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7일. 중국 전국 27개 지역에서 예정됐던 2차 재스민 집회를 몇 시간 앞두고 원자바오 총리는 네티즌과의 대화를 개최한다. 튀니지발 재스민 혁명의 향기가 중국까지 번지자 정부가 민심 달래기에 나선 것이다. 이날 대화의 주요 화두는 물가였다.
한 네티즌이 ‘물가급등에 생활이 힘들다’고 호소하자 원 총리는 “물가 안정을 중국 경제 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두고 있다”며 “결코 물가 상승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다졌다. 중국에서의 재스민 구호는 민주화에 대한 열의보다는 식량 및 부동산 가격 상승에 따른 사회 불안에서 시작됐다. 미국 소재 인권단체 사이트인 보쉰(www.boxun.com)에서 촉발된 구호가 중국의 민심을 뒤흔든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 다시 살아나던 글로벌 경제에 치솟는 물가가 찬물을 끼얹고 있다. 독재자의 도미노식 붕괴를 이끌고 있는 중동 정정 불안도 인플레이션이 주요 원인이었다. 수십 년간 폭압 정치는 인내할 수 있었지만 배고픔은 참을 수 없었다. 절벽 끝에 몰린 서민들의 분노가 결국 독재자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을 키워준 것이다. 한 청년의 분신자살로 일어난 튀니지 재스민 혁명과 30년 절대 권력인 호스니 무바라크를 몰아낸 이집트 민주화 열풍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이는 비단 개발도상국과 후진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들어서는 경기 회복세가 느리게 나타나는 선진국에서조차 인플레이션의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복합적인 상황이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인플레이션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 지역의 정정 불안으로 국제 유가는 연일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기후 변화로 곡물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곡물값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경기 회복을 위한 각국의 팽창적인 통화정책으로 시중 유동성 폭발이라는 역풍을 맞고 있다. 시중에 풀린 유동 자금은 안전자산인 원자재에 대한 투자로 쏠려 가격 상승을 이끌고 있다.
치솟는 유가… 10% 상승시 GDP 0.3% 하락
최근 들어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치솟는 국제 유가다. 중동의 정정 불안은 도무지 안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튀니지발 재스민 향기는 강렬하다. 튀니지의 민주화 성공에 자극받은 중동·북아프리카 국가들은 ‘다음 차례는 우리다’라는 듯 강렬한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무아마르 카다피 최고 지도자가 유혈 진압으로 반정부 세력에 맞서고 있는 리비아는 물론 알제리, 바레인, 예멘 등지로 재스민 향기는 퍼져가고 있다.
중동·북아프리카는 전 세계 석유의 35%가량을 생산한다. 이 지역의 정치 불안은 유가 상승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올해 들어 국제 유가는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3대 유종인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브렌트유, 두바이유 모두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했다. 특히 브렌트유는 이미 115달러 수준까지 상승했다. 세계 최대의 원유 생산국인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정정 불안이 이어진다면 유가는 다시 한 번 폭등할 가능성이 높다.
‘닥터둠’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주요 원유 생산국으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면 유가는 배럴당 140~150달러까지 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고유가가 지속된다면 일부 유럽 국가들은 더블딥 상황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동의 정정 불안만 문제가 아니다. 지속적으로 늘어가고 있는 석유 수요로 인해서 유가는 장기적인 상승세가 점쳐지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난해 석유 수요는 2009년에 비해 하루당 150만 배럴이 늘어났다. 올해와 내년에도 석유 수요는 일일 150만 배럴 정도 늘어날 것으로 IEA는 전망했다.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의 성장에 따라서 석유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공급의 증가는 미미한 수준이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제외한 국가의 석유 생산량은 매년 비슷한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다. OPEC 국가들이 증산할 수 있는 석유 생산량은 전 세계 수요의 5%대 수준에 그친다. 최근 정치적인 불안을 겪고 있는 리비아와 알제리를 제외하면 이 수치는 2%대까지 떨어진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오일 쇼크가 일어났던 1970년대 후반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높은 유가에 따른 글로벌 경기 침체는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국제 유가가 10% 상승하면 전 세계 GDP는 1년에 0.2~0.3% 감소한다고 분석했다. 이미 브렌트유는 지난해 말 수준에 비해 25%나 상승했고 WTI는 10% 상승했다. 이미 고유가에 따른 경기 침체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곡물값 상승… 식량 위기설까지 등장
곡물 가격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지난 2월 전 세계 식품가격지수는 236포인트로 1월에 비해 2.2% 상승했다. 이는 관련 통계가 작성된 지난 1990년 이후 최고 수준이다. 어쩌다 이 정도 수준까지 이르렀을까. 단순하게 말하면 농부가 곡물을 생산하는 양보다 곡물 소비가 늘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가뭄·홍수 등 기후변화가 일어나면서 작황이 전반적으로 부진했다. 게다가 이머징 국가에서 식품 수요가 급증하면서 식품 가격 상승을 부채질했다. 그동안 식량을 자급자족하던 중국과 인도마저 식량 부족으로 곡물 수입에 나서고 있다. 중국은 미국 전체에서 생산되는 콩의 25%를 수입하고 있을 정도다. 이로 인해 곡물 가격은 폭등하고 있는 것이다.
