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과 10월 두 달간, 파리를 포함해 프랑스 각지가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가두시위와 폭력 사태로 몸살을 앓았다. 11월6일의 8차 대규모 시위를 경계로 반대파의 저항은 거의 수그러들었다. 시위의 선봉에 섰던 공산당계 노조 노동총동맹(CGT)은 “전투에서 패했지만 전쟁에서 패한 것은 아니다”며 지속적 투쟁을 암시하지만 사회당계 노조 프랑스민주노동동맹(CFDT) 등 온건 노조는 사태의 수습 국면에 대비하고 있다. 이번 사태를 강 건너 불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도 머잖아 비슷한 일이 닥칠 것으로 예견되기 때문이다. 프랑스 연금 개혁의 배경과 내용,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정리해본다.
프랑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연금 개혁?
시위가 거셀 때는 드골 전 대통령을 퇴진 위기로까지 몰고 갔던 1968년 5월 시위를 연상시켰다. 이번에도 그때처럼 학생을 포함한 청년층이 근로자와 합세해 시위에 나섰다. 하지만 시위대 요구는 그때와 너무 달랐다. 5월 시위 때는 드골 대통령의 권위주의 통치 스타일에 대항해 인간적 자유를 요구했지만 이번에는 실업과 연금 등 실용적 경제 이슈에 대한 불만 해소였다. 요구가 수용될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해서인지 시위 양태도 훨씬 폭력적이었다. 물론 지난 20여 년 사이에 늘어난 이민과 외국인 근로자, 이들에 의한 도시 주변부에서의 불법 행위와 당국의 묵인, 프랑스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기회 박탈과 차별 등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니콜라 사르코지(Nicolas Sarkozy) 대통령과 집권 여당 국민운동연합(UMP)이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이번 개혁도 1995년의 시라크 연금 개혁처럼 좌초했을지 모른다. 당시 시라크 정권은 대형 트럭 운전사 등의 연금 수급개시연령을 일반 근로자 수준으로 높이려 했으나 강력한 저항에 밀려 뜻을 접은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재정·경제 개혁에 관한 EU 정상회의’와 국제 금융시장 등 프랑스 안팎에서 연금 개혁을 포함한 강도 높은 재정 개혁 압력이 가해졌기 때문에 사르코지가 피해가기 힘들었다. 여기에 임기 후반기에 접어든 사르코지가 2012년의 대선을 의식해 핵심공약의 하나인 연금 개혁에 승부수를 던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강공책의 배경으로 지적될 수 있다.
주지하듯 그리스와 포르투갈 등은 막대한 정부 부채로 국가신용이 하락하면서 국채 가격이 떨어져 이들 나라 국채가 투기 세력인 헤지펀드의 집중적 투기 대상이 됐다. 이들 국가에 대한 EU 차원의 지원책이 마련되면서 헤지펀드의 관심은 스페인, 프랑스, 영국 국채로 집중되고 있다. 프랑스는 9월16일 국채 입찰을 통해 85억 유로를 조달하는 등 아직까지는 국채 가격이 안정돼 있고 평균낙찰금리도 전회 입찰 때보다 낮아졌다. 그 배경에는 최근 약 100억 유로의 국채가 상환기를 맞았고 이로 인해 프랑스 국채에 대한 재투자 수요가 컸다는 사실이 있다.
하지만 연금재정 적자로 정부 재정 적자가 조만간 EU 허용 한도인 GDP 대비 3% 기준을 넘어서고 다른 대책이 없을 경우 정부 재정 적자는 GDP 대비 8% 수준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는 EU 붕괴와 프랑스를 포함한 EU권 경제의 대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EU권 맹주를 자처하는 프랑스가 연금 개혁을 미룰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해졌다.
개혁의 핵심내용과 평가
이번 개혁의 핵심은 세 가지다. 2018년까지 조기노령연금(Minim -um Pension)의 수급개시연령(즉 퇴직연령)을 60세에서 62세(주요국 평균 65세)로, 만액노령연금 수급개시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늦춘다. 이어 만액노령연금 수급을 위한 가입기간을 40년6개월에서 41년3개월로 9개월 늘린다. 그리고 공무원연금의 보험료율(기여율)을 민간 근로자와 같게 바꾼다. 새조치는 2011년 7월1일부터 시행되며 단계적으로 이행한다.
프랑스의 연금 수급개시연령도 전에는 65세였는데 1983년 미테랑 대통령이 60세로 낮춘 바 있다. 따라서 이번 개혁은 고령화와 경제 성장률 둔화를 고려하면 합리적인 개편으로 이해될 수 있다. 62세(및 67세)로 늦추는 것을 두고 EU 내 전문가들은 프랑스 개혁 강도가 약하다고 비판한다. 이번 개혁 조치로 근로자들의 연금액은 현 수급자보다 최대 20% 정도 줄어들 전망이다.
