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8일(이하 현지시간) 월가에서는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 최근 며칠 동안 SVB 등 지역 은행 위기와 관련해 조 바이든 정부 인사들과 비공개 통화로 긴밀히 의견을 교환해왔다는 소식이 나왔다. 버핏 회장은 글로벌 금융위기(GFC)가 닥친 2008년 미국 은행들의 ‘구세주’ 역할을 한 바 있다. 2008년에는 골드만삭스에 50억달러를, 2011년에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fA)에 50억달러를 투자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는 골드만삭스와 뱅크오브아메리카, JP모건체이스 등 대형 투자은행들이 서브프라임모기지론(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을 낀 파생금융상품 불완전 판매에 앞다퉈 나서면서 GFC가 발생하고 뉴욕 증시가 패닉에 빠진 때다.
‘SVB 사태’를 시간 순으로 보면 결정적인 문제는 지난 3월 9일 불거졌다. 이날 SVB의 그레그 베커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콘퍼런스를 열고 “210억달러 규모 채권 포트폴리오 매각으로 생긴 손실 18억달러를 메우기 위해 전날 17억5000만달러 상당의 매도가능증권(AFS·만기 전 매도할 의도로 매수한 채권과 주식) 처분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SVB는 실리콘밸리에 기반한 은행으로 미국 예금보험공사(FDIC)에 따르면 지난해 말 자산 기준 미국 16위 은행이다. 주로 기술 스타트업이나 벤처캐피털(VC) 고객을 상대로 예금·대출 업무를 해왔다. 애초에 SVB가 손실을 봐가며 210억달러 규모 채권을 매각했던 이유는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긴축 속도전과 관련이 있다.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면서 작년부터 기준금리를 가파르게 올린 탓에 SVB 주 고객이던 스타트업과 VC 들은 대출을 줄이고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다.
SVB는 고객들에게 예금을 돌려주기 위해 서둘러 자산(채권)을 내다 팔았다. SVB는 비교적 안전자산으로 통하는 미국 국채와 정부 보증 채권을 주로 보유했는데 연준이 금리를 빠르게 올리자 채권 가격이 급락했고 이 때문에 은행이 보유 채권을 헐값에 팔 수밖에 없어 18억달러라는 손실이 발생했다.
다만 SVB가 해당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약 23억달러 규모 증자를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이 때문에 SVB가 17억5000만달러 상당의 AFS 처분에 나서겠다고 발표하자 고객들은 이를 은행 파산 위기로 인식하고 더 빠른 속도로 돈을 빼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SVB 주 고객들이 스마트폰으로 예금을 대거 빼가면서 3월 9일 하루에만 420억달러(약 56조원)가 인출됐다. SVB 전체 예금 4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다음 날인 10일(3월 10일) SVB 모기업인 SIVB 주식은 개장 전 거래에서 최대 68% 폭락한 후 긴급한 사정을 이유로 거래가 중단됐다. SIVB가 거래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종목은 3월 28일부로 상장 폐지되기로 했지만, 이 같은 사실은 일주일 후에 밝혀졌다.
자신이 보유한 종목이 상장 폐지될지 여부를 명확히 알지 못했던 SIVB 주주들이 마음을 졸이던 주말 12일, 미국 재무부와 연준, FDIC는 공동으로 긴급 성명을 내고 SVB에 이어 암호화폐(코인) 전문은행인 뉴욕 시그니처뱅크(SBNY) 자산을 압류하고 FDIC가 재산 관리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재산 관리란 공익 성격을 가진 주식회사가 경영난에 빠졌을 때, 파산 절차에 따르지 않고 경영을 지속하면서 회사를 정리하는 제도다. 파산 절차를 따르면 해당 기업이 자산을 매우 낮은 가격으로 처분할 수밖에 없고 기업의 영업 가치도 소멸하기 때문에 주주와 채권자가 큰 손해를 입게 되므로 보호한다는 취지다.
회사 경영은 계속되지만 자산 등은 정부 등 재산 관리자의 통제에 따라 처분이 이뤄져 사실상 재산이 압류된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미국 금융 당국은 “두 은행 예금에 대해서는 예금 보호 대상이 아니던 25만달러 초과 예금에 대해서도 재무부와 연준이 전액 보호 조치하기로 한다”라면서도 “주주와 채권자의 이익은 보호되지 않는다”라고 못박았다.
금융 당국 입장에서 시급한 문제는 ‘SVB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였다. FDIC는 애초에 재산 관리를 시작한 10일에 SVB를 매각하려 했지만 1차 마감 기한인 12일까지 미국 대형 투자은행 어느 곳도 입찰하지 않아 경매가 무산됐다. 선뜻 위기를 떠안겠다는 은행이 나오지 않자 3월 17일 SVB 모기업인 SIVB는 연방 파산법 11조(챕터 11)에 따라 SVB 파산 보호를 뉴욕 남부연방지법에 신청했다고 밝혔다. 세간의 눈길은 이제 버핏 회장의 지원 사격 가능성에 쏠리는 분위기다.
SVB 사태의 다음 주자는 미국 퍼스트리퍼블릭뱅크(FRC)와 스위스의 크레디트스위스(CS)였다. 다만 SVB나 FRC 같은 미국 지역 은행과 스위스계 대형 글로벌 투자은행(IB) CS의 사정은 같지 않다. 미국 지역 은행은 연준의 긴축 정책과 이에 따른 국채 가격 폭락, 뱅크런 때문에 위기에 빠진 반면 CS는 ‘긴축의 시대’가 시작된 2022년 이전부터 방만한 경영과 실적 부진 탓에 파산 가능성이 높은 IB로 꼽혀왔다.
