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긴축 공포에 글로벌 증시가 일제히 횡보하던 중 또 다른 복병을 만났다. ‘스타트업들의 은행’을 표방하던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의 유동성 위기다. 국내 증시는 SVB 리스크가 부각된 3월 중순부터 변동성을 키우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SVB 사태가 단기적으로는 국내외 증시 변동성을 키울 수 있으나, 중장기적으로는 긍정적으로 오히려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긴축 완화 기조에 더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 증권가에서는 SVB 파산 영향이 전반적인 금융 시스템 리스크로 전이될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예상했다. SVB만이 가진 고유한 고객 유형과,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강화된 은행권 규제 등이 이유다. 이남강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투자은행의 신용위험을 바탕으로 한 무분별한 파생상품의 개발과, 광범위한 거래가 금융기관 간에 이루어졌던 2008년 금융위기와 달리 SVB는 상업은행”이라며 “이자율 위험에 기반한 파생상품을 개발 및 유통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SVB 파산은 소수에 집중된 SVB만의 독특한 고객유형(스타트업과 벤처캐피털)과 관련이 있다고도 평가했다. 나정환 NH투자증권 연구원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대형 은행의 자산 건전성에 대한 규제가 강화됐고, 2022년 진행한 미국 연준의 스트레스 테스트에 따르면 최악의 시나리오에서도 테스트 대상 은행의 자본비율은 규제 기준을 크게 상회했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단기적으로는 투자자들이 크레디트 관련 이슈에 과도하게 반응하며 위험자산 회피 성향이 강화될 수도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증시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도 내다봤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긴축 여력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홍철 DB금융투자 연구원은 “금융의 몰락은 결과적으로 실물을 압박해 통화 긴축이 과도했음을 드러내줄 것”이라며 “연준은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QT(양적 축소) 내지는 주택저당채권(MBS) 매도 규모 조정, 금리 인상 속도 둔화, 심지어 일시적이나마 유동성 재공급을 고려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는 시장에 완화적 시그널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단기적으로는 위기, 장기적으로는 기회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현재. 증권가의 투자 조언은 갈린다. 안정성과 실적을 기반으로 투자처를 물색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오는가 하면 주가 상승 모멘텀을 만들어줄 테마에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투자증권은 중소형주보다는 대형주, 성장주보다는 방어주에 투자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분석했다. 당장의 증시 변동성을 안정적으로 돌파할 수 있는 전략임과 동시에 SVB 사태가 장기화하면 더욱 빛을 발할 투자 전략으로 평가된다.
최보원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유동성,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시기에는 투자심리가 크게 위축돼 변동성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중소형주보다 대형주를 선호한다”라고 말했다. 업종별로는 불확실성과 유동성 부담이 확대될 때 조정이 클 것으로 보이는 커뮤니케이션, 금융업종보다 필수소비재·내수소비재·유틸리티 등 안정적인 섹터를 선호한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성향을 지닌 기업들로 구성된 상장지수펀드(ETF)로는 대형주 위주로 구성된 ETF ‘SPDR S&P500 ETF TRUST(SPY)’, ‘Vanguard Mega Cap ETF(MGC)’ 등이 있다. 방어·배당주 ETF로는 필수소비재 기업들을 담은 ’Vanguard Consumer Staples ETF’, 배당 성장주를 담은 ‘Vanguard Dividend Appreciation ETF(VIG)’, ‘iShares Core Dividend Growth ETF(DGRO)’ 등이 유망하다고 봤다.
변동성이 낮은 기업들로 구성된 ETF ‘Invesco S&P500 Low Volatility(SPLV)’, 가치주 위주로 구성된 ETF ‘iShares MSCI USA Quality Factor ETF(QUAL)’ 등도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업종별로는 내수주를 많이 담은 ‘iShares US Consumer Staples ETF(IYK)’, ‘Consumer Staples Select Sector SPDR Fund(XLP)’, ‘Health Care Select Sector SPDR Fund(XLV)’ 등이 안정적인 선택지가 될 것이며 유틸리티주를 담은 ‘Utilities Select Sector SPDR Fund(XLU)’도 변동성장을 버티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순이익 추정치가 상향되는 기업들에 주목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불확실한 증시에서 실적이 주가를 떠받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과거 증시에서 거시경제학적 상황이 지금과 유사했을 때 수익률이 좋았던 종목들은 순이익 추정치가 상향된 종목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재만 하나증권 연구원은 “현재는 2014~2015년처럼 연준의 긴축 스탠스가 유지되고 있고, 기업의 이익증가율은 마이너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라며 “지금도 (주가가) 그때와 비슷한 흐름을 보일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유동성에 의지하기 힘들었던 국내 증시가 중국의 경기에 의지했다는 점도 당시와 현재가 유사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해당 시기 구리와 원유 가격은 급락했다는 점에서 다소간의 차이는 있다고 봤다.
