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비자 얼마나 바가지 써왔나
# 올 9월 백년가약을 앞두고 준비에 여념이 없던 박성준(32) 김성연(32) 동갑내기 커플은 결혼일자를 미루기로 했다. 발단은 예비신랑 박씨가 보다 합리적으로 신혼살림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 이후로 결혼을 연기하자고 요청한 것. 부모님과 협의해 기껏 좋은 날짜를 받아 예식장 예약만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박씨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예비신부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고성을 동반한 치열한 토론은 일주일간 계속됐다. 결론은 적은 예산으로도 여러 살림살이를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고 설득한 예비신랑 박씨의 승리였다. 김씨는 TV구입비용을 아끼면 로봇청소기에 탄산수제조기까지 장만할 수 있다는 예비신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내년 1월 말로 결혼식을 미뤘다.
# 외국제품을 선호하는 A씨. 그는 매일 아침 수입 전기면도기(22만3650원)로 수염을 깎고, 주말마다 수입 등산화(16만9000원)를 신고 산에 오른다. 수입 진공청소기(29만4000원)로 청소를 마치고 수입 립스틱(2만1150원)을 바른 A씨의 아내는 외제 유모차(56만9500원)에 아기를 태우고 와인(11만원)을 사러 쇼핑을 나갔다. 이때 드는 총비용은 138만7300원. 그러나 관세청에서 공개한 이들 물품의 수입가격은 총 30만7809원에 불과했다. 각 제품의 수입가격이 국내 평균가격에 비해 적게는 2.5배에서 많게는 14배 넘게 부풀려있던 것이다. 조금 보태 이야기해 보면 외국에서 모든 물품을 수입원가로 구매할 수 있다면 진공청소기 한 대 가격으로 이러한 생활을 모두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최근 웹이나 SNS를 통해 유행하는 단어 중에 ‘호갱’이란 말이 있다. 호구 노릇하는 어리석은 고객이란 뜻이다. 그동안 글로벌 기업은 물론이고 국내기업들에게 한국 소비자들은 이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다른 국가와 비교해 유달리 높은 가격에 제품을 내놔도 한국 소비자들은 군소리 없이 지갑을 열었기 때문이다. 수입업자들은 국내에 없는 브랜드의 독점수입권만 얻으면 명품으로 포장해 심한 경우 수입가격의 30배 넘는 판매가를 책정해 장사를 해왔다.
전 국민을 상대로 바가지를 씌우는 기업들에 대해 정부의 태도는 소극적이었다. 노골적으로 가격 차별정책을 펼치는 기업들에 제동을 걸지 못했다. 자율적인 경쟁으로 수입품의 가격을 낮추기 위해 1995년 도입한 병행수입 제도 역시 정책적 한계로 유명무실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에 ‘호갱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수사가 붙게 됐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양상이 변했다. 눈뜨고 당해온 소비자들은 하나둘 해외직접구매(이하 해외직구)로 눈을 돌렸다.
수입품은 물론이고 국내브랜드 제품마저 국내가격의 반도 안되는 것들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입소문은 열풍으로 이어졌다.
언론들은 앞다퉈 해외직구의 유불리를 따지기 시작했다. 어떤 방식으로 더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가이드식 기사들이 쏟아졌다. 한편에서는 몇몇 사례를 들어 별다른 가격 차이가 없다고 ‘일시적인 유행’이라고 의미를 절하하는가 하면 국부유출을 이유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해외직구의 유불리를 따지기 전에 소비자들이 해외직구에 눈을 돌리게 된 직접적인 원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소비자를 상대로 바가지 영업이 가능했던 이유를 찾고, 부조리를 뿌리 뽑을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