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에 사는 직장인 남지현 씨(가명)는 최근 휴가를 내고 4박 5일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주 목적지는 도쿄 남서부 쪽에 위치한 가나가와 현 가마쿠라시. 일본 인기 만화 <슬램덩크>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다. 초등학생 시절 즐겨 읽던 슬램덩크를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로 다시 접하면서 오랜 팬심에 불이 붙었고 N차 관람, 굿즈 구입도 모자라 ‘일본 여행’으로까지 이어졌다. 남 씨는 “도쿄에도, 가마쿠라에도 한국인이 정말 많았다. 길거리에서 한국어로 ‘아저씨’ 하고 부르면 절반 이상 뒤돌아본다는 농담이,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체감했다”며 “<슬램덩크> 외에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과 애니메이션 OST에도 다시 관심이 생겼고 즐겨 듣는 플레이리스트도 J팝으로 채워 넣었다”고 말했다.
2023년 ‘J-컬처(일본 문화)’ 열풍이 한반도를 강타했다. ‘쉬쉬’하며 일본 문화를 소비하던 행태는 어느덧 먼 옛날 얘기처럼 느껴진다. 일부 마니아 전유물로 여겼던 일본 애니메이션은 국내 극장가에 없어서는 안 될 ‘흥행 상품’으로 떠올랐다. 카페나 주점은 일본풍 인테리어가 대세가 됐고 매장에서는 J팝이 흘러 나온다. 일본 호스트바 직원을 연기하는 유튜브 캐릭터 ‘다나카’가 공중파 방송에 출연해 일본 노래를 불러도 이제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본과 오랜 정치·역사적 갈등을 넘어 넘실거리는 ‘J-웨이브’ 현상에 대해 살펴본다.
최근 J-컬처 약진을 이끈 주역은 단연 ‘애니메이션’이다. 극장가 흥행을 넘어 관련 굿즈가 불티나게 팔리는가 하면 애니메이션 OST도 음원 차트 상단을 차지한 모습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간한 ‘2023년 4월 한국 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일본 영화 총 매출액은 1133억원, 관객 수도 1085만 명을 기록했다.
전국 기준 집계를 시작한 2009년 이후 역대 최고 매출액과 관객이다. 1월 초 개봉한 극장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관객 수 460만 명을 넘어선 데 이어 3월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이 550만 명이 넘는 관객 수를 기록하며 기존 일본 영화 관객 수 신기록을 연거푸 갈아치웠다. 기존 1위는 380만명 관객을 동원한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으로 2017년 개봉작이었다. 두 영화가 ‘쌍끌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4개월 넘게 일본 영화가 국내 박스오피스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이례적인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애니메이션 인기에 힘입어 2차 산업도 ‘활황’이다. 특히 슬램덩크 관련 제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지난 1월 여의도 ‘더현대 서울’에 마련된 슬램덩크 팝업스토어에는 한정판 피규어와 유니폼 등을 사기 위한 대기줄이 전날 밤부터 이어졌다. 한정판을 차지하기 위해 고객끼리 다툼까지 벌어질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세븐일레븐에서는 최근 롯데칠성과 협업해 ‘슬램덩크 와인’을 선보이기도 했다. 슬램덩크 열풍은 서점가에도 불어닥쳤다. 영화 제작 과정 비하인드 내용을 담은 <슬램덩크 리소스>는 출간 직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만화책 총 31권짜리였던 오리지널 버전을 20권으로 정리해 새 표지를 붙인 <슬램덩크 신장재편판>은 영화 개봉 이후 총 100만부가 넘게 팔렸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동명 원작 소설이 출간 세 달 만에 20만부가 팔렸다. 편의점 이마트24는 <스즈메의 문단속> 감독인 신카이 마코토의 인기작 패키지 한정판을 선보였다.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뿐 아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관련 상품은 유통업계 핵심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2월 SPC삼립에서 선보인 ‘돌아온 포켓몬빵’ 시리즈 제품은 한 달 만에 1000만 개, 1년 만에 누적 판매 1억 개를 돌파했다. 캐릭터 빵 인기는 다른 만화로도 번져갔다. 편의점이 앞다퉈 ‘짱구 컬래버’ 시리즈를 선보인 데 이어 CU는 ‘원피스’, 세븐일레븐은 ‘도라에몽’ 등과 제휴를 맺고 협업 상품을 내놨다. CU를 운영하는 BGF리테일 관계자는 “지난해 캐릭터 상품 매출이 전년 대비 12배나 올랐다. 원피스를 비롯해 다양한 만화 캐릭터와 손잡고 관련 상품 라인업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애니메이션 인기를 등에 업고 J팝도 한국에서 힘을 내는 중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주제가를 부른 밴드 텐피트는 지난 4월 내한 행사를 연 데 이어, 7월에는 KBS아레나에서 첫 내한 공연을 펼친다. <너의 이름은> <스즈메의 문단속> 등 OST에 참여한 밴드 ‘래드윔프스’도 7월 예스24 라이브홀에서 내한 공연을 한다. 이 밖에도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끈 애니메이션 <체인소맨> OST를 부른 요네즈 켄지, <최애의 아이>주제가 <아이돌>을 부른 요아소비도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와 숏폼 콘텐츠 등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아예 일본 애니메이션 OST를 주제로 기획한 공연도 있다. 라이브러리 컴퍼니는 오는 7월 롯데콘서트홀에서 ‘재패니메이션 OST 콘서트’를 선보인다. 국내 최초 일본 애니메이션 OST 큐레이션 콘서트로, 미야자키 하야오, 신카이 마코토, 호소다 마모루 등 일본 대표 감독들의 작품뿐 아니라 <진격의 거인> <귀멸의 칼날> 등 인기 애니메이션 OST를 70인 대규모 오케스트라 라이브 연주로 들을 수 있다. 애니메이션 OST 인기 덕에 J팝 전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모습이다. 일본 싱어송라이터 ‘이마세’가 발표한 ‘나이트 댄서’는 올해 3월 국내 최대 음원 사이트 멜론 ‘톱 100’ 차트에서 최고 17위까지, 해외 종합차트에선 2위까지 올랐다. 제이팝이 음원 차트에서 이런 성적을 낸 건 좀처럼 드문 일이다.
