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5~1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는 세계적 관심을 끌었던 ‘통화전쟁’이슈를 애써 무시한 듯 온화한 멘트로 막을 내렸다.
G20는 회의 종료 후 발표문에서 “우리는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평가절하를 삼가기로 했다. 환율을 경쟁력을 높일 목적으로 쓰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이와 관련해 “G20 회원국이 서로 싸우기보다는 협력으로 대응하게 됐다”고 밝혔다. 피에르 모스코비치 프랑스 재무장관도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어떤 종류의 통화전쟁으로도 들어가길 거절한다는 조항에 합의했다”고 부연했다.
엔저는 진행형 100엔대 돌파 초읽기
이에 앞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연말 총선에서 승리한 뒤 일본은행을 향해 경제를 살리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라고 촉구한 바 있다. 아베 총리는 특히 인플레이션을 2%까지 끌어올리라는 목표까지 제시하며 무제한 엔화 방출을 포함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취하라고 일본은행(BOJ)에 요구했다.
또 BOJ가 자신이 요구하는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일본은행장을 해임할 수 있도록 일본은행법까지 개정할 수 있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수모를 당한 시라카와 마사하키 BOJ 총재는 임기가 끝나기 전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어쨌든 아베노믹스로 불리는 아베 총리의 엔저 정책은 실제 시장에서 엔화 가치를 급격히 끌어 내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지난해 9월 달러당 77엔대까지 갔던 엔화 환율은 이후 급격히 상승세로 돌아서 올 연초 86엔대로 접어들더니 2월 18일엔 93엔대까지 올라왔다. 전문가들은 엔화 환율이 달러당 100엔 선을 돌파하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고 있다.
BOA메릴린치가 최근 전 세계 주요 펀드매니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의 43%가 조만간 달러당 100엔 선이 깨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들은 다음에 나타날 가장 큰 거시경제 사건에 대해 1월까지만 해도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이나 스페인의 구제금융 신청 등을 꼽았으나 최근엔 일본 엔화가치의 급강하를 주목하고 있다.
엔화의 급격한 평가절하는 세계 각국에 비상을 걸었다. 일본에선 수출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반면에 한국을 비롯한 경쟁국이나 미국 유럽 등 일본 상품 수입국은 무역수지 상황이 빠르게 바뀌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 때문에 세계 각국이 일본에 대해 환율전쟁 위험을 경고하기 시작했는데 2월 12일 라엘 브레이너드 미국 재무차관이 돌연 “우리는 디플레이션을 끝내고 성장을 촉진하려는 일본의 노력을 지지한다”고 나서 일본에 압박을 가하려던 세계의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 분위기는 모스크바 G20 회의까지 이어져 일본을 견제하기보다는 두둔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월스트리트저널은 17일 “G20 회의에 참석한 회원국들이 환율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발언에 신중하게 접근하기로 합의했다”며 “G20 공동 선언문은 오히려 일본의 공격적 통화 정책에 청신호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래서인지 힘을 받은 아베 총리는 전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디플레이션 탈피 수단으로 BOJ가 외국 채권을 매입하는 방안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나섰다.
아베의 말대로 BOJ가 진짜 외채 매입에 나설 경우 엔화는 급가속을 받아 100엔대로 들어서고 진짜 환율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가 지난 2월 18일 유럽의회 청문회에서 밝힌 내용이 예사롭지 않다.
“최근의 유로 강세가 성장과 물가 안정을 위협하는 요소 중 하나”라고 밝힌 그가 “유로화 환율이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주는 것인지 향후 평가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G20가 일본의 인위적 엔화 가치 평가절하에 온건하게 대처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 아베 총리가 미국이나 EU 중국 등의 우려에도 공격적으로 엔화 가치를 끌어내리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설까.
일본 경제회생 위한 마지막 기회
세계 주요국의 금융수장이나 정치지도자들이 환율전쟁은 물론이고 일본에 대해 공개적으로 경고하는 것까지 자제한 데는 직설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사연이 숨어 있다. 일본은 지금 경제를 살리기 위한 거의 마지막 시도를 하고 있고 이 시도가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할 경우 세계경제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찰스 사이즈모어 사이즈모어 캐피탈 대표는 “일본의 최근 회복은 지난 20년간 이어온 디플레이션적 침체로부터 일본 경제를 띄우기 위한 대규모 통화공급 확대 프로그램과 엔화를 약세로 가져갈 필요가 있다는 아베 신조 총리의 개입에 따른 것이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는 그가 원하는 것에 대해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했다.
