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경제대국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벤 버냉키 의장과 세계 최대 경제블록 유럽의 중앙은행인 유럽중앙은행(ECB) 마리오 드라기 총재가 경기부양을 위해 무차별적인 돈 살포를 선언했다. 이들 중앙은행장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양적완화(QE, Quantitative Easing)라는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을 통해서다. 양적완화는 글로벌 자산시장에서 버냉키 풋(Bernanke Put), 드라기 풋(Draghi Put)을 강화한다. 풋은 옵션시장에서 자산가격 하락 위험을 헤지하거나 혹은 투기적인 목적으로 활용하는 투자기법이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 현물주식을 가지고 있는 투자자가 헤지 차원에서 옵션시장에서 130만원에 삼성전자 주식을 매도할 수 있는 풋을 매수하면 주가가 130만원 아래로 떨어지더라도 130만원에 삼성주식을 팔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때문에 삼성전자 주가가 떨어지더라도 손실을 한정하거나 하락장에서 오히려 이익을 낼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
이 같은 풋에 빗댄 버냉키 풋은 시장이 바닥없는 추락을 할 위기에 처했을 때 버냉키 연준 의장이 금리인하·채권매수 등 경기부양 조치를 단행, 주식 등 자산 가격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려 투자 손실을 막아준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드라기 풋도 버냉키 풋과 마찬가지다. 단순히 정책결정권자가 버냉키 의장에서 드라기 ECB총재로 바뀐 것뿐이다. 드라기 총재가 유로존 붕괴를 막기 위해 사용한 일련의 양적완화 정책도 버냉키 풋처럼 자산 가격 상승을 이끄는 등 시장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QE3로 부의 효과(Wealth Effect) 극대화
지난 9월 13일 버냉키 의장은 시장이 학수고대하던 3차 양적완화(QE3)를 결정했다. 무기한 채권매입 프로그램을 골자로 하는 공격적인 양적완화 카드는 시장기대를 웃돌았다. 3차 양적완화 조치로 ‘유동성 파티가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진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앞서 드라기 총재도 지난 9월 6일 무제한 국채직매입(MOT, Monetary Outright Transactions)이라는 강력한 경기부양 카드를 꺼내들어 순식간에 유로존 금융위기를 잠재웠다.
버냉키 의장과 드라기 총재가 경기부양 카드를 꺼내든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 가계 소비와 기업 투자 확대를 당장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나서 돈을 풀고 돈의 힘으로 경제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겠다는 것.
하지만 단기·중기 목표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버냉키 의장의 3차 양적완화는 단기적으로 주택시장 부양과 주식 등 위험자산 가격 상승을 통한 부의 효과(Wealth Effect) 창출에 맞춰져 있다. 부의 효과란 자산 가격이 상승하면 소비지출이 늘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연준이 발권력을 동원해 돈의 힘으로 주식 값을 띄우고 주택담보증권(MBS) 매입을 통해 모기지 금리를 떨어뜨리면 그만큼 주택 수요 기반이 확대돼 주택 값 상승을 유도할 수 있다.
주택·자산가격 상승 -> 부의 효과 극대화 -> 가처분 소득 확대 -> 소비지출 증가 -> 제품 수요기반 확대 -> 공장 가동률 상승 -> 고용 창출 -> 실업률 하락·경제 성장이라는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겠다는 게 버냉키 의장의 생각이다.
반면 드라기 총재의 국채 직매입 프로그램은 당장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로존 재정위기국 국채금리를 적정수준으로 낮추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드라기 총재의 국채 직매입 발언이 나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스페인 10년물 국채금리는 디폴트(채무상환 불능) 전조로 여겨지는 7%대를 크게 웃돌았다. 국가재정이 사실상 디폴트 상황에 처했던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 등도 10년물 국채금리가 7%를 넘어선 뒤 모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을 받은 바 있다. 7%선에서 국채 발행에 성공하더라도 이자부담이 눈덩이처럼 쌓여 결국 원리금 상환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에서 스페인, 이탈리아 국채금리를 낮추는 게 드라기 총재 입장에서는 급선무였다. 국채 매입 발표 후 스페인 10년물 국채금리는 5%대로 수직 하락했다.
중앙은행 물가안정 포기?
사실 침체된 경기 회복에는 통화정책보다 정부가 재정을 풀어 인프라건설 등에 나서는 재정정책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 통화정책 파급경로는 복잡하고 중간단계에서 은행이 돈을 꽉 쥐고 놓지 않으면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가 반감되지만 재정정책은 곧바로 국내총생산(GDP) 성장률과 고용창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전 세계 대다수 국가의 곳간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확장적인 재정정책을 쓰기 힘들다는 점. 미국의 경우 재정 확대는커녕 오히려 재정 감축에 나서야 할 형편이다. 설상가상으로 얼마만큼 재정적자를 줄여야 할지를 놓고 의회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이견을 보이면서 내년 1월 1일부터 6000억달러 규모의 증세와 정부지출 삭감이라는 재정절벽(Fiscal Cliff)에 직면할 위기를 맞고 있다. 때문에 중앙은행이 적극적으로 경기부양 총대를 메야 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중앙은행은 보통 금리를 가지고 통화정책을 편다. 경제가 과열돼 인플레이션(물가상승) 압력이 높아지면 금리를 올려 자산가격 하락을 유도, 인플레이션을 잡는다. 반대로 경기가 침체하면 금리를 내려 생산·투자활동을 부추긴다.
