가 더 이상 효과가 없다면 도대체 앞으로 경제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걱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새로운 위기 진앙지 가능성
달리오 회장은 당분간 신흥국 증시도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지 못할 것으로 본다. 시점은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통화정책 정상화 차원의 연준 양적완화 축소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경상적자가 큰 신흥경제가 타격을 받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경상적자가 심각한 상황에서 달러 자금까지 대거 빠져나갈 경우, 외환부족 등으로 경제 붕괴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또 앞으로 프랑스를 잘 지켜볼 것을 주문한다. 달리오 회장은 “유로존 다른 핵심국가와 비교해 그동안 높아진 부채비율을 낮추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아 국가부채 상환 부담이 커지고 있는 프랑스는 (재정위기에 허덕이고 있는)남유럽국가와 마찬가지 상황”이라며 다음 위기 진앙지는 프랑스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