디플레이션 덕분에 일본의 차입비용이 매우 낮은 수준에서 머물고 있었기에 자칫 부담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10년 만기 일본 국채 수익률은 0.75% 선에서 머물고 있다. 이 금리가 1% 상승한다면 일본 정부의 차입비용은 세수의 10%를 쏟아 부어야 할 정도란 게 그의 지적이다. 개리 실링 이코노미스트 겸 금융분석가는 “현재 일본의 부채 원리금 상환액은 일본 정부 수입의 43%에 달하며 이는 전체 재정 지출의 25%를 차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일본정부는 지출의 절반 이상을 신규 차입에 의존하고 있다. 신규 차입의 절반은 기존 부채의 원리금 상환에 쓰인다는 얘기다. 끔찍한 것은 일본 정부의 부채가 매년 GDP의 7% 이상씩 쌓이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일본 정부의 부채비율은 GDP의 240% 선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국채 발행의 상당부분을 BOJ가 돈을 찍어 인수하고 있다. 일본 자체가 돈을 찍어 연명하는 셈이다.
초저금리에도 이 지경이니 금리가 올라가면 일본 정부가 급속도로 파산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외환 전문가들은 일본의 금리가 1.5% 정도로 올라가면 숏을 치고 나오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 상황에선 일본 정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원리금 상환 부담이 늘어나 그 즉시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치달을 수 있는 만큼 빨리 손을 터는 게 상책이란 얘기다.
일부 이코노미스트들은 본격적인 글로벌 통화전쟁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그런 상황이 일어나면 미국이 승리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그러나 그 승리는 찬란한 게 아니라 엄청난 상처를 동반한 것이라고 했다.
리먼브라더스 출신인 피터 쉬프 이코노미스트는 “중앙은행이 중병에 걸린 미국 경제를 떠받들고 있는 상황이며 유일한 방법은 달러화를 약세로 이끄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최근 한 컨퍼런스에서 “(글로벌) 통화전쟁 가능성이 있다”며 “다른 전쟁과 달리 통화전쟁의는 아이러니는 (승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미국이 통화전쟁에서 이기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 경제에 대해서도 약간은 비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코노미스트들이 미래가 약간 개선될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 미국의 4분기 GDP는 수축되는 것으로 나타났고 국가부채 위기가 다시 불거질 것 같다고 했다.
“연준은 미국 경제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그는 “그동안 인위적으로 지나치게 낮은 저금리와 양적완화(QE)를 통해 단지 붕괴되는 것을 막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월가 출신이지만 폴 크루그먼 교수까지 그의 견해를 참조할 정도로 이름 있는 피터 쉬프가 이처럼 비관적으로 전망하는 것은 미국 역시 재정상태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부채시계에 따르면 미국의 국가부채는 현재 16조5326억달러로 15조6163억달러 선인 GDP 규모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양적완화에 따른 달러 약세나 셰일가스 특수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국제수지가 개선되지 않는 점도 미국의 전망을 밝게 보기 어려운 요인이다.
유럽 위기 진행, 아시아 주변국 통화 강세 전망
유럽의 경우 국가부채 규모가 아직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크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자금흐름의 경색 때문에 경제가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 ECB가 양적완화를 했으나 독일이 여유자금을 풀기보다 지속적으로 회수함에 따라 주변국에 국한되던 위기가 이제는 유럽 중심부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프랭클린 앨런 와튼스쿨 교수는 “이미 양적 완화로 대규모 정부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영국의 경우 화폐를 발행해 추가로 정부채권을 인수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아시아에선 엔화약세의 여파로 상대적 강세를 보였던 한국의 원화나 대만 달러화, 싱가포르 달러화, 말레이시아 링깃화가 최근 약세로 돌아섰다.
박유나 동부증권 애널리스트는 “일본과 수출 경쟁이 낮고 이에 대한 영향이 적을 것으로 예상되는 아시아 통화가 상대적으로 선호될 전망이다”면서 “인도네시아 루피아나 인도 루피, 필리핀 페소, 태국 바트가 여타 아시아 통화 대비 상대적 강세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