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생. 한국외국어대학을 졸업하고 1978년 HD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런던지사, 울산대를 거쳐 2010년 HD현대오일뱅크의 초대 사장으로 부임했다. 2014년 HD현대중공업 대표이사를 역임했고 2019년 HD현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올 3월 주주총회에서 연임이 확정됐다.
“권오갑의 리더십엔 특별한 게 있다.”
올 3월, HD현대의 주주총회에서 권오갑 회장의 재선임안이 통과되자 재계는 권 회장의 리더십에 주목했다. 전문경영인으로서 그의 리더십이 그룹 오너에게도 인정받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룹 내부에선 권 회장이 2대에 걸쳐 오너가의 신뢰를 받는 이유가 경영 능력 때문만은 아니라고 평가한다. 특유의 신중한 언행과 겸손한 처신을 신뢰의 배경으로 꼽는 사람도 적지 않다. 권 회장은 1978년 HD현대중공업 플랜트영업부로 입사해 회장에 오른 정통 현대맨이다. 입사 후 런던지사, 울산대 법인 사무국장, HD현대중공업 서울사무소장을 지내고 2010년 HD현대중공업이 인수한 HD현대오일뱅크의 초대 사장을 역임했다. 권 회장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그를 대표이사로 발탁한 후 줄곧 경영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권 회장이 취임할 당시 HD현대오일뱅크는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에 밀려 정유 업계 만년 하위였다. 하지만 이후 석유화학과 윤활기유, 유류 저장 사업 등 다양한 신사업에 진출하며 업계 선두권으로 도약한다. 그 시절 권 회장은 과감한 투자 결정과 조직문화 혁신, 소통의 리더십으로 영업이익이 1300억원에 불과했던 회사를 1조원대 규모로 성장시키는 경영능력을 발휘했다.
2014년 9월 HD현대중공업 대표이사와 그룹 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권 회장은 이번엔 최악의 부진에 빠진 HD현대중공업 재도약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았다. 그는 대표이사 취임 후 급여 전액을 반납하고 3년간 무보수로 경영 위기 극복을 위한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능력 있는 젊은 차장과 부장들을 조직의 리더로 발탁해 역동성을 높였고, 우수한 R&D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연구, 개발, 설계 인력에 대한 인사제도 개선을 실시했다. 과장 이상 직원들에게는 성과 위주의 연봉제를 도입하는 한편, 우수 직원들에게 직책을 부여해 조직문화 개선에 나섰다. 과감한 사업 재편도 병행했다. 부진에 빠진 해양사업부와 플랜트사업부를 통합하는 등 조직의 슬림화를 추진했고 호텔, 증권 등 비핵심 사업과 보유 중인 부동산, 주식 등을 매각해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실행에 옮겼다. 이러한 고강도 개혁으로 HD현대중공업은 전 세계적인 수주 가뭄과 유가 하락, 원자재 가격 상승 등 3중고에도 2년 만에 흑자전환에 성공한다. 업종이 전혀 다른 HD현대중공업 내 중전기, 건설기계, 로봇 사업을 분할해 각각 HD현대일렉트릭, HD현대건설기계, HD현대로보틱스라는 독립법인도 출범시켰다. 이러한 결정 이후 각 사업에 맞는 신속한 의사 결정과 투자가 뒤따랐고, 분할 첫해 3개 사 모두 흑자 달성에 성공하며 부문별 독립경영의 기틀을 다졌다. 2018년 HD현대(당시 현대중공업지주)가 출범하며 부회장으로 초대 대표이사를 맡은 권오갑 회장은 투명한 그룹 지배구조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지주회사 전환 작업을 추진했다. 2019년 6월엔 HD한국조선해양을 출범시켰다. HD한국조선해양은 HD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 등 그룹 조선 계열사들을 자회사로 두고 있다.
