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면적의 40%를 조금 넘는 카리브해의 섬나라. 상주인구는 4만3000여 명. 그러나 연간 2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곳.
나라 전체 GDP라고 해봐야 우리 돈으로 3조원이 안 된다. 한국 대기업 한 곳의 연간 매출보다 못하다. 그러나 구매력을 감안한 1인당 실질 GDP는 4만3800달러. 제대로 된 생산 기반이 없어 소비재의 90%를 수입하는 나라다. 그러나 이곳엔 인구수의 2배가 넘는 9만3000개 이상의 기업이 소재지로 등록했다. 300여 개의 은행과 800여 개의 보험사, 600여 개의 자산운용사가 진출한 곳이자 1만 개 이상의 뮤추얼펀드의 고향이다.
다름 아닌 영국령 케이맨제도 이야기다.
케이맨제도는 세계사에서 전혀 주목을 못 받았던 나라다. 인근 자메이카나, 쿠바, 바하마 등으로부터도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랬던 이곳이 세금을 벗어던지며 금융시장에서 입버릇처럼 오르내리고 있다.세금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산가들은 홀딱 반하는 존재다. 그러나 과세당국, 금융당국의 입장에선 없어져야 할 정도로 얄미운 존재다.
한국 사람이 이곳에 입국하기는 다소 까다롭다. 영국과는 비자면제협정이 체결돼 있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그러나 여기는 영국령이지만 별도 비자를 받아야 한다. 비자 발급 비용은 그렇다 치고, 절차 또한 까다롭다. 이곳을 방문했던 한 금융계 인사는 “체류기간에 여유를 주지도 않았고 방문 목적을 꼬치꼬치 캐묻는 등 콧대가 아주 높은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케이맨제도는 금융 세계에서는 절대 소국이 아니다.
유럽 재정위기 확산, 미국 국가신용등급 하락 우려나 더블딥 우려가 퍼질 때 우리나라 주식시장을 가장 흔들어 놓은 자금은 조세회피처에 근거를 둔 자금이었다. 지난 7~8월 국내 주식시장에서 가장 큰 규모로 팔고 나간 자금은 룩셈부르크 자금으로 이 기간 동안 1조8866억원이 이탈했다. 다음으로 크게 빠져 나간 자금이 케이맨제도 자금이었다. 케이맨제도 자금은 같은 기간 1조6750억원이었다. 이 기간 동안 전체 외국인 순매도는 7조2385억원이었다. 두 나라 자금이 전체의 49%를 차지한 셈이다.
케이맨제도 자금은 2010년 말까지만 해도 국내 주식 보유액이 9조 2406억원이었다. 그런데 9월 말에는 6조969억원으로 34%나 감소했다. 이는 재정위기로 유동성 확보가 ‘발등의 불’이 된 프랑스(-49.4%)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감소율이다. 위기 시에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전형적인 ‘핫 머니’ 속성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외국인 보유액 중 1.8%를 보유한 케이맨제도는 매도세를 주도하며 외국인 뿐 아니라 국내 주식투자자들의 심리를 흔들어 놨다.
코스닥 시장은 핫머니의 집중 공격으로 더 멍들었다.
지난 8월~9월 코스닥 시장에서 빠져나간 외국계 투자금 중 절반 가까이가 조세회피지역 자금이었다. 외국인들은 코스닥 시장에서 8월~9월까지 7188억원을 순매도(누계 기준)했다. 국적별로는 케이맨제도(1977억원), 룩셈부르크(975억원), 버진아일랜드(421억원) 등 조세회피지역 3개 국가 자금의 순매도는 3373억원을 기록, 전체 외국인 순매도의 46.9%를 차지했다. 특히 케이맨제도 자금은 9월에만 1012억원을 순매도, 국가별 집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차지했다.
3개 국가가 전체 코스닥 총 거래(매수+매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6~17%에 불과하지만 절대금액이 큰 것은 거래 시마다 상대적으로 대량 매도를 했다는 이야기다. 금융 당국은 아일랜드(166억원) 자금 역시 이런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장이 하락세에 접어들자 유가증권시장이나 코스닥시장이나 조세회피지역 자금들의 유출이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들 자금의 실제 전주(錢主, 돈 주인)는 누구일까. 실제 전주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다만 등록된 펀드의 성격을 통해 전주를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대부분이 펀드인데 헤지펀드 비중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 일부는 활동이 없는 비활성 펀드다. 소기의 목적을 다하고 사라진 펀드로 추정된다. 그만큼 생성·소멸이 활발하다는 이야기다. 금융감독원에 등록된 케이맨제도 투자자는 9월 말 현재 2504명이다. 2008년 말까지만 해도 1908명에 불과했던 케이맨제도 투자자는 2009년 말 2087명, 2010년 말 2316명 등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한국에 그만큼 ‘먹을거리’가 많다는 방증이다. 이 중 개인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런 추정도 한계가 있다. 실제 투자자는 자신의 돈이 케이맨제도에 설정된 펀드를 통해 한국에 투자된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거래의 상대방을 모르고 은밀히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열리지 않는 ‘판도라의 상자’가 폭락장에서 잠시 정체를 드러냈다.
8~9월 폭락장에서 자금을 급격하게 회수했다는 것은 그만큼 유동성이 필요한 전주가 뒤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펀드 자금의 소스는 대부분이 유럽과 미국으로 추정된다. 헤지펀드 등 투기성이 강한 자금이 핫머니를 빼가며 폭락장에 불을 붙였던 셈이다. 일부는 하락에 베팅해 추가 이익을 거둬 갔을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과거 유럽·미국 일변도에서 아시아 자금이 서서히 조세피난처를 이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검은 머리 외국인의 비자금’ 또는 ‘한국인의 검은 돈’이 케이맨제도를 토대로 운용되고 있다는 추정이 나오고 있다.
지난 6월 스위스 세금 환급 사실이 알려지며 비상한 관심을 끈 것도 이런 가능성 때문이었다. 스위스 과세 당국은 제3국 국적자의 한국 상장주식 배당세액 일부를 징수해 우리나라 국세청에 환급했다. 이 자금은 케이맨제도 등 조세피난처의 투자금일 가능성이 제기됐고, 특히 한국인의 ‘검은 돈’일 수 있다는 추측이 나왔다.
금융당국 입장에선 이런 자금이 눈에 가시거리나 다름없다. 이런 자금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다. 다만 급격한 자본유출입이 우리 거시경제 건전성에 악영향을 주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