하지만 미국 연준과 ECB는 금리수단 보다는 직접 시장에서 채권을 사들이는 양적완화를 주요한 경기부양 카드로 활용하고 있다. 기준금리가 거의 제로 수준(유럽 기준금리 0.75%, 미국 0~0.25%)이어서 더 이상 금리인하라는 전통적인 통화정책을 활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권력을 동원해 달러를 찍어내고 찍어낸 달러로 채권을 사들이는 비전통적인 수단을 통해 경기부양에 나서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됐다. 버냉키 의장이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을 어느 정도 용인하더라도 일자리 창출, 성장에 방점을 찍은 것은 상당히 극적이다. 왜냐하면 지난 5월만 하더라도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 교수의 ‘물가상승 용인’ 훈수에 발끈하며 구레나룻의 결투(Battle of the Beards)를 벌였던 게 바로 버냉키 의장이었기 때문이다.
양적완화 불편한 진실 1… 은행 배만 불린다
양적완화가 은행권 배만 불린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7월 이후 1년간 JP모건, 뱅크오브어메리카(BOA), 씨티뱅크, 웰스파고,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등 월가 6개 대형 은행들이 거둔 이익이 630억달러(70조원)에 달한 것으로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월가 대형은행들의 이익이 정점을 찍었던 지난 2006년(830억달러) 이후 가장 큰 이익 규모다. BOA는 지난 1년간 월트디즈니와 맥도널드가 벌어드린 돈을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이익을 올렸다. 4년 전 450억달러의 공적자금을 받았던 씨티그룹은 캐터필러와 보잉사가 벌어드린 것보다 더 큰 이익을 거뒀다.
JP모건은 58억달러에 달하는 파생상품 손실에도 불구하고 지난 1년간 170억달러의 이익을 챙겼다. 앞으로 전망도 좋다. 블룸버그가 수익 전망치를 집계한 결과, 6개 월가 대형은행들이 올 3분기와 4분기에 각각 99억달러, 174억달러의 이익을 챙길 전망이다.
특히 내년에는 이들 6개 대형은행이 올린 이익규모가 758억달러(84조원)에 달할 것으로 조사됐다. 초저금리로 수익을 내기 힘든 데다 자기자본거래와 레버리지(차입)에 대한 규제강화로 고위험고수익 금융상품 투자 확대가 어려운 영업환경 속에서도 월가 은행들이 이처럼 시장기대를 넘어서는 이익을 내는 데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다.
바로 월가은행들이 거둔 수익 대부분이 양적완화 효과로 확대된 예대마진의 결과물이라는 점.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가 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는 MBS를 사들이는 양적완화에 나서면 MBS가격이 상승(금리는 하락)하게 된다. 은행들은 MBS를 그만큼 높은 가격에 팔아치울 수 있다.
이처럼 낮아진 금리혜택이 대출 고객에게도 돌아가야 하지만 월가은행들은 여전히 까다로운 대출조건을 내세우는 등 대출금리는 은행들이 이익을 보는 것만큼 떨어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은행 예대마진(예금·대출 금리 차)이 확대되면서 은행들이 챙기는 금리차익이 더욱 확대되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양적완화 불편한 진실 2… 신통화 전쟁 점화M
브라질 등 신흥국가들은 버냉키 의장 등 선진국 중앙은행장들의 양적완화를 음모론적 시각에서 바라본다.
발권력을 동원해 돈을 푸는 양적완화 조치의 주요 목표 중 하나가 자국 통화가치 약세유도를 통한 자국 수출기업 가격경쟁력 강화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버냉키 의장의 QE3 발표 후 한국 원화는 연일 올해 최고가 경신 행진을 지속하고 있다. 원화는 지난 10월 8일 올 들어 달러대비 처음으로 1100원선까지 상승, QE3 발표 후 20여일 만에 2% 가까이 평가절상됐다. 브라질 헤알화도 불안한 모습이다. 반면 달러화 대비 일본 엔화와 유로화는 큰 변동이 없다.
ECB나 일본중앙은행 모두 미국 연준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양적완화에 나섰기 때문이다. 전 세계 주요 중앙은행들이 경쟁적으로 양적완화를 통한 자국 통화가치 끌어내리기에 나서면서 수출 의존도가 큰 브라질 등 신흥국들이 자국 통화가치 방어를 위해 환시장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글로벌 신통화전쟁(New Currency War)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버냉키와 드라기
버냉키 의장은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미국의 중앙은행 연준 의장이다. 경제가 어려울 때는 헬리콥터에서 돈을 살포하듯 유동성을 늘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초팽창주의적 통화정책을 고수,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번에도 무기한 양적완화 조치(QE3)를 내놔 시장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 총재도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버냉키 의장 못지않은 힘을 발휘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이탈리아 재무장관으로 일할 때 만성 재정적자에 허덕이던 이탈리아를 정부지출 삭감·민영화 등을 통해 구해내 슈퍼 마리오로 불린다. 버냉키 의장과 드라기 총재는 똑같이 매사추세츠 공대(MIT) 경제학 박사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