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3일 북한·중국·러시아 3국 정상은 중국 베이징 톈안먼광장에서 열린 ‘중국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 열병식을 맞아 망루에 함께 섰다. 특히 이날엔 시 주석의 양옆에 김정은과 푸틴 대통령이 나란히 서는 ‘역사적 광경’이 연출됐다. 시 주석은 이날 연설에서 “평화냐 전쟁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여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주의 행보를 직격하는 발언을 내놓았다. 시 주석은 “역사는 인류의 운명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고 경고한다”며 “인류는 다시 평화와 전쟁, 대화와 대결, 윈윈 협력과 제로섬게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고립주의 외교를 펼치면서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무차별 관세를 퍼붓는 미국을 비판하고 다자주의를 지향하는 중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우회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8월 25일 한미정상회담 직후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초청 강연에서 이른바 ‘안미경중(安美經中)’ 노선과 관련해 “한국이 과거처럼 이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밝혔다. 안미경중이란 미국과 안보 협력의 근간을 유지하되 경제는 중국과 협력을 병행하는 외교 기조를 말한다. 이 대통령은 “최근 몇 년 사이 자유 진영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진영 간 공급망 재편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고 미국의 정책이 명확하게 중국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갔다. 이제는 한국도 미국의 기본적인 정책에서 어긋나게 행동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앞서 북·중·러 3국 최고 지도자가 한자리에 모인 것은 냉전 이후 처음이었다. 옛 소련 시절까지 포함해도 1959년 중국 국경절(건국기념일) 열병식 당시 북한 김일성,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함께 망루에 선 후 66년 만이다. 김정은이 양자 외교가 아닌 다자 외교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처음이었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미국 우선주의의 반작용을 이용해 북·중·러가 글로벌 패권의 중심으로 이동할 가능성을 경고했다. 강준영 한국외대 교수는 “다양한 형태의 연대를 통해 전 세계에 반미 전선을 폭넓게 구축하는 수순”이라고 분석했다.
이 대통령은 과거 ‘셰셰(謝謝)’ 발언과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배치 철회 주장 등으로 친중 성향 정치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지난 한일·한미 연쇄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동맹과 한·미·일 3각 협력에 대한 의지를 국제사회에 천명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안미경중은 최근까지도 더불어민주당이 견지한 전통적인 세계관이었다”며 “안미경중을 취할 수 없다는 말은 용기 있는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내년 중간선거와 향후 대선 과정에서 미국 우선주의는 파편화된 국제질서를 더욱 요동치게 할 것으로 본다.
이미 미국의 적대국 및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 사이에서 연대가 뚜렷하다. 9월 초 중국 전승절 행사와 그 직전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담은 상징적인 장면이다. 시진핑의 좌우에 선 블라디미르 푸틴 및 김정은의 모습과 후속 북·중, 북·러 정상회담은 3국 간 전략적 협력의 강화를 예고한다. 유럽도 미국과의 동맹은 유지하지만 ‘Europe with less America’ 기조하에 추가 안전보장 장치가 확산되고 있다. 나토(NATO)가 방위비 증액도 동의하고 유럽연합(EU) 차원에서 관세협상도 타결했지만, 전략적 자율성과 영불의 핵 억제력 제공공약을 구체화하고 있다. 유럽 26개 유사 입장국 연합, 영독, 영불, 독불 간 안보 협력 협의 장치가 마련됐다. 캐나다는 EU 영국과 안보 방위 협력 강화 선언을 발표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선 미국 동맹 간 협력 노력이 눈에 띈다. 일본은 호주 및 영국과 지역접근협정을, 호주는 필리핀과 군대 지위협정에 이어 방위협력강화 논의를 진행 중이다. 한일도 8월 말 정상회담에서 전략적 인식 공유하에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글로벌 안보 환경이 급변함에 따라 이재명 대통령이 내세웠던 ‘미·중 가교론’과 실용외교도 함께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오는 10월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은 주요한 시험무대가 될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이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두 정상의 만남은 2019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이후 6년 만이다.