금년도 연금재정 적자는 323억 유로(49조원)로 예상되는데 10년 후에는 그 규모가 450억 유로(69조원)로 커진다. 이번 개혁에도 불구하고 2018년이면 연금재정이 다시 적자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되므로 이번 개혁은 임시방편적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연금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2050년까지 GDP의 3% 상당액이 매년 지원돼야 한다(표 참조).
개혁 작업의 사전 포석
사르코지는 2007년 5월의 취임 후 연금 수급개시연령을 늦추는 것을 핵심 정책의 하나로 내세워 그 실행을 준비해 왔다. 야당과 노동단체는 그러한 움직임을 간파하고 지속적으로 반대 시위에 나섰다. 사르코지는 ‘일하는 프랑스’를 기치로 내걸고 역대 정권이 노조 반발로 엄두를 내지 못했던 공기업연금(가입기간 2년 반 연장, 2007.11)과 주 35시간 근무제(개정 2008.7) 등에 칼을 들이댔다. 취임 초 제시한 300여 건의 개혁 과제 중 70% 이상이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취임 후 3년 반이 지난 지금 지지도는 30% 수준을 맴돈다.
선거참모이자 오른팔 같은 존재로 노조와 대화채널을 갖고 있는 피용(Francois Fillon)을 총리로 임명해 3년 반을 지내오면서 연금 등 각종 개혁을 추진해왔다. 피용은 시라크 정권에서 네 차례 장관을 역임하였고 사르코지처럼 엘리트 코스인 국립행정대학원이 아닌 일반 법학도 출신이다. 피용은 사르코지와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신뢰관계를 구축하며 개혁철학을 공유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듣겠다. 변화중인 프랑스에는 모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이에게) 손을 내미는 정신으로(in a spirit of outreach) 일을 풀어갈 것이다”는 취임사대로 사르코지 개혁을 원만히 떠받치고 있다.
지난 3월21일의 지방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대패한 후 사르코지는 당내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일부 장관을 교체했지만 피용은 안고 갔다. 대신 선거에서 패배한 연금 개혁 담당 노동장관 다르코(Xavier Darcos)를 전격 교체해 자신의 연금 개혁 포석을 다졌다.
새 노동장관에 등용된 이는 당내 재정 담당이자 시장주의자인 예산장관 뵈르트(Eric Woerth)였다. 그는 대선 때 캠프에서 회계를 맡았고 그 후 집권 여당의 재정 책임자로 일해 왔다. 그런데 지난 7월 뵈르트가 대선 때 로레알 상속녀인 릴리안 베탕쿠르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사르코지의 연금 개혁의 걸림돌이 됐다. 이 사건은 지금 수사 중인데 사르코지는 뵈르트로 하여금 여당 재정 담당을 사임하고 노동장관으로서 연금 개혁에 매진토록 주문했다.
사르코지의 의도대로 피용과 뵈르트는 연금개혁법안의 국회 통과에 기여했다. 노조와의 대화채널을 가진 피용은 11월14일 개각에서도 유임돼 법안 통과 후의 수습작업을 지휘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세력들이 대통령과 정부에 책임있게 행동해줘 감사하다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던 뵈르트는 여당 사무총장 출신인 자비에 베르트랑으로 교체되었다.
연금 개혁의 정치학
공기업 등 공공부문 근로자 주도의 파업과 시위는 초기에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조사 대상자의 60%가 연금 개혁을 반대하고 70%가 파업을 지지한 반면 사르코지 지지율은 정권 발족 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파업이 한 달 반 정도 지속하면서 시민의 불편이 가중되고 폭력행위가 난무하고 국회에서 큰 표 차로 법안이 통과되자 파업 동력이 급속히 약해졌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 “(공적)연금은 정치다”는 말이 실감난다. 제도 운영의 초반에는 경제와 수리논리로 풀어갈 수 있지만 제도가 일정부분 성숙되면 이후 제도 개편은 정치논리로 풀어야 한다. 이는 대부분 국가의 공적연금이 청장년층 세대의 부담으로 노인세대를 부양하는 ‘부과 방식’으로 짜였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선진국 중 공공부문 근로자가 가장 많은 국가 중 하나이고 이들의 정치적 파워가 어느 나라 노조보다 세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그동안 미국, 영국, 독일, 일본보다 높은 연금급여 수준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이들이 저항하는 것은 연금 개혁이 일차적으로 복지 수준을 낮추지만 결국 ‘복지국가’라는 더 큰 목표까지 흔들 수 있다는 점을 내다보기 때문이다. 사르코지가 스웨덴, 덴마크, 영국, 독일 등이 지난 20여 년 사이에 추진해온 복지 지출 삭감과 재정 건전화 작업을 뒤따를까 경계한다. 공공부문 노조는 시장경제 활성화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협상을 통한 실용주의 노선보다 명분과 이념 우선주의 노선에 매달린다. 여기에 강성 보수파인 사르코지류 막장정치(?)에 대한 반발이 더해져 파업과 폭력시위가 예상외로 확산됐다.
