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기후로 인한 자연재해 발생 빈도가 잦아지면서 위기의식이 전 세계적으로 퍼지며 다양한 국가에서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상향하고 있다. 국가 단위는 물론 글로벌 기관들은 저탄소사회로의 전환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상향된 감축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와 정책을 활용·검토하고 있다. 가장 선제적으로 도입돼 활성화된 제도는 탄소배출권 거래제다.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경제적 유인을 제공하는 핵심적인 정책인 탄소배출권 거래제는 특히 유럽 시장에서 활성화돼 있다.
세계 최대 탄소배출권 거래 시장인 EU의 배출권 가격은 부침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우상향을 그리며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EU의 탄소배출권 거래제도(EU-ETS) 시장에서 탄소배출권은 8월 15일(현지시간) 기준 1톤당 86.97유로(약 12만6900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지난 3월 사상 처음으로 100유로를 돌파한 것에 비하면 다소 조정을 보이고 있지만 2021년 초 20유로대에 불과하던 가격이 최근 2년 새 400% 이상 상승한 셈이다.
EU의 탄소배출권 가격은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에너지 위기가 심화하면서 급등했다. 팬데믹이 발생하기 이전인 2019년 탄소배출권 1톤당 가격은 10유로대에 불과했지만, 이후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EU의 적극적인 탄소 배출 감축 정책도 한몫했다. 지난해 12월부터 각 회원국에서 비준 절차를 밟고 있는 EU의 새 환경규제는 2039년까지 탄소 순배출량을 ‘제로(0)’로 줄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정학적 위기와 정책적인 이슈가 더해져 시장에서 거래되는 탄소배출권 물량은 급격하게 감소하며 가격이 큰 폭으로 상승세를 보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가격 급등을 예상한 금융자본이 시장으로 몰려들기도 했다. 증권사와 개인투자자의 진입이 허용되지 않는 국내 시장과 달리 EU에선 금융자본의 탄소배출권 투자가 활발한 편이다.
글로벌 탄소 감축 추세에 한국 역시 적극적으로 발맞추고 있다. 2020년 12월에 ‘2050 탄소중립’을 선언한 우리나라는 2021년 10월에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수립했다.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도 상향한 바 있다. 올해 4월에는 ‘탄소중립·녹색성장 국가전략 및 제1차 국가 기본계획’을 통해 2030년까지의 부문별·연도별 감축목표와 이행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2015년 시작한 탄소배출권 거래제 역시 점차 확대되고 있다. 환경부에 따르면 참여업체와 배출량 범위는 꾸준히 확대돼 제3차 계획기간(2021~2025년)에는 국가배출량의 73.5%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근 국내 탄소배출권 가격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지난 8월 15일 종가 기준 한국거래소배출권 시장 정보 플랫폼에 따르면 2022년 탄소배출권(KAU22) 가격은 1톤당 8090원을 기록하고 있다. 8월 7일 기록한 사상 최저치(7380원)에 비해 다소 회복했지만 1년 전 가격(2만8000원)과 비교하면 70% 가까이 급락한 수치다.
최근 경기 불황으로 인해 제조업 가동률이 급감하면서 탄소 배출량도 줄어든 것이 하나의 원인이다.
문제는 이러한 가격 하락이 정기적으로 발생하면 자발적인 시장을 통한 탄소 감축목표의 효율적 달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다.
윤여창 KDI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온실가스 감축 목표는 상당한 수준으로 강화됐지만, 배출권 가격은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라며 “가격 기제가 원활히 작동하지 않으면 시장을 통한 감축목표의 효율적 달성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고 전했다.
탄소배출권 가격 안정을 저해하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는 배출권 이월 제한 제도가 꼽히고 있다. 대부분 주요 배출권 거래제에서는 참여업체가 자신의 배출량에 해당하는 수량만큼의 배출권을 제출하고 남은 배출권을 다음 연도에 활용할 수 있도록 이월을 허용한다. 참여업체는 조기에 배출량을 감축해서 발생한 초과 배출권을 판매하거나 미래에 활용할 수 있다. 국내 시장 역시 2017년부터 할당량을 기준으로 이월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국내 배출권 거래 시장에서는 참여업체들이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배출권을 보유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면서 거래가 활발히 이뤄지지 않는다는 문제를 개선하기 위함이었다. 이전까지 일부 참여업체들이 매년 배출권 제출 기한을 앞두고 배출권을 구매하기 어렵다는 불만을 지속해서 제기해오기도 했다. 이에 따라 참여업체들이 거래시장에서 배출권을 매도하도록 유도하고 시장을 안정화하기 위해 배출권 이월 제한 제도를 시행한 이후 2019년부터는 배출권을 거래 시장에서 매도하는 양에 비례해서 이월할 수 있도록 이월 수량 기준이 변경됐고 그 기준은 점차 강화됐다.