순이익 추정치가 상향되는 기업에는 LG화학·롯데케미칼·한솔케미칼 등 화학주와, 한국조선해양·한국카본 등 조선주, KCC·DL건설 등 건설주가 다수 포함됐다. LG화학의 경우 배터리 공급망이 부족한 일본에서의 침투율 확대가 기대된다. 고객사가 하나라는 점이 약점으로 꼽히는 LG화학이 이 과정에서 고객 다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면 기업가치가 재평가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윤재성 하나증권 연구원은 “LG화학 배터리 소재 가치의 상대적 할인 근거가 단일 고객사 보유라는 약점 때문임을 감안할 때 고객사의 횡적 확대는 가치 재평가에 중요한 트리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미국 리튬 업체 투자 및 고려아연과의 전구체 합작 등 일련의 행보를 감안하면 LG화학은 양적 성장보다 질적 성장에 집중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하나증권에 따르면 올해 2분기 LG화학의 순이익이 코스피 순이익(삼성전자 제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4%로, 1년 전 1.4% 대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국조선해양도 올해 조선업종 중 가장 빠르게 실적이 늘어날 기업으로 꼽힌다. 최광식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한국조선해양에 대해 “러시아 LNG선 3척을 계약 해지 후 선가를 높여 재계약하며 지난해 2분기부터 양호한 실적을 기록 중”이라며 “3척의 기성 300% 중 120%만이 지금까지 반영돼 나머지 호선들에서 올해 4분기~내년 1분기 400억원 안팎의 영업이익이 더해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2023년에 먼저 가장 실적이 좋을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수익성이 높은 LNG선 잔고가 높아 2025년까지도 실적 매력이 돋보일 것이라고도 말했다. 한국조선해양의 올해 2분기 코스피 대비 순이익 비중은 0.3%로 예상돼 흑자 전환할 것으로 보인다.
KCC는 건설경기 침체 등을 이유로 주가가 부진한 상태지만 올해는 원재료 가격 하락으로 투자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윤재성 하나증권 연구원은 “2023년 KCC의 투자 포인트는 메탈실리콘 가격의 하향 안정화와, 중국 경기 반등에 따른 유기실리콘(DMC) 가격 회복 등”이라고 말했다. 메탈실리콘은 KCC에서 가장 높은 매출 비중(62.5%)을 차지하는 자회사 MOM의 주요 원재료다. 그는 “2021~2022년 메탈실리콘 가격은 중국의 탈탄소 정책과, 이에 따른 전력난 영향이었는데 중국이 최근 석탄 발전과 호주산 석탄 수입을 재개하면서 메탈실리콘 가격 완화로 이어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중장기적으로 연준의 긴축이 완화되면 유동성 공급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주가 상승의 큰 계기를 만들어줄 ‘모멘텀주’에 주목해봄 직하다는 조언이 나오는 이유다.
서철수 미래에셋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방산·태양광은 인플레·금리·통화정책에 상대적으로 덜 예민하고 장기적, 구조적으로 성장하는 산업”이라고 말했다. 매출 둔화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신흥국 매출 비중이 높은 기업에 집중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여기에 해당하는 종목으로는 호텔·레저, 화장품, 의류 등이 해당한다. 또 고정비 비중이 낮아 영업이익 변동성이 적은 기업에도 주목하라고 설명했다. 고려아연과 같은 기업이 이에 해당한다.
최근 북미·유럽지역에서 친환경 정책 발표가 잇따르면서 주가가 단기 급등하긴 했지만 2차전지와 배터리 관련주도 장기적으로 지켜봐야 하는 업종이라고 말했다. 2차전지업계 관계자는 “EU의 친환경 정책은 리튬이온 배터리를 재활용하지 않으면 사실상 유럽 시장에 수출할 수 없도록 설계돼있다”며 폐배터리 재활용 관련 기업에 지속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시사했다.
김대준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SVB 사태가 안정화되고 3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마무리 이후에는 진입 부담이 낮아진 대형 IT, 리츠로 반발 매수세가 기대된다”라며 “2023년 연간으로는 국채 금리 상승세 둔화 시 수혜가 기대되는 대형 성장주, 정책 수혜가 기대되는 산업재 주목이 가능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강인선 매일경제 증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