밀 가격은 지난해에 비해 80% 이상 상승했고 옥수수 가격은 90% 이상 폭등했다. 지난해 역대 최대 생산량을 보였던 설탕 가격마저 31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게다가 초콜릿 원료인 카카오의 전 세계 생산량 40%를 책임지는 코트디부아르마저 정정 불안에 휩싸이면서 가격이 32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휘발유 가격 상승으로 바이오 연료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그 원료가 되는 곡물가격 상승을 부채질하는 것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작물이 바이오 에탄올 원료로 쓰이는 옥수수다.
향후 전망도 그리 밝지는 않다. 본격적인 식량 위기설까지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바이오 연료 개발까지 맞물려 곡물 수요는 상승하고 있지만 마땅히 공급을 늘릴 만한 곳이 없다. 미개발 농지도 그리 많지 않은 데다 물 부족 등 자원 부족이 심화되면서 농지 개발의 발목을 잡고 있다. 게다가 올 여름에는 콩과 옥수수를 대량 생산하는 미국 중서부 지방의 가뭄까지 우려되고 있다. 지난 1988년 미국 중서부 지역에 가뭄이 강타했을 때 옥수수 가격은 31%나 급증한 적이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식량 과잉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며 식량 위기설을 제기했다.
케이스 콜린스 전 미국 농림부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기후변화로 인해 이미 곡물 가격은 심각한 수준까지 상승했다”며 “당분간 이와 같은 상승세는 지속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이머징 국가에서 선진국으로 번져가는 인플레이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기 회복을 위해 낮은 금리를 유지하던 각국의 팽창적 통화정책도 인플레이션을 자극했다. 특히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미국은 지난해 2차 양적완화조치로 6000억 달러(약 672조원) 규모의 국채 매입에 나섰다. 시중에 풀린 달러는 유가와 원자재 투자로 이어지면서 가격 상승을 유도했던 것이다. 지난해부터 상승세를 보였던 금값은 올해 중동 정정 불안 등까지 겹치면서 온스당 1400달러를 훌쩍 뛰어넘어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이제 인플레이션 문제는 비단 개발도상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경기 회복이 완연하지 않은 선진국까지 인플레이션 공포에 휩싸이고 있다. 신흥국이 지난해부터 경기 회복에 따른 수요 측면의 인플레이션으로 고생하고 있다면 선진국에는 올해 고유가 충격으로 공급 측면의 인플레이션이 나타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1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기 대비 1.6%로 지난해 5월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유럽도 1월 CPI 상승률이 2.4%를 나타내면서 지난해 8월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공급 측면의 인플레이션은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가 중요하다. 유가 및 원자재 가격이 단기적 상승에 그친다면 근원물가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 각국은 낮은 금리를 유지하면서 경기 회복을 도모할 수 있다. 하지만 상승세가 장기화되면 선진국은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유가 충격은 소비자의 구매력을 떨어뜨리고 기업 수익을 악화시킬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팽창적 통화정책을 유지하던 통화당국은 예상보다 빨리 긴축정책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 경기가 다시 한 번 곤두박질치는 ‘더블딥’ 상황까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루비니 교수는 “유가 등 원자재 가격 상승세가 지속될 경우 선진국 경제의 스태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질 것으로 우려된다”고 진단했다.
‘물가 잡기’는 각국 최우선 경제 정책
물가 잡기는 전 세계 모든 국가의 최우선 경제정책 과제다. 중동 국가의 사례에서 경험했듯 물가 불안은 현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 총리가 직접 네티즌과의 대화를 통해 민심 달래기에 나섰던 중국은 금리 인상을 단행했을 뿐 아니라 위안화 절상, 은행대출 억제 등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해 시중은행 대출이 당초 목표치인 7조5000억 위안을 초과한 7조9500억 위안을 기록하면서 대출 억제를 위해 대출 및 예금금리를 지난 10월 이후 세 차례나 인상했다. 식품 투기를 방지하기 위해 시장점유율이 50% 이상이거나 2개 기업 합계 점유율이 3분의 2가 넘는 기업에 대한 담합행위를 집중 감시하고 있다. 또 원 총리는 2015년까지 주택 3600만 가구를 추가로 공급해 집값도 잡겠다고 공언했다.
과거 음식의 주원료인 양파 가격의 상승으로 정권 교체까지 경험했던 인도 정부도 물가 잡기를 최우선 과제로 두고 있다. 인도 정부는 지난 1년간 7차례 금리를 인상했지만 식품 가격을 중심으로 물가 상승세가 이어지자 주요 식품의 수출 규제까지 동원했다.
기준 금리를 11.75%까지 인상했던 브라질 정부는 최근 수출 경쟁력 저하라는 부작용이 제기되자 유동성을 억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점진적인 재정지출 축소와 대출 억제를 통해 인플레이션 억제와 수출 경쟁력 저하 방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복안이다.
유럽연합(EU)과 미국에서도 금리 인상론이 제기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 일부 정책위원들은 올해 여름 전에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토마스 호니그 미국 캔사스시티 연방은행 총재는 “미국이 양적완화정책을 유지하기보다 기현제 제로 수준의 정책금리를 1%로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