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차이콥스키가 사랑한 발트해의 도시 에스토니아 탈린
입력 : 2021.07.29 14:39:43
수정 : 2021.07.29 14:40:11
‘덴마크인이 세운 도시’라는 뜻을 가진 탈린은 아름다운 발트해를 끼고 있는 에스토니아의 수도이다. 중세시대의 고색창연함이 곰삭은 탈린은 유럽에서도 또 다른 유럽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710년 러시아 제국 때부터 구소련이 붕괴하기 이전까지 철의 장벽 속에 가려졌던 탈린은, 1991년에 독립한 뒤 발트해의 진정한 보석으로 거듭나고 있다. 우리에게는 ‘에스토니아’와 ‘탈린’이라는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지중해만큼 눈부신 발트해가 있어 더는 유럽 속 변방의 도시는 아니다.
생경한 탈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유서 깊은 역사와 아기자기한 건축물들이 동화처럼 그려지는 곳이자 러시아 제국의 휴양도시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때 러시아를 대표하는 음악가 표트르 차이콥스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등이 너무나 사랑했던 예술의 원천이었다. 이 중에서도 1867년 스물일곱 살의 차이콥스키는 탈린에서 남서쪽으로 100㎞ 떨어진 합살루에서 친구들과 여름휴가를 보내면서 그 유명한 ‘합살루의 추억(Souvenir de Hapsal Op.2)’을 작곡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1877년 부부간의 갈등이 많았을 때 다시 탈린을 찾았다. 동성연애자였던 그는 제자 안톤이나 밀류코바가 결혼해 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하자, 어쩔 수 없이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원하지 않았던 결혼 생활은 몇 달 만에 위기가 찾아왔고, 안타깝게도 앓고 있던 우울증이 더욱 심해져 강물에 투신할 만큼 그의 삶은 송두리째 깊은 늪으로 빠져들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결혼 전부터 그를 후원했던 폰 메크 부인의 격려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피할 수 있었다. 15여 년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폰 메크 부인의 호의와 배려가 없었다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몹시 흔들리는 차이콥스키는 더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지옥 같은 결혼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차이콥스키는 집을 나와 유럽을 떠돌면서 우울증과 식어버린 삶의 열정을 치료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마침내 그는 젊은 날의 추억과 내면에 깊이 묻어둔 평온함을 되찾기 위해 탈린을 찾았다. 특히 도시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톰페아 언덕에 서서 시가지와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발트해를 바라보며 피폐해진 심신과 시들어버린 영혼을 위로했다.
차이콥스키의 아스라한 추억이 남아 있는 톰페아 언덕에는 아르누보 양식으로 20세기에 세워진 국회의사당, 장엄한 돔 천장이 인상적인 알렉산더 넵스키 러시아 정교회, 에스토니아 대통령의 이·취임식이 열리는 루터 교회 등이 있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코투오차(Kohtuotsa), 파트쿨리(Patkuli) 등 여러 개의 전망대가 있는데, 그중에서 차이콥스키가 자주 찾았던 코투오차 전망대에 서면 그가 바라봤던 과거의 풍경처럼 오늘도 붉은 지붕과 뾰족한 첨탑, 그리고 푸른빛으로 물든 발트해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 폭의 수채화같이 그려진 탈린 시내를 보고 있노라면 왜 이곳이 세계문화유산의 도시이자 ‘발트해의 보석’이라 불리는지 그 이유를 금방 깨닫게 된다. 그래서일까? 좀처럼 사람들은 전망대에서 구시가지로 발길을 옮기려 하지 않는다. 아마 차이콥스키도 발트해에서 불어오는 말간 바람 몇 줌과 울긋불긋한 구시가지의 지붕들이 빚어내는 시각적인 소나타를 마음껏 즐겼을 것이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들으며 전망대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그가 걸었던 길을 따라 성벽 밖으로 10여 분 정도 내려가면 튜튼 기사단의 십자군이 세운 아름다운 광장과 중세풍의 건축물과 만나게 된다. 톰페아 언덕에서 본 탈린의 이미지와 달리 구시가지 심장부에 발을 내딛는 순간, 마치 중세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 온 것처럼 느껴진다. 한자동맹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탈린은 공공건축물, 교회, 상인들이 상주했던 건물 등 15~17세기에 지어진 건축물들이 세월과 정통으로 맞서며, 구시가지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광장 중심에는 북유럽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고딕양식의 구시청사 건물이 600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옛 모습 그대로이고, 일 년 내내 크고 작은 콘서트가 열리는 광장은 언제나 현지인과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이처럼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어깨를 나란히 한 구시가지는 차이콥스키 이외에도 많은 유명인이 이곳을 찾아와 차를 마시며 중세풍의 우아함을 한껏 누렸다. 이 중에서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존 F 케네디는 1939년 5월에 탈린을 방문했다. 그 당시 하버드 대학교의 학생이었던 존 F 케네디는 7개월 동안 유럽 전역을 여행했고, 폴란드 바르샤바를 거쳐 이틀 동안 구시가지 광장 주변에서 머물며 탈린이 숨겨놓은 북유럽의 정수를 만끽했다. 또한 프랑스 출신의 문학가이자 계약 결혼으로 유명했던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부부는 1964년 탈린에서 휴가를 보냈고, 1991년 달라이 라마와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여러 차례 방문해 탈린 시민들에게 종교인으로서의 진솔한 삶과 철학을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문화, 예술, 역사 등의 흔적이 알알이 박힌 구시가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망망대해를 바라볼 수 있는 바닷가에 이른다. 톰페아 언덕에서 바라본 풍경이 정적인 모습이라면 쉴 새 없이 파도가 일렁이는 바닷가에서 구시가지를 바라보면 역동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수평적 시각에서 주는 안정감과 파도의 강한 생명력은 불안과 우울함, 그리고 쪼그라든 차이콥스키의 열정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파도 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삶의 온기를 가득 품은 바람 소리는 지칠 대로 지친 차이콥스키의 텅 빈 영혼에 삶의 희망을 가득히 채워 주었다.
물론 탈린의 바다는 차이콥스키에게만 예술적 영감을 준 것은 아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또 한 명의 음악가인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도 이곳은 의미 있는 도시였다. 20대 초반, 러시아 해군에 복무 중이었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군함을 타고 탈린을 찾았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구시가지는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얼마나 인상적이었으면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탈린의 첫인상을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발트해에서 바라본 탈린은 세상에서 가장 평안해 보였고, 그러면서도 정열적으로 핀 붉은 장미 같았다. 고풍스러운 중세 거리에는 늘 아름다운 선율이 흘렀고, 그 음악 소리에 사람들의 표정은 평온하지만 뜨거워 보였다. 그런 탈린을 보고 있으면 격한 피아노 선율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말처럼 탈린의 구시가지는 일 년 내내 음악 선율이 흐르고, 발길 닿는 골목길마다 예술가들의 영혼들이 살아 숨 쉰다. 단순히 탈린은 발트해만 품은 도시가 아닌 예술가들에게 사랑받는 예술의 도시이자 일반 여행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하는 도시이다.