이번 파업은 EU권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재정 건전화 정책에 대한 항의행동 중 최대 규모였다. 하지만 차기 대선이 2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사르코지는 양보하지 않았다. 낮은 지지율에도 노조와 야당으로 하여금 연금개혁안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EU권 압력이라는 외압이 있었지만 해묵은 난제를 풀어냄으로써 재선을 앞두고 당 안팎에서 입지를 강화할 수 있게 됐다. 나아가 이번 일이 그간의 일부 좌파 성향 정책이나 좌파계 인사 등용에 당혹스러워 하던 그의 우파 지지자들을 단합시킬 것이다. 제1야당인 사회당은 지난 3월의 지방선거 승리에도 아직은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 전 대통령 후보 세골렌 루아얄(Ségoléne Royal)의 지역구(Poitou-Charentes) 압승으로 오브리(Martine Aubry) 제1서기와의 대선후보 지명을 놓고 갈등이 예견된다.
정년 연장 반대? 고교생이 나섰다?
시위대가 정년 연장을 반대하는 것이 우리에게 다소 의아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국내에서는 정년을 연장하지 못해 안달나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프랑스는 우리와 달리 고등학교나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18세 이전의 이른 나이에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이들이 상당수다. 이들에게 연금 수급개시연령(즉 정년) 연장은 고통스런 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등 서구인들은 60세 넘어 일하는 것은 반가워하지 않는다. 고령기 취업은 노후 저축이 부족해 취업소득이 꼭 필요한 이들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이번 개혁으로 62세(혹은 67세)에 달하기까지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반가워할 사람은 많지 않다. 실제로 노조와 야당의 거센 반대로 당초 안에 들어있던 18세 미만 취업 개시자의 연금 수급개시연령 연장 계획이 최종법안에서 수정돼 14, 15세 개시자는 58세, 16, 17세 개시자는 60세로 낮춰진 바 있다.
미성년자인 고교생이 동맹해 연금 개혁에 저항하고 나선 것도 우리에게는 다소 생경스런 모습으로 비춰졌다. 하지만 프랑스 연금의 구조를 이해하면 그들의 행동을 납득할 수 있다. 프랑스 연금은 앞에 지적한대로 부과방식으로 연금재정 적자가 커지면 청장년층 보험료와 세 부담이 는다. 프랑스 연금이 정상운영되려면 매년 GDP의 3% 상당액이 추가로 지원돼야 하는데 그 부담은 고스란히 지금의 고교생 등 청년층 부담 증대로 이어질 전망이다. 아울러 퇴직연령 연장이 청년층 실업 증대를 초래할 것이 또 다른 이유의 하나다. 26%에 달하는 청년 실업률이 더 높아질 수 있다.
프랑스 한 노동자가 사르코지 대통령 마스크를 쓴 채 시위하고 있다.
프랑스 연금 개혁의 메시지
프랑스의 공적연금, 고용보험, 공적부조 등의 사회보장제도는 우리는 물론 꽤 복잡하다는 일본보다 더 복잡하다. 직업 종류에 따라 적용 제도가 달라 직선적 비교가 힘들다.
이러한 점을 이용해 지역이기주의가 작용해 사회보장 지출이 증가하고 지역 간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 문제점이 지적돼 왔다. 2003년의 대규모 연금 개혁에도 공무원연금, 공기업연금 우대구조가 지속돼 이번 개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 연금 개혁에도 2018년이면 다시 연금재정이 적자로 돌아선다. 그래서 프랑스 연금 개혁은 스웨덴, 독일, 영국 등 EU권 타국의 그것에 비해 미흡하다고 비판받고 있다.
다만 단계적이긴 하지만 지역 간 연금제도의 불공평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바뀌고 있고, 지속가능한 연금제도 유지에 가입자와 수급자의 (추가적) 양보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이해 관계자들이 공유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번 개혁은 프랑스는 물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우리도 공무원연금과 국민연금이 다소간의 격차가 있다는 점에서 이를 해소하는 것이 필요하고,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부과방식으로 운영되는 공무원연금의 재정적자 보전액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가입자와 수급자의 양보가 필수다. 연금 개혁 저지에 실패한 일부 노조는 “On sen Śouvindra(우리는 이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고 외치고 있다고 한다. 2012년 대선 때 보자고 다짐하고 있는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노조 등 반대파가 마땅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는 점이다.
베이붐 세대의 대거 퇴직으로 연금재정 악화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고용주 보험료 부담 증대’를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일자리 창출과 맞물려 실현 가능성이 약했다. GDP 중 기업(인) 몫인 영업잉여(이윤; 프랑스의 경우 17%)에 과세하자는 주장은 일면 타당해 보이기도 하지만 기업과 국가의 성장 잠재력을 잠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히 접근해야 할 사안이기 때문이다.
“파이는 공평하게 나누고, 노동시간도 나눠 현직 근로자는 조금 덜 일하고 실업자가 일할 수 있도록 하자”는 노조의 제안은 분명 매력적이다. 다만 지금의 프랑스 상황에서 사르코지가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일 뿐이다. 노조의 제안에 따르기에는 프랑스의 인구구조와 국내외 경제 여건이 과거와 너무 달라져 버렸다. ‘연금과 일자리’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일국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