이러한 이월 제한은 거래 시장에서 매도를 유도하기 위해 도입된 만큼, 배출권 가격을 하락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다. 초과 배출권을 다음 연도 이후에 활용하는 것이 제한돼 배출권을 추가 확보할 동력도 감소한다. 따라서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상향돼도 그 기대가 현재의 배출권 수요에 반영되지 않아 가격이 오르지 않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윤 연구원은 “배출권 거래제의 가격신호 기능이 적절히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낮은 가격이 유지됨에 따라, 조기 감축이 충분히 효율적인 기업들조차 감축 노력을 줄이고 배출권을 사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특히 2020년 마련된 3기 배출권 거래제하에서 기업이 보유한 잉여 배출권의 이월 허용량은 이전 연도 배출권의 순매도량과 연계돼 정해진다. 따라서 거래세 참여 주체들은 배출권 이월을 위해 2022년 배출권 제출, 이월 신청이 종료되는 8월에 남은 배출권 일정 부분을 매도하는 것이 유리하다.
같은 제도를 운용하고 있지만 시장이 활성화된 유럽 시장의 경우 수요보다 공급이 우위에 있는 시장이다. 이월된 누적 배출권 수량이 많고, 친환경 발전 등 저탄소 기술이 일찍부터 도입돼 잉여 배출권을 판매할 동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향된 탄소 감축 목표가 반영되면서 배출권 총 공급량은 급격하게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2026년부터 시행될 예정인 제4차 계획기간에는 상향된 감축목표가 반영되면서 기업들의 탄소배출권 확보도 어려워질 전망이다. 만약 이월이 제한되지 않는다면 공급량의 급격한 감소에 따른 충격이 여러 해에 걸쳐서 분산될 수 있다. 그러나 시장 조성을 위한 이월제도가 필요한 현재 상황에서는 제4차 계획기간이 시작되는 2026년을 기점으로 그 영향이 단기간에 집중돼 시장 변동성이 확대되고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기업의 대응 부담이 증가할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상향된 온실가스 감축목표가 배출권 시장에 반영될 수 있도록 배출권 이월 제한을 조속히 완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윤여창 연구원은 “이월 제한의 완화로 인해 우려되는 거래 시장의 공급 부족에 대비해서, 배출권의 공급 창구를 확대하고 시장 운영의 장기적 예측 가능성을 개선하는 방향의 정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라며 “우선 배출권 가격이 지나치게 비쌀 경우 계획된 예비분을 공급할 수 있도록 명시적인 시장 안정화 제도를 도입하고, 경매 참여 대상을 확대해 배출권이 공급될 수 있는 창구를 확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윤 연구원은 이에 더해 EU가 채택하고 있는 MSR(Market Stability Reserve)와 같은 배출권 거래제의 시장 안정화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제도는 배출권 거래 시장의 유통물량을 관찰한 후 배출권 공급량을 조절한다. 다만 이 제도의 우선적인 안정화 목표는 배출권 가격이 아닌 거래물량인 만큼, 가격 안정화에 대한 직접적인 효과는 크지 않을 수 있다.
윤 연구원은 이에 대해 “뉴질랜드 ETS, RGGI, 캘리포니아 ETS 등에서 활용하고 있는 바와 같이, 배출권 가격에 따라 총 공급량을 조절하는 방식의 시장 안정화 제도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 제도에서는 배출권 가격에 따라 총 공급량이 변한다. 예를 들면 사전에 가격 단계와 예비분 수량을 설정해서 배출권 가격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계획된 예비분을 시장에 추가로 공급하고, 하한 이하로 떨어지면 경매를 취소하거나 보다 적극적으로 정부가 배출권 시장에서 배출권을 구매해 예비분으로 확보할 수 있다.
증권가에서도 EU의 탄소 국경세(CBAM) 시행, NDC 준수를 위한 노력에 한국 배출권 가격이 2026년부터는 크게 상승할 것으로 예상돼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EU는 2026년부터 철강, 건자재 등을 수입할 때 탄소 국경세를 부과할 계획이다. 그 수준은 톤당 EU 배출권 가격에서 수입국의 배출권 가격을 뺀 수준이다. 현재 유럽의 배출권 가격은 톤당 80유로를 웃돌고 있어 한국과 큰 차이가 난다.
강대승 DB금융투자 연구원은 “국가적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도 2026년 배출권 규제가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라며 “현재 한국의 3기 배출권 거래제는 2018년 목표치(NDC)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2021년 강화한 목표 달성을 위해 배출권 거래제하에서의 배출량이 심하게 감소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