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국 시장이 처음 열렸을 때 우리나라 기업들은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10억 인구 중국에서 신발 한 켤레씩만 팔아도 얼마야?’라며 중국 내수시장의 엄청난 잠재력을 내다보고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까지 진출을 서둘렀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글로벌 기업 또는 한국 기업이 판매하는 고품질의 ‘고가 제품’을 살 수있는 중국인들이 얼마 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중국의 실제내수시장 규모는 10억 명이 아니라 불과 몇 천만 명 또는 몇 백만명이었던 것이다.
인도 시장도 과거에는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중반 인도에 진출했던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진출 초기에 기대와는 달리 판매가 부진해 애를 먹었다. 특히 저가제품을 포함한 라인업으로 시골 구석구석까지 파고들며 공격적인 현지화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던 LG전자와는 달리 고부가가치 전략을 펼쳤던 삼성전자의 경우 10년고생하다 최근 들어 자신들의 프리미엄 전략이 빛을 발휘하는 것을 느끼고 있다.
한편 2000년대 초반 SK텔레콤은 인도 바르티(브랜드명 에어텔)로부터 사업협력 요청을 받았으나 시장 잠재력이 낮다고 거절했다. 바르티가 1억4125만 명의 가입자를 둔 인도 최대 이동통신사(시장 점유율 21.1%)로 부상한 지금 SK텔레콤은 어떤 심정일까?2010년 8월 말 현재 인도의 휴대전화 가입자 수는 무려 6억7060만명이다. 아주 저렴한 단말기 공급에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이동통신 요금으로 ‘누구나’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인도 정부는 휴대전화 가입자 수가 2015년에 11억 명을 돌파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제는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그야말로 11억 인구를대상으로 ‘하나씩만 팔아도’가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렇게 상황이 달라진 원인은 무엇일까? 물론 인도의 1인당GDP가 2000년 450달러에서 2009년 1060달러에 이를 정도로 늘기는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업들이 마케팅 전략을 바꾸었기때문이다. 즉 인도의 농촌 시장과 소득 피라미드 하층부(BOP)의엄청난 잠재력을 인식한 일부 선구적인 기업들이 혁신적인 마케팅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초거대 시장을 창출할 수 있었다.
BOP 시장의 중요성을 최초로 주장한 C.K. 프라할라드
C · K프라할라드 교수
1990년 게리 하멜과 함께 핵심 경쟁력(Core Competence) 개념을발표하면서 세계적인 경영 구루로 알려진 인도계 C.K.프라할라드(1941~2010) 교수는 1995년부터 한 가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우리는 세계의 가장 빈곤한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기술, 경영의 노하우, 투자 자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 세계에 만연한 빈곤과 권리 박탈 문제에 대해 아주 작은 도움조차 주지못하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왜 우리는 빈곤층과 더불어잘 사는 자본주의를 창조해낼 수 없는 것일까?”
이런 고민과 오랜 연구 끝에 프라할라드 교수는 ‘소득 피라미드 하층부의 부(the fortune at the bottom of the pyramid)’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소득 피라미드의 하층부, 즉 BOP는 구매력 평가기준으로 1인당 GDP 1500달러 이하 또는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사는사람들을 포함한다. 이 저소득층 인구는 전 세계적으로 40억 명에달하고 인도에는 최소 7억~8억 명이 존재한다. 맥킨지는 인도의가계소득계층 피라미드에서 하단 2개 계층의 가구가 2억5390만가구로 전체의 74%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한 가구당 4명으로 환산하면 무려 10억 명이 넘는다.과거 이 저소득층 시장은 글로벌 기업들에 의해 무시돼 왔다.
그러나 선진국 내수시장과 개도국의 대도시 시장조차 점차 포화상태가되자 선구적 기업들이 고민하기 시작했다.가장 실험적인 회사는 일용생활품을 판매하는 다국적기업 유니레버의 인도 자회사인 힌두스탄 유니레버(Hindustan UnileverLtd.: HUL)였다. HUL은 수송 인프라가 열악한 거대한 인도 땅에서 기존 방식으로 시골 마을들을 공략하기 위한 유통망을 확보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샥티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는 시골 마을에서 적당한 여성들을 선발해 중간 판매자로 훈련시켜 일가친척이나 동네 사람들에게 제품을 소개, 판매하게 했다. ‘샥티 암마(Shakti Amma: 힘 있는 엄마)’라 불리는 이 여성들은 마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어떤 제품에 대한 욕구가 있는지 등을 HUL에 제공하고, 마을 사람에게는 제품의 특성과 사용 방법을 알려주고 교육받은 여러 가지 정보나 지식들을 교육시킨다. 이런 샥티 암마들은 HUL로부터 매달3000~7000루피(65~155달러)를 받으며 가족과 이웃들을 새로운 소비자로 만들어 내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저소득층 시장 개발의 ‘3A 원칙’
(좌) 인도 저소득층의 생활 / (우) 인도 델리에 위치한 삼성전자 매장(왼쪽)과 LG전자 매장
여러 사례들을 분석한 후 프라할라드 교수가 제시한 저소득층의구매력 개발 ‘3A 원칙’은 구매 가능한 가격, 접근성, 이용 가능성이다. 첫 번째 ‘구매 가능한 가격(Affordability)’은 일회용 상품이든새로운 구매 시스템이든 품질이나 효율성이 떨어지지 않는 알맞은가격을 말한다. 예를 들어 부유층은 편리를 추구해 샴푸, 케첩, 아스피린 등을 살 때 대용량을 선호하지만 빈곤층은 수입을 예상하기 힘들고 많은 경우 하루 일당에 의존해 산다. 따라서 이들은 현금이 있을 때만 구매하고 그날그날 필요한 품목에 대해서만 지출한다. 이런 저소득층의 소비 특성을 파악한 후 기업들은 판촉 차원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일회용’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이 일회용 혁신이 저소득층 시장을 휩쓸고 있다.