뉴욕 증시 투자자들 입장에서 더 눈길을 끄는 것은 FRC다. 은행권 위기가 불거진 3월 중순 이후 FRC는 이른바 ‘밈 주식’으로 불릴 정도로 개인투자자들의 단기 매매 거래가 따라붙는 바람에 주가가 매 거래일마다 두 자릿수 급등락을 반복했다.
FRC도 SVB처럼 샌프란시스코에 기반한 지역 기반 은행이다. FRC는 평범한 개인 고객보다는 소수의 자산가와 법인을 상대로 영업했기 때문에 뱅크런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 또 주로 부동산 대출 등 업무를 했기 때문에 최근 미국 부동산 시장 약세 타격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투자자들의 불안을 키웠다.
SVB 모기업인 SIVB 주식 거래가 중단된 3월 10일 FRC 주가는 ‘제2의 SVB가 될 수 있다’는 우려 탓에 60%가량 폭락했다. 이후 FRC는 1차로 연준과 JP모건으로부터 유동성 700억달러를 확보했다. 연준이 SVB 사태를 계기로 위기에 직면한 은행을 긴급히 지원하기 위해 ‘은행 기간 대출 프로그램(BTFP·Bank Term Funding Program)’을 만들었는데 FRC는 BTFP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서 투심 달래기에 나섰다. BTFP는 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 등을 담보로 금융기관에 최장 1년간 자금을 대출해주는 프로그램이다.
FRC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투자자들은 회사 주식을 대거 매도했고 자본 잠식 위기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이번에는 월가 대형 은행들이 합동으로 FRC 구출 작전에 나섰다. 이미 파산 길에 접어든 SVB를 경매 입찰 등을 통해 떠안기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FRC까지 파산하는 경우 위기가 번질 것이라는 계산이 따랐다.
3월 17일 재무부는 대형 은행들이 총 300억달러를 FRC에 예치했다고 밝혔다. JP모건체이스와 씨티그룹, 뱅크오브아메리카, 웰스파고가 각각 50억달러, 모건스탠리와 골드만삭스는 각각 25억달러, US 방코프와 PNC파이낸셜, 트루이스트파이낸셜, M&T뱅크, 캐피털원이 각각 10억달러를 FRC에 예치했다.
다만 이번 월가발 구제금융은 자발적인 조치라고는 할 수 없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해당 조치는 3월 14일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이 ‘월가의 황제’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CEO를 설득했고 다이먼 회장이 다른 대형 은행을 설득한 결과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는 일부 은행이 이의를 제기했고 실효성이 없다는 항의가 나온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견에 대해서는 옐런 장관이 직접 설득하는 한편 제프 자이언츠 백악관 비서실장과 ‘전직 연준 부의장’ 레이얼 브레이너드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까지 협상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대외적으로 자유시장 경제를 표방하기 때문에 시장이 위기에 빠져도 연방 정부나 연준이 가장 먼저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특히 연준은 아직 ‘물가와의 전쟁’ 긴축 정책을 진행 중이기 때문에 연준이 은행 구제 전면에 나서는 경우 직접적인 ‘돈 풀기’ 신호로 읽힐 수 있다.
미국 금융 당국 입장에서는 FRC까지 줄도산할 뻔한 위기를 넘겼지만 투자 전문가들은 사태 대응을 비난하고 있다. 개인투자자 입장에서는 이런 점과 더불어 FRC 경영진이 파산 위기 이전에 자사주를 집중 매도한 사실까지 감안해 매수를 보수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리틀 버핏’이라는 별명을 가진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캐피털 회장은 트위터를 통해 FRC에 대한 300억달러 지원을 두고 “결과적으로 FRC 파산 위험을 대형 은행들로 확산시킨 잘못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블리클리 파이낸셜 그룹의 피터 부크바 역시 “이번 구제 방법은 매우 이상하다”라면서 “옐런 장관이 월마트나 코스트코, 타깃, 아마존을 불러서 망해가는 소매업체의 물건을 사라고 했다고 상상해보라”라고 꼬집었다.
유동성 지원도 한계가 있다는 점을 들어 폭스 비즈니스 뉴스는 “대형 은행들이 FRC 인수에 나설 가능성이 있으며 모건스탠리와 PNC 은행 등이 인수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라고 전했다.
웨드부시 증권은 FRC에 대한 투자 의견을 ‘매수’에서 ‘중립’으로 하향하고, 12개월 목표 주가로 5달러를 제시했다. FRC가 단기에 위기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잠재적으로 자산 매각에 나서면 기업 잔존가치가 떨어져 주주 입장에서 투자 실익이 줄어든다는 이유에서다. 월가의 300억달러 지원도 지역 은행 위기 전파를 억제할 수는 있지만 자금을 지원한 은행들이 120일 안에 다시 돈을 찾아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주가 하방 압력이 더 크다는 분석도 따랐다.
다만 현재로서는 은행권 위기를 둘러싼 소식이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으며 사태의 방향성을 잡기 힘들다는 점에서 섣불리 단기 투자에 나서기보다는 시장 흐름을 관망할 필요가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CEO는 3월 15일 연례 주주 서한을 통해 “SVB 파산은 연준의 공격적 금리 인상을 계기로 ‘느리게 진행되는 재앙(slow-rolling crisis)’의 서막일 수 있다”라면서 “아직은 재앙에 따른 피해가 어느 정도 규모로 확산했는지 알기 어렵고 더 많은 발작과 폐업이 따를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김인오 매일경제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