미국과 중국은 관세전쟁과 반도체·희토류 등 상호 수출 통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잠재한 군사 갈등을 두고 ‘총성 없는 전쟁’을 해왔다. 그러나 최근 틱톡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으며 화해 무드가 조성된 데 이어 오는 APEC에서의 만남이 갈등 해결의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중국산 희토류와 미국산 인공지능(AI) 첨단 반도체 수출 통제도 협상 테이블에 여전히 남아 있다. 협상 돌파구가 됐던 틱톡과 관련해 시각차가 존재한다는 점이 변수가 될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틱톡 미국 사업권 매각 합의가 이뤄졌다는 입장이지만, 시 주석은 다른 생각이라는 외신 보도도 나왔다.
여기에 더해 이 대통령이 한미·한중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 관세협상 타결, 대북 평화 모드 조성 등의 숙제를 풀지도 주목된다. 관세 후속 협상과 주한미군 역할 재조정 등 미국과 불협화음이 불거질 수 있는 현안들이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향후 중국과 관계를 어떻게 형성할지도 숙제로 남았다.
일각에선 미국이 안보 협상 테이블에 강력한 청구서를 들고 올 가능성도 제기한다.
지난 9월 10일 미 국무부는 조지아주 사태 해결을 위한 한미 외교장관 면담 결과를 밝히며 뜬금없이 “루비오 장관은 한국의 대미 투자를 환영하며 관련 분야에서 협력을 심화하는 데 관심을 표명했다”거나 “두 장관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억지력을 강화하고 공평한 방위 부담 분담(equitable defense burden sharing)을 확대하며 한미동맹을 발전시켜 나가는 방안을 논의했다” 등의 내용을 전한 바 있는데, 이것이 미국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아울러 국방비 및 방위비 인상,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역할·규모 재조정 등 이른바 ‘동맹 현대화’ 논의는 이제야 본격적인 협상이 전개될 전망이다. 이 사안은 관세와 더불어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과제 중 하나로, 순탄하지 않은 협상이 예상된다. 특히 이는 미국이 중국을 직접 겨냥하는 조치기 때문에, 한국의 입장에선 자칫 중국으로부터의 공세도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북핵문제는 또 다른 뇌관이다. 앞서 김정은 위원장은 천안문 열병식에서 미국을 겨냥한 중국의 핵·미사일 전력을 함께 지켜봤다. 북핵 문제에 대한 중국의 명시적 입장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대외적으로는 시 주석이 북한의 핵보유를 용인하는 듯한 그림이 나왔다는 평가다.
이에 대해 이재명 정부는 문재인 정부에서 공 들였던 ‘핵동결 입구→비핵화 출구’ 해법을 재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우선 북한과 한미 등 국제사회가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해 로드맵을 설정한 다음에 ‘핵동결→핵능력 축소→비핵화’ 등 단계를 설정하고 실질적 비핵화 행동과 부분적 제재 완화 등 상응 조치를 점진적으로 맞교환하는 방식이다. 북측이 합의를 위반하면 기존 제재를 되살리는 ‘스냅백’ 방식 안전장치도 둔다.
하지만 북한이 단계적 비핵화론에 호응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문재인 정부 때와 달리 불가역적 핵 보유를 주장하며 비핵화가 아닌 핵군축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여러 차례 북한을 핵보유국이라 부르고 있는 점도 단계적 비핵화 구상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미국과 북한이 단기적 성과에 집착해 스냅백 방식이 아닌 핵 동결·군축과 제제 완화를 맞교환하는 스몰딜에만 머물러 ‘나쁜 합의’가 나올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미국과 북한이 비핵화 목표에 합의하더라도 각 단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도 난제다. 트럼프 행정부 1기는 단계 수를 줄이고 북측이 1단계에서 되도록 많은 비핵화 선(先)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과거에 한미와 북한이 추진했던 비핵화 협상은 모두 신고·검증 단계에서 불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된 바 있다.
국책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미·중 디커플링은 점점 구조적 현실로 굳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여전히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이자 첨단기술·자본·표준에서 핵심 파트너다. 한국 입장에선 장기적으로 미국 내 투자와 수출을 늘려 안정적인 시장을 확보하고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하는 쪽으로 전략을 세울 수밖에 없다”면서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미래의 성장성과 안보·경제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병수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1호 (2025년 10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