2019년 ‘노노재팬’ 이후 시들했던 이른바 ‘일제’ 판매도 부활에 성공했다. ‘노노재팬’은 2019년 7월 일본 정부가 한국 소재·부품·장비 수출 규제에 나서면서 촉발된 소비자 불매 운동이다. 당시에는 유니클로 봉투를 들고 다니는 사람에게 비난이 쏟아지는가 하면 일본 수입차가 테러를 당할 정도로 상황이 과격했지만 이제는 옛날 일이 됐다. 한국 유니클로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20.9% 증가한 7042억원을 기록했다. 2021년 529억원에 불과 했던 영업이익은 지난해 1148억원으로 116.8% 증가했다.
유니클로뿐 아니다. 불매 운동 주요 대상이었던 일본 스포츠 브랜드도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일본 스포츠 브랜드 ‘데상트’를 운영하는 ‘데상트코리아’ 매출은 2020년 4986억원에서 지난해 5555억원까지,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32억원에서 392억원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한국미즈노’ 역시 2020년 영업손실 24억원에서 지난해엔 73억원으로 수익 개선에 성공했다.
노노재팬 직격탄을 맞았던 일본 술도 판매가 급증했다.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맥주 수입액은 전년 대비 110.7% 급증했다. 노노재팬이 한창이던 2020년과 비교하면 무려 155% 늘어난 수치다.일본 위스키 인기는 더 뜨겁다.
수입액은 전년 대비 31.4%, 2018년 대비 293.5% 성장했다. 산토리 가쿠빈, 야마자키, 히비키 등 유명 위스키 브랜드 제품은 최근 품귀 현상을 빚을 정도로 인기다. 일본 주류 주종인 ‘하이볼’ 인기도 여기에 한몫했다. 위스키에 탄산수를 섞어 마시는 하이볼은 일본에서 시작된 술이다. 낮은 도수에 부담 없이 맛있는 술로 MZ세대의 관심을 받기 시작하면서 일본 위스키 수요가 급증했다. 유통업계에서도 최근 잇달아 일본 하이볼 관련 제품을 내놓고 있다. 이마트24는 올해 3월, 일본 후지산 물을 사용해 만든 위스키 ‘코슈 니라사키’ 판매를 시작했다. GS25도 아예 ‘하이볼 완제품’을 캔으로 내놨다. 일본 양조장에서 생산된 위스키 원액이 들어간 제품인 ‘로얄 오크 프리미엄 하이볼’과 ‘코슈 하이볼’이다.
J-웨이브에 힘입어 여행업계도 ‘일본 특수’를 누리고 있다. 현지에서 일본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싶은 욕구에 더해 최근 ‘역대급 엔저’ 현상이 맞물린 결과다. 국토교통부 항공정보포털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약 349만 명. 2021년(3만 명)과 2022년(7만 명)은 물론 팬데믹이 본격화되기 전인 2020년(108만 명)과 비교해도 3배 넘게 많다. 여행업계 관계자는 “일본 무비자 입국이 풀린 지난해 10월 이후 매달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일본 여행 인기가 워낙 뜨거워 항공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일본 노선 증편을 계획 중이다. 일본 스페셜 패키지를 준비 중인 여행사도 많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J-컬처 열풍이 불어온 배경은 2030 젊은 세대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간 J-컬처 소비를 가로막은 ‘반일 감정’이 5060 중장년층에 비해 확연히 적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올해 2월 2030세대 626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전체 42.3%가 일본에 대한 인상이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부정적(17.4%)’이라고 답한 이보다 2배 이상 많았다. ‘한일 관계 개선이 필요할까’ 묻는 질문에도 필요하다는 답변(71%)이 불필요(29%)보다 훨씬 많았다. ‘경제적 이익 확대(45.4%)’ ‘중국 견제(18.2%)’ ‘동북아 안보 협력 강화(13.3%)’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일본에 대한 악감정은 그야말로 감정의 문제일 뿐, 문화·경제·안보와는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 모습이다. 매경이코노미가 ‘옥소폴리틱스’에 의뢰해 ‘일본 문화에 대한 인식’을 물어본 결과 전체 73.1%가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부정적’이라고 말한 응답자는 전체 6.5%에 불과했다.서울에 사는 한 20대 남성 응답자는 “만화는 재미있고 스시는 맛있다. 문화는 죄가 없다. 특별히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경상도에 사는 한 10대 응답자는 “일본 정부와 몇몇 정치인의 행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에는 호감이 간다”고 말했다.
매경이코노미 나건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