인도에서는 0.5루피(약13원)하는 샴푸, 제과류, 성냥과 함께 1루피짜리 소금, 케첩, 비스킷, 과일음료가 판매된다. 또한 2루피로 판매되는 세제, 비누, 잼,조미료와 함께 5루피짜리 치약, 색조 화장품, 빵, 식용유, 로션, 향수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두 번째로 ‘접근성(Acces)’은 앞에서 언급한 HUL의 샥티 프로젝트를 통한 직접 판매와 같이 저소득층의 직업이나 사는 장소, 구매가능 시간, 마을의 고립성 등을 고려해 제품이나 서비스의 유통 전략을 수립해야 함을 말한다.
세 번째 ‘이용 가능성(Availability)’을 높이기 위해서는 저소득층의소비 특성과 생활 및 구매 환경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제품을 혁신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그동안 전기, 수도, 도로 등 기초 인프라가갖춰지지 않은 시골 마을은 판매 불가 지역으로 분류됐지만 이제는 이를 극복하는 아이디어 싸움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시골 소비자들의 휴대전화 배터리 충전을 위해 트럭에 배터리를 싣고 이동하면서 1회당 5루피를 받고 충전해 주고 있다. 삼성전자도 전압 안정기가 필요 없는 냉장고를 개발하고, 수질이 좋지 않은 농촌에서 사용 가능하도록 실버나노 기술을 도입한 반자동 세탁기를 출시했다.
한편, 저소득층이 아주 값싼 제품만을 구매하는 것은 아니다. 가격에 민감하기는 하지만 구매가치도 고려하며 제대로 브랜드를 인식한다. 인도에서 가장 신뢰받는 타타그룹의 자회사인 타이탄 인더스트리즈는 연간 보석 장신구의 60%를 소비하는 소도시 및 시골 시장을 타깃으로 2005년 ‘골드플러스(Gold Plus)’라는 브랜드를 출시했다. 이후 시골 가게에서 구매하던 농촌 사람들이 품질이나 가격을 더 믿을 수 있는 타타그룹의 타이탄 보석 제품을 구입하고 있다.
인도에서 BOP 시장 무시하고 성공할 수 없어
2008년 하반기 이후 불어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로 주로 조직화한(Organized) 분야에 종사하는 도시민의 소비가 직격탄을 맞자 인도 기업들은 농촌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승용차 1위 업체인 마루티스즈키는 1983년부터 자동차 판매를 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지방도시와 농촌에서 성장의 열쇠를 찾았다. 3년 전 ‘모든 집에 마루티를’을 장기 비전으로 정하고 지방도시와 농촌 지역의 농부, 교사, 은행원,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타깃 마케팅을 하고 있다. 지방 딜러망과 영업인력을 확충하고, 지방 금융권과 제휴해 할부금융을 활성화했다. 이런 노력 끝에 마루티는 2009년 상위 10개 도시에서 시장 점유율 49%를 보인 반면, 상위 30개 도시 이외 지역에서는 58%라는 높은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다. 인도 승용차업계 2위인 현대자동차도 이에 맞서 전국 딜러망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작년 289개에서 금년 말까지 320개로 늘릴 계획이다.
최대 이동통신업체인 바르티도 2007년 말부터 농촌 시장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휴대전화의 도시 시장 침투율은 80%에 달해 이미 성숙화한 반면 농촌 지역 침투율은 10~12%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규 가입자의 60~70%가 농촌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바르티는 도시 지역에서 한 달간 유효한 30루피 충전 쿠폰을 농촌 지역에서는 10일간 유효한 10루피 단위로 판매하고 있다.
타타 모터스의 경차 ‘타타 나노’
타타그룹은 보석 장신류와 같은 소비재 분야뿐 아니라 서민들을 위한 10만 루피(약 250만원) 승용차인 나노(Nano)를 자체 개발해 성공적으로 출시했다. 이는 이후 도요타, 닛산, 포드 등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이 일제히 인도 시장에서 초소형 자동차를 개발해 출시하도록 하는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아가 타타그룹은 39만~67만 루피(약 1000만~1700만원)의 서민용 초저가 주택(나노 주택)도 건설하여 분양하기 시작했다.
인도에서 소득 피라미드 하층부 시장을 공략하는 마케팅 전략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비누, 치약, 샴푸 등 일용소비재에서 휴대전화, 가전제품, 자동차, 생명보험, 주택에 이르기까지 전 업종으로 확대되고 있다. 더욱이 피라미드형 소득구조가 앞으로 점차 다이아몬드형으로 발전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우리 기업들은 인도 소비시장의 이런 특성과 빠른 변화를 주시하며 대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