2019년 11월 HD현대 회장으로 취임한 권 회장은 건설기계 분야 세계 톱5를 목표로 두산인프라코어 인수를 추진, 2년 뒤인 2021년 8월에 합병을 마무리했다. 이를 통해 HD현대는 조선, 건설기계, 에너지 등 그룹 사업의 3대 축을 마련하게 된다. 조선 부문은 친환경 선박 기술력, 설계 역량, 최고 수준의 품질 관리 등의 강점을 강화해 세계 1위 조선 기업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며 디지털 기반의 스마트조선소(Future of Shipyard)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건설기계 부문 3사(HD현대사이트솔루션, HD현대건설기계, HD현대인프라코어)는 개발, 영업, 구매 등 총 10개 시너지 분야의 중복된 기능을 통합하고 지난해 구매 최적화를 시작으로 올해 부품 공용화, 2024년 물류체계 통합, 2025년 통합 플랫폼 적용, 2026년 통합 신제품 출시 등을 계획하고 있다. 약 1조3000억원의 시너지 효과가 예상된다. 에너지 부문인 HD현대오일뱅크는 원가경쟁력이 높은 초중질 원유 투입을 꾸준히 늘리며 생산성 극대화에 성공했다. 정유사 최초로 무재해 2300만 인시(人時)를 달성하는 등 안전운영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3조원 이상 투자한 초대형 프로젝트인 HPC를 완료해 석유화학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했다. 재계의 한 인사는 “권 회장은 좋은 성과를 올릴 때는 과감한 투자로 회사의 미래가치를 높이는 데 집중했고, 위기 때는 혁신을 통해 회사의 경쟁력을 제고했다”며 “특히 연구개발, 우수 인재 확보를 놓치지 않은 게 경영의 초석이 됐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이러한 노력은 경영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HD현대는 지난 2022년 연결 기준 매출 60조8497억원, 영업이익 3조3870억원을 기록하며 창사 이래 처음으로 연매출 60조원을 돌파했다. 조선 사업 부문의 실적 개선에 정유 및 건설기계 부문 수익성 개선이 더해진 결과였다. HD한국조선해양, HD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등 3사의 매출이 모두 늘었고, 현대삼호중공업은 영업이익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HD현대오일뱅크의 매출액은 전년 대비 무려 68%나 껑충 뛰었다. HD현대일렉트릭, HD현대에너지솔루션 등 계열사도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HD현대는 올해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 속에서도 3분기 누적 매출 44조6185억원, 영업이익 1조6737억원을 기록하며 견조한 실적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HD한국조선해양, HD현대중공업 등 조선 부문 계열사들이 실적을 회복하며 흑자전환에 성공할 것으로 전망된다.
“앞으로의 위기는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위기와 차원이 다를 수 있으니 각 사별로 워스트 시나리오까지 감안해 검토하고, 대응책을 마련하는 등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지난해 4월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권 회장이 강조한 대목이다. 당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세계 각국의 금리 인상 움직임, 원자재 값 폭등 등 글로벌 환경이 급변하던 시기였다. 평소 한발 앞서 대비하는 그의 경영 스타일이 드러난 대목이다. 올 7월 열린 그룹 사장단 회의에선 “환율·시황 등 외부 환경 변화에 따라 일시적으로 얻은 이익이 우리에게 잘못된 시그널을 준다면 오히려 나쁜 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다”며 “경영자는 나쁜 이익에 취해 마치 회사가 엄청난 성장을 한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권오갑 회장은 주요 사업 분야의 친환경 전환과 디지털 전환도 추진하고 있다. 2020년 5월 KT와의 MOU를 시작으로 HD현대중공업 울산 야드를 5G 기반의 스마트조선소로 탈바꿈하기 위한 기틀을 마련했고, 이듬해 2월에는 HD현대와 KT를 비롯한 총 9곳의 산학연과 ‘대한민국 AI원팀’을 구성하는 등 미래 신산업 분야 진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기술경쟁력 강화를 위한 글로벌 R&D 협력체계 구축에도 힘쓰고 있다. 지난해 4월 HD한국조선해양은 독일 뒤셀도르프에 유럽R&D센터를 설립하며 유럽 주요국까지 기술협력 네트워크를 확대했다. 이를 거점으로 글로벌 연구기관과 협력해 수소, 연료전지, 암모니아, 전기추진 등 차세대 선박 기술을 고도화할 계획이다.
권오갑 회장은 2010년 초부터 그룹의 미래 기술경쟁력을 책임질 글로벌 R&D센터를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그린 바 있다. 이러한 구상에 따라 2016년 말 경기도 성남에 GRC(Global R&D Center) 설립을 본격화했고, 창립 50주년인 지난해 말 준공식을 가졌다. 현재 GRC에는 R&D 및 엔지니어링 인력 500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임직원들은 그룹의 제품 개발과 관련한 기초연구를 포함해 그룹의 통합 R&D를 수행하며 HD현대가 기술 중심 회사로 새롭게 도약하는 데 중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미래 인재 양성을 위한 권 회장의 결단은 HD현대의 임금체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자긍심 강화, 기술 인력 확보 등을 위해 급여를 상향 조정했고 직급체계를 5단계에서 3단계로 개편했다. 직장 어린이집 운영, 자녀 교육비 지원, 유연근무제 실시 등 임직원들의 육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HD현대는 올 1월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 3년간 임직원 자녀의 유치원 교육비를 자녀 1인당 연 600만원, 총 1800만원까지 지원하고 전 계열사로 유연근무제를 확대 실시하고 있다. 지난 3월 GRC에 새롭게 개원한 직장 어린이집 ‘드림보트’는 운영시간을 오전 7시부터 최장 밤 10시까지로 정해 직원들이 유연근무제를 채택하거나 귀가가 늦어진 경우에도 등·하원 시간을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권 회장은 올 7월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직원들이 얼마나 회사를 사랑하는지, 경영자가 직원들로부터 얼마나 존경받는지가 그 회사의 성패를 가른다”며 “직원들에게 어떤 미래를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고 미래 사업에 전력을 기울일 것”을 주문했다. 직원들을 배려하는 포용의 리더십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